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 '카데시 전투'
- 역사와 정치/벌거벗은 세계사(곰돌이의 글쓰기 연습)
- 2025. 2. 13.
람세스 2세는 그의 아버지 람세스 1세에 이어 이집트 파라오에 등극한다. 아버지 람세스 1세의 강력한 왕권을 이어받은 람세스 2세는 기원전 1274년 15만의 병사를 이끌고 히타이트의 왕 무와탈리 2세와의 전투를 위해 직접 카다시로 출정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 '카데시 전투'이다.
소설 '람세스'로 유명한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의 3대 파라오이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로 인정받는 람세스 2세는 20대에 왕위에 등극후 약 60년이상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알려져있다.
람세스 2세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전 파라오들의 업적덕택이다. 람세스 2세가 즉위하기전인 제18왕조의 하트셉투트 여왕, 투트모스 3세, 아멘호테프 3세로 이어지는 안정기를 물려받은 람세스 2세는 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게된 배경이기도 하다. 특히나 토트모세 3세는 시리아와 레반트 지방으로 이집트의 영향권을 크게 넓힌 정복왕으로 불리었다.
나일강과 지중해 만나는 곳에 모여있던 이집트의 항구도시들은 당시 바다 민족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곤하였다. 특히나 당시 이집트는 상당히 부유한 국가였기에 나일강의 항구도시들은 언제나 바다 민족이 군침흘릴 지역이었던 것이다.
당시 람세스 2세는 셰르덴인이라는 바다 민족의 일파를 토벌하였는데, 단 한번의 기습작전으로 세르덴인을 소탕했다고 알려져있다. 이에 람세스 2세는 포로로 잡은 셰르덴 해적들 죽이지 않고 농지를 주어 개간하도록 하며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셰르덴인 중 실력이 좋은 인원을 골라 자신의 친위대를 만들게 하였다. 이들은 이제 애기할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카데시 전투' 당시까지도 람세스 2세를 호위했다고 알려진다.
이집트에 있어서 시리아 근방에 자리잡은 히타이트 정벌은 오랜 숙원이었다. 바다 민족을 정복하며 자신감이 찬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를 정복하기위해 원정을 준비한다. 총 4차례에 걸처 시리아 원정을 나서게되는데, 그의 아버지 세티 1세가 시리아의 카데시 지방까지 진출하였던 기억이 있던차 그는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다. 람세스 2세는 나일강 삼각주에 '피람세스'라는 새로운 수도를 짓고 원정의 기지로 활용하며 히트이트 정벌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보통 람세스 2세의 시리아 2차 원정이 '카데시 전투'로 알려져있다. 람세스 2세는 2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당시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가 다스리던 레반트 일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람세스 2세는 빠르게 카데시 요새까지 진입하였지만 그의 너무 빠른 재촉은 람세스 2세의 군대간 격차를 벌이게 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의 4개 부대 중 하나인 아몬 무대는 오론테스 강을 건너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라 부대는 오론테스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세트와 프타 부대는 아직 오론테스 강에 도착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때 강을 건너던 라 부대 앞에 히타이트 전차 부대가 나타났고 라 부대는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채 궤멸당하게된다. 4개 부대의 허리를 끊은 히타이트는 람세스 2세를 잡기위해 치열한 전투에 들어간다. 여기까지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기록이 일치한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마지막 기록은 전혀 다르다.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가 갑자기 신으로 변신해 히타이트 군대를 물리쳤다고 되어있으며, 히타이트 기록에 따르면 히타이는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고 람세스 2세는 겨우 도망쳤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위 두 문헌을 종합해보면 람세스 2세의 친위부대가 히타이트 진영에서 일부 히타이트 군대를 물리치고 빠져나왔을 것으로 추정을 한다. 이 전투가 바로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 '카데시 전투'이다.
카데시 전투는 보통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무승부이거나 혹은 이집트의 패배로 보는것이 타당성이있다. 왜냐하면 람세스 2세는 결국 군대를 물렸으며 이집트까지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가 세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양측이 동등한 관계에서 맺은 평화 조약 중 그 증거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협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차원정을 실패한 람세스 2세는 그 후 2차례에 걸쳐 시리아 원정을 다시 진행하게 되는데 그 결과 일부 히타이트에 빼았긴 우피 지방을 되찾고 이집트의 영향력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마지막 4차 원정에서 람세스 2세는 아무루 지방까지 북진하여 아푸르 인근에 작은 석상을 세우게된다. 4차 원정으로 람세스 2세는 가나안 지방과 튜니프, 카데시를 잇는 영토를 얻을 수 있게된다. 이 결과 람세스 2세는 이집트의 군사력을 주변국들에게 선보이며 이집트의 영향력을 알릴 수 있게된 계기가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히타이트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이는 결국 이집트와 히타이트간의 평화협정을 맺는 계기로 이루어진다.
기원전 1258년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마침내 평화협정을 맺게된다. 양측 모두의 기록에서 '상대가 청해서 우리가 관대하게 화평을 받아들였다'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 협정을 통해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고 람세스 2세의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조금 축소된 점을 생각하면 이집트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불리한 협정이 아니었나 추측이 된다.
이 조약문은 앞서 말했듯 세계 최초로 기록으로 남은 협정서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 '국제연합 본부'에 그 복제본이 전시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