(짝퉁) 벌거벗은 한국사(대한민국) 2. 독립운동가분들의 활동 - 상해임시정부 이야기 1편

반응형
반응형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지금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은 그때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들에게 언제나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있다. 그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며 그 암흑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것일까... 앞으로 몇번의 포스팅은 상해임시정부라는 큰 틀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다. 수많은 분들이 있겠지만 짧은 나의 역사기억에 남은 분들을 위주로 그들의 역사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3월 1일을 기념하여 우리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독립운동가분들의 활동을 기리며 3월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상해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국가 건설을위해 주권 자치를 실행하였던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이다. 후일 평가가 엇갈리기도하지만 그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어떨때는 무력으로, 어떨때는 교육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해방을 꿈꾸었던 자들이다. 이들중 지금의 평가에서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등의 갈라치기는 큰 의미가 없다.

 

또한 그 당시 사회주의자를 꿈꾼 이들이 바라본 사회주의 국가가 지금의 러시아, 중국은 아닐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당시 사회주의자였다고 지금에와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것을 옳지 않다. 이번 포스팅에 등장하는 분들은 각자의 방식의 암흑의 시대를 걷어내고자 치열한 삶을 살았던 자들의 발자취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은 단순히 비폭력 독립운동을 넘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최근 일부 지식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가운데 임시정부의 존재를 폄하하려는 주장들이 있지만 그들은 최소한 대한민국 주류권력에 빌붙어 기생할려고하는 세력이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데 인생을 건 조상을 둔... 딱 2가지 부류일것이다.... 

 

임시정부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은 각개전파식의 운동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무언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줄 기구나 단체가 없었기때문이기도하다. 물론 이당시에도 독립을 위한 많은 단체들이 있었지만 당시 이 단체들은 사회주의 계열 중심 혹은, 민주주의 계열로 나뉘어져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뭉칠 포괄적인 기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백범 김구선생이 사용한 책상과 의자(pixabay)

 

 

이즈음 각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국, 러시아, 일본등지에서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고, 1917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 선생을 필두로 신채호, 신석우, 조소앙, 이상설, 박은식등이 중심이 되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게된다.  이후 1919년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부정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으로 일어났다. 당시 3.1운동의 '비폭력 독립운동'은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독립단체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기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당시 실질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러시아 연해주와 한성, 그리고 중국 상하이에서 각각 수립되었다. 러시아에서는 3.1운동이 발발하자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을 대내외에 발표하였다. 한성또한 각 도의 대표들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하며 '한성정부'의 수립을 알렸다. 

 

이후 각 임시정부들은 통합을 추진하게되는데 러시아 연해주측의 원세훈과 상하이측의 안창호 등이 주도하게된다. 그들은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정부의 위치를 상하이에 둔다는 원칙에 합의를 이룬다. 1919년 9월 11일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며 정부의 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정하는데 이것이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수립된 민주정부이다.

 

9월에 제1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였고 이승만, 박은식이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26년 9월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를 채택하며 이상룡, 홍진, 김구등이 짧은 기간 국무령을 맡았다. 그리고 1927년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채택하면서 이동녕, 김구등이 중심이 되었고, 1940년 1인 지도체제인 주석제로 전환하고 1944년 좌우합작을 통해 주석, 부주석 체제를 갖추게된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 도산 안창호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은 무력투쟁론과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등의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때 당시 안창호 선생은 민족개조론을 주창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안창호 선생은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워 그 실력이 기반이 되어야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며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통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게된다.

 

그의 이러한 실력 양성론은 후에 윤치호, 이광서, 최남선, 송진우, 조병옥, 김성수등에게 영향을 주게된다. 이들 중 친일로 변질하게 되는 자들은 그들의 선택일뿐 안창호 선생의 잘못이 아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일찍 주장하였다

 

 

안창호 선생은 웅변술에 매우 뛰어났다고한다. 웅변과 연설에 모두 능통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연설은 청년을 감동시키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였다. 그가 지목한 이상적인 정치인은 구당 유길준으로, 그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외교관, 계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구당 유길준은 근대 한국 최초의 미국과 일본 유학생이기도하다.

 

아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남긴 말들 중 일부를 적어보았다. 출처는 인터넷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 명언을 검색하면...^^

 

  • 마음을 화평하게 만드는 공부가 가장 큰 공부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증 큰 행복이기에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여라.

 

  • 자기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나아가 나라를 사랑하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 내가 죽어서 조국이 독립된다면 나는 기꺼이 죽으리라.

 

  • 나는 밥을 먹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고, 잠을 자는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것이다.

 

  •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 흔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한다.

 

  • 자기의 몸과 집을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대신 다스려 줄 사람이 없듯이 자기의 국가와 자기의 민족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구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요, 주인관념이다.

 

특히 안창호 선생은 구한말 미주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학교와 교회를 건립하는것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안창호 선생에게 독립은 단순간 갑자기 얻어지는것이 아닌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 헌신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듯하고 그러기위해서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교육 지도자이기도했다.

 

 

반응형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 백암 박은식

 

 

백암 박은식 선생은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애국계몽운동가였다. 백암 박은식 선생은 이승만에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기도하다. 그는 조선후기인 1859년 황해도 황주군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문은 오래전 몰락한 가문이었다. 그는 어린시절 서당에서 유학을 익혔으며 1875년 황해도 지역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던 안태훈과 사귀면서 자주 교류를 하였다. 이 둘은 어린시절부터 신동이라고 불릴정도로 머리가 매우 명석하였다고 한다. 안태훈의 아들이 바로 위에 언급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성인이 된 뒤인 1880년 경기도 광주로 가서 신기영, 정관섭등에게서 학문을 수학하게되는데 이 둘은 바로 남인계이자 조선시대 실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 계승자들이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위키백과)

 

 

백암 박은식 선생은 원래 본인이 공부한 주자학과 위정착사사상의 본질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새로운 학문과 지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된다...그리고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한다.

 

1898년 9월 장지연, 남궁억, 나수연등과 '대한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이를 '황성신문'으로 제목을 바꾸고, 박은식은 장지연과 함꼐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

 

대한제국 멸망 후 박은식 선생은 1911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동고대사론',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연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등을 집필하였다. 중국에서 여러 문인 및 사상가들과 교류를 하다 상해로 와서 1914년 드디어 '한국통사'의 집필을 완성하고 이듬해에 간행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다. 이는 '한국통사'에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일제에 대한 독립 운동도 중시하여 의병 활동은 정신, 역사적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통사'는 중국과 러시아 지역의 교포들 사이로 널리 읽혀지게되고, 1917년 미국 하와이에서도 출판하게된다.

 

박은식 선생은 3.1운동 이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발간하게된다. 박은식 선생은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주요하게 다루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노력은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될것이라 주장하였다. 1919년 10월 박은식 선생은 국민교육의 연구장려 및 유학생 파견, 지도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를 상해에서 조직하게되고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각 계파별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게되는데, 이때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박은식 선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박은식 선생은 7월 임시정부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꾼 후, 9월 국무위원제의 최고 대표자격인 국무령에 석주 이상룡 선생을 추천하게된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박은식 선생의 추천으로 인해 국무령에 취임하게되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이 없는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회를 폐지시키고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박은식 선생의 단 한가지 꿈은 바로 조선의 독립을 직접 눈으로 보고 광복사를 쓰는 것이었다고한다. 하지만 박은식 선생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결국 모든 자리에서 사임하게되고, 1925년 11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된다. 박은식 선생이 20년만 더 버텼더라면 광복사를 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되는 부분이다. 

 

박은식 선생은 '첫째 독립을 하려면 전족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하며, 둘째 독립운동을 위하여는 모든 수단방략이라도 쓰고, 셋째 동지간의 애증친소의 구별이 없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부분에서 볼때 박은식 선생은 단순히 어떤 사상을 중심으로한 정치주의자로 구분하는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박은식 선생의 유일한 꿈은 조선의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번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에서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언급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예전에 포스팅으로 백범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때문에 굳이 백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나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포스팅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서울 역사여행 -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 경교장

3월 18일 네번째 서대문역 지하철 여행.. 경교장으로... 역시 홀로여행이다 ^--^ 경교장의 이름은 예전에 들어본 기억이있다. 단순히 백범 선생의 거주지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그 보존상태나 문화

chhyung.tistory.com

 

 

 

서울 역사여행 - 3월에 방문해야하는 백범 김구 기념관 1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민족의 지도자

4월 1일 첫번째 홀로여행....알고 싶은 역사.... 백범 김구 기념관 방문.... 난 백범 선생의 기념관이 따로 있는지는 몰랐다.. ㅜㅜ 경교장이 있기에 따로 기념관이 있는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까칠

chhyung.tistory.com

 

 

 

서울 역사여행 - 3월에 방문해야하는 백범 김구 기념관 2편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비로소

1편에 이은 바로 2편으로.. 2편은 백범 선생의 상해임시정부에서의 활동과 광복 후 서거하기전까지의 기록이다. 두번째 포스팅은 가급적 사진과 설명으로 대체하고자한다...1층 전시관도 그렇지

chhyung.tistory.com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