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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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토기는 경주 어느 왕릉에서 출토된 토기의 일부이다...

 

 

위 사진은 경주 황남동 적석목관분에서 출토되었는데, 30대 여성 귀족과 20대 남성의 인골이

포개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신라의 성문화는 '여성상위'였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leekihwan.khan.kr

사진의 출처

 

 

신라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위 두 사진으로 신라의 성풍습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역사상 존재하는 국가중 여왕이 나라를 통치한 적은 신라말고는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시대 천추태후가 권력을 잡은적은 있으나 결코 왕의 자리에 오르진 못하였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적은 클레오파트라 외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 왜 신라는 이렇게 개방적인 사회였을까... 개인적으로 신라는 신라, 가야의 토착세력과 흉노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점에 동의하는 편이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시절... 동이로 이동해온 일부 타 민족의 이동과, 신라의 마립간 시절인 4세기 전후 김씨가왕위를 단독으로 계승하여 왕권을 강화하던 시절로 바뀌면서.. 이후 김씨 왕족은 북방계 유물을 들여와 자신들의 세력을 굳건히 하였다. 우리가 흔히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김일제'가 바로 흉노 왕족출신의 북방민족이다.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설화는 설화로 차치하고서 본다면 이들이 김일제의 후손일거라고 생각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김수로왕은 또다른 민족인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자연스럽게(?) 왕비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것이라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다시 신라로 넘어와서... 이렇듯 신라는 북방이민족과 신라의 토착세력이 결합하는 시점에서 비로소 국가의 기틀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신라는 우리나라 토착세력의 정서와 북방이민족의 정서가 융합되어 있는 독특한 사회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유교사상이 전파된 때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않고, 대략 한자가 전래된 시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면 대략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중국은 당나라 시대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니 이때는 우리나라에 유교사상이 아직 퍼지기 전이다. 그리하여 신라에서는 여성이라할지라도 우리나라 역사가 성리학의 중심이 되는 고려 후기전까지는 상대적으로 더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였을것이라 추정된다. 고구려 역시 신라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데릴사위라는 초기의 개념이 고구려에서  비롯된 걸 보면 역시 여성의 인권이 고려후기, 조선에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여왕 중 상대적으로 비난을 받는 통일신라 당시의 진성여왕은 우선 배제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선덕여왕의 경우..  통상적으로 알려진 남편이 대략 3명정도이니..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조금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때 당시에는 당연시되던 문화일 수 있는것이다.. 물론 신라 특유의 골품제라는 제도로 인해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할 것이다...

성골이 선덕여왕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왕은 선덕에게 갈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도 물론 그 당시 김유신과 함께 절대적인 세력을 유지하긴 했어도 선덕, 진덕여왕 이후 더이상 성골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나마 성골에 가장 근접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라는 여성이 왕위에 오를정도로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이면서도, 골품제라는 특이한 제도로 인해 반대적으로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이기도 하였다. 골품제가 신라를 성장시킬 수 있던 원동력이기도 하면서 후에 신라의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듯이 신라에서는 '화랑'이라는 제도 전에 '원화'라는 제도를 두고 아릿따운 처녀를 임명해 이 원화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을 거느리게하고, 여기에서 발전된 제도가 '화랑'제도이다.. 현재 내가 인터넷 블로그라는 공통적이고 통상적인 플랫폼에 글을 쓰고 있기에 신라의 개방성에 대해서 최소한의 그때 당시의 성격을 토대로만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마복자'라는 풍습이 신라시대에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만큼 신라시대의 여성의 위치, 개방적 사회, 성생활은 현대의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신라의 이런 개방적인 사상과 성격들이 '골품제'라는 특유의 폐쇄성을 유지하면서도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일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 이후.. 우리나라의 권력은 예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단 한번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경상도가 권력의 정점이지 않을때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것에 대해 일부 비판하는 부분이 당나라 세력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했기에 온전히 삼국 전 영토를 우리가 차지할 수 없었다는 비판도 함께 있다.. 어느정도 타당한 비판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 당시 삼국의 세력 번성시기가 백제(4세기), 고구려(5세기), 신라(6세기)순으로 세력이 번성하던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의 마지막에 신라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

너무 두서없이 주절주절 끄적였다.. -_-;; 아직 초반이어서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시점으로 어느정도 양해를 부탁드리며.. 

다음 포스팅은 좀 더 정돈된 형태의 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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