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풍습을 얘기할때 빠지지않는 주제가 바로 화랑과 골품제이다. 신라의 적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이 골품제라면 화랑은 신라가 삼국의 주인이 될 수 있던 근본이 되었다. 이번 포스팅은 귀산과 추항의 질문에 '원광법사'가 답하고 그에의해 정립된 화랑의 가르침 '세속5계'와 화랑들의 이야기다. 15세 관창, 죽음으로 백제를 섬멸하다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전장인 황산벌에서 신라의 화랑 15세 관창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계백을 목을 베고자하였다. 계백은 관창이 어린것을 알고 풀어주기를 반복, 관창은 끊임없이 홀로 계백을 죽이기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계백은 이제 백제가 망하겠구나 여기고 관창의 목을 잘라 신라진영으로 보낸다. 관창의 죽음으로 분노한 신라의 군대는 결국 계백의 5천 결사대를 전멸시키고 백제..
위 토기는 경주 어느 왕릉에서 출토된 토기의 일부이다... 위 사진은 경주 황남동 적석목관분에서 출토되었는데, 30대 여성 귀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포개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의 성문화는 '여성상위'였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leekihwan.khan.kr 사진의 출처 신라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위 두 사진으로 신라의 성풍습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역사상 존재하는 국가중 여왕이 나라를 통치한 적은 신라말고는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천추태후가 권력을 잡은적은 있으나 결코 왕의 자리에 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