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대한민국) 5. 대한민국 민주, 진보진영의 역사 - 1955년에서 1965년의 '민주당'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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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더불어민주당은 민주 / 진보진영, 국민의힘은 보수진영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왜 더불어민주당에는 민주 진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국민의힘은 단순히 보수진영이라고만 표현할까? 민주의 대척점이 보수는 아닐진데...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사건을 계기로 1955년 창당된 민주당.. 오늘은 우리나라 민주 / 진보진영의 중심이 되는 '민주당'의 1955년에서 1965년까지의 이야기다.

 

 

1954년 11월 29일 제 3대국회에서 헌법의 일부가 개정된다. 주요 내용으로는 헌법 공표 당시의 대통령의 3선 연임 제한 철폐, 통제경제계획 폐지 및 자유시장 경제 채택, 국무총리제 폐지, 군법회의의 헌법적 근거 명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을 통과시킨다. 

11월 27일 개헌 의결 투표결과는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 무효 1명으로 정족수 기준인 203명의 2/3이상인 135.3333.. 명에서 0.333333.... 명이 모자라 부결이 선포되었다. 반대를 주도한 것은 민국당이라고 불리는 '민주국민당'이었고 정부 여당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이었다. 위 내용은 정부 기관지를 제외한 모든 신문사에서 '민주주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였다.

 

 

당시 종로에 위치한 자유당 중앙당사

 

 

자유당은 다음날인 11월 28일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아래와 같은 주장으로 표결은 번복하게된다.

"203의 수학적 2/3는 135.3333...인데 0.333... 은 1.5 미만으로서 수학의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는 135.3333... 명이 아니라 135명이다"

 

위 주장을 바탕으로 개헌 투표 다음날 당시 법무부 장관인 조용순은 135표만으로도 개헌선인 정족수 2/3에 도달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당시 자유당은 그들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의 이학박사인 인하공과대학장을 비롯하여 서울대 현직교수까지 대동하여 개헌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들의 이름은.... 그냥.. 몰라도 되고 기억조차 할 필요가 없다.

 

 

 

 

이에 조병옥 박사를 민국당은 거세게 반발하였고 여기에 자유당은 이정재를 중심으로 한 정치깡패를 난입시켜 야당국회의원들을 위협하였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정부 여당인 자유당이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사사오입'사건이다. 당시 자유당 소속이었던 김영삼, 민관식 등 자유당의 소장파 일부 의원은 이를 비판하며 자유당을 탈당한다.

 

1955년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을 계기로 민주국민당(민국당)과 흥사단, 자유당 탈당파등 범 야권의 '호헌동지회'를 결성하게 된다. 민주당은 이 호헌동지회를 중심으로 9월 18일 창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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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김영삼..대한민국 민주화의 거대한 두축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다

 

 

그렇게 1955년 9월 18일 창당된 민주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의 정권을 맡게 되지만,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하게 되고 1963년 재건되어 1965년 민중당으로 통합, 해체되었다.

 

초기 민주당의 기본이념은 반공. 반독재, 대의정치 및 책임정치의 확립, 사회정의에 입각한 국민경제체제 확립, 평화적 국제질서 수립등을 골자로 하여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으나 좌익 전향자, 독재나 부패행위로 인해 규탄을 받은 자는 신당발기에 참여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혁신계나 족청계의 인물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신당의 결성은 보수를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파와 혁신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대동파로 나뉘어 신당발기작업은 상당히 지연되기도 하였다.

 

1955년 초에 시작된 신당작업은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원내 장면 박사와 정일형 박사의 흥사단계와 자유당 탈당계, 그리고 무소속 일부를 흡수하여 9월 18일 민주당을 발기시켰다. 하지만 민주당은 초기 창당 때부터 민국당 출신과 다른 인사들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며 후에 민주당이 구파와 신파로 대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초기 민주당의 가장 핵심은 바로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실현이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앞세워 장기집권을 꿈꾸면서 민주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은 신익희와 장면을 각각 정.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선거를 10일 앞두고 신익희 선생이 갑자기 죽으면서 장면 후보만 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위기를 느낀 자유당은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과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을 삭제하려는 개헌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렇듯 자유당이 민주당을 탄압할수록 국민들은 민주당을 동정하며 지지하게 된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정부와 자유당의 선개개입에도 불구하고 79석을 획득하게된다. 이때 자유당은 민주당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경위권을 발동하여 농성중인 민주당 의원들을 퇴장시킨 후 이를 통과시키게된다. 이것이 바로  '2.4'파동이다. 국가보안법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가 지속될수록 민주당은 더욱 거세게 반항하였고, 거기에 호응한 국민들은 민주당을 계속 지지하게된다. 그렇게 계속적인 위협을 느낀 자유당은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속칭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조병옥 박사를 후보로 내세웠으나 미국에서 치료 중 갑자기 죽음으로서 부통령 후보인 장면을 당선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때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이 어렵게 되자,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지령을 내려 투. 개표를 조작하게 된다. 이가 바로 '3.15 부정선거'이다. 

 

 

누군가의 욕심으로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은 더딜수밖에 없었다.

 

 

3.15 부정선거의 여파는 상당했다. 특히나 학생들 사이에서 반독재운동이 펼쳐지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역사적인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4.19 혁명의 민주당은 드디어 내각책임제를 개헌안에서 통과시키게 된다. 그리고 1960년 7월 29일 선거에서 전체 233 의석 중 75.1%에 해당하는 175석을 차지하며 집권 정당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집권 정당이 되었지만 문제는 민주당 내부에 있었다. 초기 민주당 창당 때부터 지속적으로 발생한 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결국은 민주당을 분당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구파와 신파의 대립은 결국 민주당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달은 민주당구파동지회를 비롯하여 구파의 신당발족으로 이어지게 되고, 또다시 신당발족을 선언한 구파는 협상파와 분당파로 나눠지게 된다. 이때 분당파가 10월 18일 정당을 창당하게 되는데 이 정당이 바로 '신민당'이다. 협상파는 민주당과 합작하며 민주당은 표면적으로 안정세력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7.29 총선으로 압도적인 다수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은 분파작용이 거듭되면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해체되고 만다.

 

민주당의 3기 정치는 1960년 7월 18일 창당대회를 열고 박순천을 당총재로 추대하게 된다.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된 민주당을 재건한 것으로 반독재와 민주주의 수호 및 군정의 종식을 목표로 하였으나, 1963년 11월 26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13명의 당선자밖에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후 민주당은 국민의당, 자유민주당과 함께 '삼민회'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 원내활동을 하게 되는데 1964년 9월 17일 국민의당을 흡수하여 대표최고위원에 박순천, 최고위원에 허정을 선출하였다. 그 후로도 민주당은 행정부를 견제하고 공화당의 원내 독주를 막을 방법은 야당 통합밖에 없다는 국민들의 여론에 좇아 민정당과 합당교섭에 나서서 1965년 3월 민중당을 발전적으로 해체시킴으로써 10년 동안의 정당 활동을 끝마치게 된다.

 

 

자료참조 :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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