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대한민국) 6. 필생의 라이벌 - 대한민국을 민주화로 이끈 2명의 거인.... 김대중과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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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는 대한민국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지역이다. 대한민국은 고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시대 일부를 제외하곤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의 주류는 언제나 경상도였다. 그런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거대한 두 거인이 탄생하였으니,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오늘은 두 전직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헌정 최초이자 유일한 호남 태생 대통령이자, 직접 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최초의 민주당 정당계열 소속의 대통령이다. 대한민국에서 민주당 정당계열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하여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단 세 분뿐이다...

 

젊은 시절 김대중은 목포에서 해운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는 경영인이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건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를 통해서다. 하지만 무소속으로 목포에 출마한 그는 낙선하였고, 1956년 9월 민주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61년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 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초기 그의 정치이력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바로 1964년 자유민주당 소속 김준연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한 '의사진행발언'.. 즉 filibuster이다.. 그는 당시 체포동의안을 막기 위해 홀로 5시간 19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게 된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그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드디어 그의 정치 인생 최고의 경쟁자인 박정희와 경쟁하였지만 94만여 표 차로 낙선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미국과 일본등을 왕래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에 의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신군부에 연행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외국환관리법 위반, 계엄법 위반등의 혐의로 1981년 사형이 확정되고, 같은 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된다. 1982년 형집행정지와 동시에 미국으로 추방된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며, 국내의 김영삼과 연락하며 '민주화추진협외회(민추협)'을 결성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사면 복권되어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당시 야당인 김영삼과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며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193만여 표 차이로 낙선하며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이후 영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995년 제1회 지방선거를 거쳐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에 복귀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이후 1997년 김종필의 자민련과 대통령 단일화 선언을 통해 'DJP 연합'이 완성되었으며, 그래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40%의 득표율로 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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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6.25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장택상의 인사 담당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고향인 거제에서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유당의 '사사오입' 사건을 계기로 자유당을 탈당하게 되고,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지낸다. 그는 민주당 계파 중 구파에 속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신파에 속한 정치인이다.

 

1963년 제6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당시 민정당이 민주당과 통합해 민중당을 결성하자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1970년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김대중에 패배하고 만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며 그는 가택연금되었으며 이후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에 들어서게 된다. 유신철폐운동을 벌이던 김영삼은 1979년 8월 'YH무역사건'으로 인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게 되는데, 당시 이에 대한 반발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를 끝을 맺게 된다.

 

신군부 등장 이후에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김영삼은 야당 인사들과 단체를 만들어 결속력을 다지게 되는데 이 단체가 바로 그 유명한 '민주산악회'이다. 1984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이후 총재인 이민우가 전두환 정권의 내각제 개헌 수용 가능성을 밝히자 김대중과 함께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6월 항쟁 이후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김영삼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김대중과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며 함께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게 되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하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도입'이다. 하나회는 전두환이 결성한 모임으로 전두환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제5 공화국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하나회는 노태우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아직까지 군의 모든 주요 관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하나회를 척결함으로써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온 군의 비리를 상당 부분 해소하게 된다.

 

'금융 실명제 도입' 또한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제도이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인을 비롯한 수많은 정. 재계인사들은 차명관리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화(?)되던 시기였다.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 실명제 도입'은 단순한 금융법 개선이 아닌 당시까지 이어져내려 오던 한국사회의 부패의 뿌리를 뽑을 정도의 대형 이슈였다.

 

 

참조 - 대통령 기록관

 

 

또한 당시 '세계화'정책에 맞물려 '우루과이 라운드'에 참여하였고 세계무역기구인 WTO 주요 회원국으로 활발히 호라동하였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의 각종 표준이 되는 '경제합력개발기구' 즉 OECD에 가입한 것도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이다.

 

이렇듯 임기초반 각종 개혁정책으로 국민들 다수의 지지를 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인한 조문파동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게 되었고, 1997년 1월 '한보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한보사태는 기업들의 연이은 부도로 이어졌으며 결국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인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1997년 12월 3일 ~ 2001년 8월 23일)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대한민국은 당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지만 그 반대급부가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에 터져버린 것이다. 기업은 줄도산했고 외환보유액은 급감했으며 IMF로부터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대한민국은 IMF가 요구하는 경제체제를 수용하고 그 요구에 따라 국가경제 구조조정이 시작되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주요 이슈는 바로 이때부터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으며 우리 집도 얼마안되는 금붙이를 금모으기 운동의 일환으로 반납한 걸 기억한다. 

 

이렇듯 김영삼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전환시기에 있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그가 1990년 3당 합당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단일화하면서 현재의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시초가 되는 민자당.. 즉 민주자유당 창당해 대해서 찬, 반이 나뉘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정치적인 선택이므로 그 선택에 대한 결과와 비판은 오롯이 그의 몫으로 남아있다. 당시 30여 년간 이어져온 군인 출신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란 의미의 '문민정부'는 김영삼 대통령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3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등에 의해 낙선되었다.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머물던 김대중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민련의 김종필과 'DJP 연합'을 통해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4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이기도 하였다.

 

 

참조 - 대통령 기록관

 

 

그의 3번의 대통령 낙선과 정계은퇴.. 그리고 은퇴를 번복 후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일들을 보고 반대 진영에서는 대통령병이라고 낮게 폄하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전에 본인 스스로 지식가이고 사상가였다. 그의 일대기를 적은 '김대중 평전'을 보면 그건 단순한 한 인간의 일대기를 넘어서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자유당 독재시절을 거쳐 박정희의 유신체제, 전두환의 신군부 시절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민주화를 이루어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개인의 평전이기에 조금의 과장이나 치세들을 차치한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근 10년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뇌리에 박히고 인상 깊은 책 3권에 속한다!!!! 꼭 추천!!!!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은 누가 뭐라 해도 햇볕정책으로 인한 남북한 관계 개선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그가 평생을 거쳐 이루고자 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이다.

 

 

사진(미디어 오늘 기사 - https://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7856)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2000년 6월 대한민국 최초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게 된다. 그의 햇볕정책은 북한 전역을 따뜻하게 비추어 그들 스스로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자발적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대북 유화정책이다. 이 햇볕정책은 차후 민주당 대북정책의 밑거름이 된다. 남북정상회담 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발표한 '6.15 공동선언'은 향후 남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에 2000년 12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참조 : 대통령 기록관, 나무위키, 미디어오늘 기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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