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여행 [4.19 혁명 기념 도서관] 민주주의의 첫걸음을 기억하자
- 여행과 맛집/곰돌이의 여행
- 2023. 3. 22.
3월 18일 첫번째 지하철 여행... 4.19 혁명 기념 도서관으로...
난 여기.. 이 위치에 4.19 혁명 기념 도서관이 있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대문역에서 10초도 안걸리는 거리다...
그냥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돈의문 박물관으로 향하는데 왼쪽에 위치한 4.19 혁명 기념 도서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앞서... 1960년 4.19 혁명에서 시작되었을것이다.
[아래의 사진 및 내용중 사진만 본인이 도서관을 방문하여 찍은 자료이고 내용은 google 위키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본 포스팅에 올린 자료는 우선 google의 위키백과를 모두 참조하였다.
글로된 내용을 굳이 다 읽지 않고 사진으로만 보더라도 1960년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위해 많은 노력과 피와 땀을 흘린 우리 윗 선배세대들에게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하고자합니다...
그냥 사진만으로도 느껴지는 그 당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선배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서울미래유산은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시작한 사업으로 서울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가치가 있는 자산을 발굴하여 보전하는 프로젝트다. 선정 대상은 서울을 대표하는 유산 중 국가ㆍ서울시 지정ㆍ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유ㆍ무형 자산을 대상으로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서관 건물 부지는 예전 이기붕 부통령의 자택이 있던 곳이다.
4.19 혁명 당시 이기붕 부통령과 그 일가족은 그의 아들 이강석의 총에 사살됐다. 이강석의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다.
2·28 대구 학생의거(二二八大邱學生義擧)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대구시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로, 2·28 의거는 이후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은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부정 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사사오입으로 알고있는 사건이 바로 3.15 부정선거이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
4·19 혁명(四一九革命) 또는 4월 혁명(四月革命)은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된 반독재투쟁이자 혁명을 말한다. 부정 선거 당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을 저질렀다.
3·15 마산 의거에 참여한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며 격화되었다.[4]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귀교 중 피습을 당하기도 했으며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보선에 의해 지명된 장면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부정 선거 책임자와 그 과정에서 부정 축재를 한 사람들을 처벌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민주당 내의 구파와 신파 분열이 일어났고 구정치인의 활동 금지와 부패한 공직자 처벌을 명분으로 곧 군사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데모가 4·19로 절정에 이른 뒤, 1960년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 대표들이 모여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사건.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4백여 교수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25교수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흑백사진이어서 그 날의 기록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기분이다.
집에 돌아온 후... 사진을 정리하면서도.... google의 힘을 빌렸지만 관련 내용을 적으면서도.....참..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