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대한민국) 11. 어떤 결과의 과정과 원인을 찾아내는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되어야한다.. (feat. 내 마음대로 끄적거리기 2탄)

반응형
반응형

 

 

 

(고)조선이 한반도에 세워진 이후 우리는 기억하는 역사(국가)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가령 우리가 백제로 알고 있는 온조가 세운 나라는 백제이기전에 십제국으로 당시 백제의 영토에 존재하였다. 역사가 기록으로 남기 위해선 우선 우리의 말과 글이 존재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국가)의 힘이 강성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전체의 0.01% 정도밖에 되지 않은 권력자와 정복자의 위인전일수도 있다.

 

 

소서노가 한반도의 집권세력이었다면?

 

고대 한반도에서 가장 잊혀진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소서노'이다. 예전에 한 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소서노에 대해서 알게 된 경위는 드라마 '주몽'을 통해서다. 하지만 드라마의 특성상 소서노는 철저한 조연으로 남아있을 뿐 그녀에 대한 세세한 행적들을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추측할 뿐이다. 당시 졸본땅의 최대유지였던 아버지 연타발에 의해 상인으로 성장한 그녀는 재력을 바탕으로 주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고구려를 건국할 수 있었다. 고구려 건국 후에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 계승서열에서 밀리자 미련 없이(?) 고구려를 떠나 자신의 세력을 데리고 남하하여 그녀의 아들 온조는 백제를 건국하였다. 고대 한반도 역사에서 어쩌면 가장 매력적이고 진취적인 인물을 우리는 단지 드라마 '주몽'을 통해서 아주 살짝 엿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사료가 적은것은 실제 고구려의 권력다툼에서 주몽의 첫째 부인의 아들인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그녀에 대한 기록은 철저히 감춰줬을 것이다. 적장자 계승원칙이 언제부터 한반도에 유입되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중국인 한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면 고구려역시 동일 문화권에서 같은 이유로 소서노의 아들이 아닌 유리가 다음 왕위를 계승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장자 계승자가 유리가 아닐까?

 

 

소서노는 왜 왕위쟁탈전에서 그리도 쉽게 포기하고 남하를 결정하였을까?(사진-나무위키)

 

 

그렇다면 유리가 아닌 온조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백제는 위례주변을 비롯한 한강 이남을 정복하지 못하고 당시 뿔뿔이 흩어져있던 십제국들이 고대 한국의 또 다른 축이 되었을까? 엄밀히 말하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축세력과 신라를 건국한 주축세력은 한반도의 토착세력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세력이다. 하물며 가야계까지 외부세력이 건국했다고 봤을 때 실제 한반도의 토착세력은 십제를 비롯한 마한, 진한, 변한 등 고대 국가로 진입하지 못한 무수히 많은 한반도의 기존 세력들이다. 한반도의 토착세력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신석기에서 시작된 문명이 청동기를 거치며 철기로 이어질 동안 한반도는 당시 청동기 문화에 머물렀던 반면 외부 유입세력은 그보다 한 단계 앞선 철기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외부세력의 문화가 뛰어났다기보다는 그들이 가진 군사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고대 한반도는 철기문화로 무장한 외부세력에 의해 고대 국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응형

 

 

고려의 왕건이 일부일처제를 선호했다면?

 

고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1,000년을 한반도를 지배했고 그 후계를 고려가 이었다. 고려 역시 실제로는 고구려를 잇는 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권은 한반도 이남이 아닌,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역이다. 고대 국가의 건국과 번성이 단순한 군사적 비교우위를 통한 정복이었다면 중세로 접어들면서 한반도 역시 점진적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각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마다 독특한 문화와 그 지역을 중심으로한 토착세력들이 성장해 나아갔다.

 

고려가 호족사회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 건국의 논공행상에서 1, 2순위에 든 집단이 귀족세력으로 고려에서 정착해 나아갔고, 나머지는 태조인 왕건의 혼인정책에 의해 각 지방의 유지들은 자신의 딸을 왕건과 혼인시켜 사위를 자신들을 지켜줄 최고의 든든한 백그라운드로 만들어버린다. 고려 초기는 이렇듯 사위를 왕건으로 삼은 지방 유지, 즉 호족들이 왕건 사후 왕위계승을 위해 서로를 견제하며 합종연행을 진행한다.

 

그러다 고려는 초기 고려의 기틀을 세우는 이가 등장했으니 이가 바로 과거제와 노비안건법을 시행한 광종이다. 광종 이후 비로소 고려도 왕위계승이 일원화되면서 사회는 안정을 찾게 되고, 이를 계기로 고려는 몽골이 침입하기 전까지 최대의 문화적 성장기를 거치게 된다. 이는 중국과의 현실정치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맞게 되는데 당시 중국의 전통세력인 한족을 계승한 송나라는 문치를 앞세운 국가였기에 주변국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계승만 한다면 큰 무력충돌 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송나라 특유의 문치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광종의 노비안건법 시행의은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것이었다(사진-네이버 블로그)

 

 

 

 

테무진(징기즈 칸)이 세계를 정복하지 않았다면?

 

물론 이는 송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는 계기가 되면서 송은 북송과 남송으로, 중국은 한족이 아닌 몽골초원의 기마병에 의해 중국 최초로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중국을 통치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물론 이 기마병을 단순히 말 잘 타는 아시아의 소수 민족으로 치부하면 곤란하다. 그들은 서양의 알렉산더와 더불어 당시 문명이 퍼진 전 세계의 30% 이상을 지배하는 어마무시한 민족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징기즈 칸은 자신의 절친이자 최대 라이벌인 자무카를 제거함으로 몽골에서의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그 영향으로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고려 역시 몽골의 기마병아래 무릎 꿇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당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그들의 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한반도는 기존의 토착 세력의 문화에 유목민족인 몽골의 문화가 융합되면서 또 다른 독특한 한반도 문화를 생성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인이 가장 즐겨마시는 '소주'의 유래는 여러 가지 썰이 있지만 그 제조방법이 몽골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또한 기존에도 한반도에 존재한 문화 중 하나인 발효에 대한 좀 더 대중적인 방법이 몽골에 의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몽골 군대의 최고 재산은 바로 말인데, 당시 한반도는 이북의 송화강 유역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일부 말을 기르긴 했지만 실제로 말이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한 건 몽골의 말을 제주도에서 기르기 시작한 이후이다.

 

 

몽골에서 유입된 증류방식은 몽골또한 아랍에서 유입된 방식이다

 

 

당시 몽골의 지배에 있던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각 국가들은 몽골 유목민족의 문화와 각 국가들의 문화들이 뒤섞이면서 다양한 형태의 문화들을 새롭게 선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몽골이라는 국가자체가 해당지역의 문화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나 몽골이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독특하면서도 치밀한 혼인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은 각 지역을 정복하면서 주요 지역은 몽골 왕족의 여인들과 혼인을 시키곤 하였다. 몽골 왕족의 여인과 결혼한 각 지역의 왕족(혹은 귀족)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인정받기 위해 결혼 후 몽골의 정복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몽골은 그들을 최전방 전위세력으로 앞세워 전쟁을 치르며 그들 중 수많은 왕족들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하여 과부가 된 몽골의 왕족 여인들은 자연스레 그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고 그녀들의 자식으로 지배세력이 바뀌더라도 몽골의 세력권아래 그 수많은 정복지역을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러한 몽골의 영향권아래 고려의 문화를 지키면서 또 한편으로 몽골의 풍습과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들을 접목시키며 한반도에 또 다른 고유한 문화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나 고려시대까지의 한반도는 아직 유교문화가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에 비해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렇게 고려가 한반도를 계속 지배했으면 하는 상상도 해보지만 고려 역시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들의 문화, 통치적 관습 때문에 분열이 시작된다. 고려는 철저히 귀족과 호족사회였는데,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수많은 영토와 소작농을 거느린 각 지역의 권문세족으로 변모한다. 그들에게 고려는 국가라는 이념보다는 그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자신들이 추대한 왕 씨가 왕으로 있는 하나의 구역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 때문에 고려는 중앙집권국가로서의 기능을 짧은 기간 동안 상실하고 만다. 고려 초기 광종의 각종 개혁정치에 의해 한때 고려는 중앙집권국가로 들어서지만 그 이후 지방의 토착세력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그 결과 몽골의 침입과 그즈음 중국에 들어선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설정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이때 등장한 세력이 당시 명나라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운 신진사대부와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이성계가 등장하면서 고려 역시 50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한반도의 새로운 주인으로 조선이 탄생된다.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무너뜨릴 힘이없었지만 이성계와의 전략적 파트너쉽을 이루며 그를 자신들이 바라는 성리학 국가를 만들기위해 조선을 만들어 왕으로 옹립했다(사진-네이버 블로그)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