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대한민국) 8. 사람사는 세상을 꿈꾼 노무현 1편 - 정치인은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우선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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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토요일이었는데 전날 감기때문에 온 몸이 완전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23일 8시쯤인가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에 tv를 켜는데 속보가 날아왔다.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추락했다는 속보였다. 그때까지만해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로 tv랑 인터넷을 번갈아보며 확인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속보가 다시 tv와 인터넷을 뒤덮었다. 내게 정치와 대통령이란 이런것이다를 알려준 그분은 그렇게 세상을 등지셨다.

 

 

 

 

1987년 6.10 항쟁이후 대한민국은 비로서 제대로된 민주주의 사회에 들어설 수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된 후 첫 대통령이 노태우라는것또한 당시 국민들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으니 그 또한 민주주의 사회의 결과이다. 향후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는 보수주의가 뿌리깊게 박힌 사회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대한민국에도 진보가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그시절 서민들이 그러했듯이 노무현 대통령의 어린 시절역시 가난하였다고한다. 그래도 공부머리는 있었는지 사법시험을 공부해 판사가 될 수 있었는데, 당신의 성격과 판사는 잘 맞지 않았던듯 싶다. 잠깐동안의 판사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와 변호사를 개업하였는데, 초반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꽤나 크게 성공했던듯싶다. 세무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면서 부산에서 꽤나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특별한 생각을 하는데 곧 다가올 서울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는 종목이 무엇인지 찾아보다 요트대회는 당시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어서 특별한 규정없이 참가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한다. 그래서 그때 당시 올림픽 요트대회에 참가하기위해 실제로 연습도 많이 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대통령 후보시절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세무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된다.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최병국 검사가 지휘하는 공안 당국이 부산 지역에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등 22명을 1982년 4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영장없이 체포하고 20일에서 63일동안 감금한 사건이다. 이유는 '불온서적'등 이적표현물을 학습했다는 이유인데, 당시 그들이 불온서적으로 선정한 책은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들이다. 이 책들은 서점에서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었고 심지어 어떤 책들은 서울대 권장도서로 선정된 책들이지만 당시에는 모든 법들위에 '국가보안법'이라는것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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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기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위해 위의 일들처럼 터무니 없는 사건을 만들고, 그들을 고문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내게하였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인 서울의 '학림사건'에이어 부산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건을 만들어내어 위 사건은 '부산의 학림사건' 즉, '부림사건'이라고 부르게된다.

 

당시 세무 전문이었던 노무현 변호사는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등과 위 사건을 변론하게되고, 이를 계기로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게된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다는것은 참으로 힘들었을것이다. 실제 돈이되는것도 아니고, 앞서 말했듯 당시는 모든 법위에 '국가보안법'이라는 해괴망측한 법이 존재했기에 변호사라고해도 국가를 상대로 뭔가 제대로 해보지 못했을것이다. 

 

노무현 변호사가 초기 인권 변호사로 활동을 하며 부산지역에 어느정도 이름을 알리게되자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김영삼 총재가 이끄는 민주당에서 부산지역의 시민활동가등을 추천받게되는데 그 중 한명이 노무현 변호사이다. 노무현 변호사는 얼마동안의 고민을 한 후 정치권으로 들어서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김영삼 총재가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송기인 신부에게 추천을 부탁했고, 송기인 신부는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를 추천했지만 당시 문재인 변호사는 거절했다고한다. 결국 나중에는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만 그건 그가 후에 말한 '운명'일 뿐이었을것이다.

 

그렇게 정치권에 들어선 노무현 변호사의 정치 이력은 새삼 다시 말하지 않아도 그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것이다.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민주당의 이름으로 낙선된 몇 번의 선거들. 처음 노무현 변호사가 정치권에 입문했을때만 하더라도 민주당은 하나의 정당이었다. 동교동계의 김대중과 상도동계의 김영삼이 함께 1987년 통일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그 두분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축해 민주진영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이후 통일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선출문제에서 대립하면서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집단탈당을하며 평화 민주당을 창당하게된다. 통일 민주당은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지만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 정의당의 '나는 보통사람입니다'를 외친 노태우 후보에게 패하고 만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때 당시 김대중의 평화 민주당이 아닌 김영삼의 통일 민주당으로 입당하여 정치를 시작하게된다. 그 스스로는 김영삼보다는 김대중이 훨씬 매력적인 정치인이었지만 당시 부산지역에서 김영삼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고, 노무현 변호사 역시 김영삼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통일 민주당을 택했을것이다. 하지만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여소야대의 국회가 진행되자, 노태우 정부는 1990년 김영삼의 통일 민주당, 여당인 민정당, 제3당이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3당 합당을 선언하며 민자당, 즉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다. 흔히 보수대연합이라고 불리는 이 3당합당을 통해 민자당은 거대 여당으로 올라섰고, 민자당은 후에 신한국당, 새누리당을 거처 지금의 국민의힘에까지 이르고 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당에 남게되는데 흔히 이 당을 꼬마 민주당이라고 한다. 노무현 변호사의 정치적 시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것이다.

 

 

199년 1월 통일민주당 해체식에서 '이의있습니다'라고 위치는 당시 노무현의원(사진-오마이뉴스)

 

 

그렇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꼬마 민주당을 택한 정치인 노무현은 부산을 자신의 지역적 거점으로 삼고 국회의원과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연이어 낙선하고 만다. 또한 후에 노무현은 김대중 총재의 평화 민주당과 합당을 하게되는데 1970년대 박정희 시절부터 촉발된 지역감정은 정치인 노무현을 점점 더 고립시키고 말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모임인 '노사모'는 이때 처음 등장하였다고 하니 노사모의 시련도 말로 표현하지 못할만큼 힘들었을것이다.

 

(자료조사 - 오마이뉴스, 대통령기록관, 나무위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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