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편 중국에 이어 이번 포스팅은 대~~~ 충 알아보는 일본의 역사다.
구석기시대
일본에는 약 4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약 2만 년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이 되어있어서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지던 일본 열도는 약 1만 년 전 대량의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대한해협과 쓰가루 해협등 일본을 둘러싼 해협들이 형성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에서 분리되었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의 일본은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시기에 인류가 일본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본은 섬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약 12만 년 전 구석시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물이나 화석 등이 많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은 판경계 특성상 지각 변동이 심하고 산성 화성암 토양이기 때문에 유골이 남기 어려운 점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유물이 조금씩 발견되기도 하는데, 1946년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면서 일본에서의 구석기 문화도 알려지게 된다.
조몬 시대(신석기시대)
실질적인 일본문화의 시작은 기원전 1만여 년 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의 신석기 문화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당시의 문화를 '조문 문화'라고 부른다. 당시 몽골계, 중국계와 시베리아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아이누족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지금의 일본인의 조상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이동해 온 사람들을 도래인이라 하였다.
아요이 시대
도래인은 기원전 3세기부터 일본 열도 각지에서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중국을 비롯한 대륙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달하였다. 기원전 3세기면 한반도 역시 고구려가 건국되고 한반도 이남은 마한과 진한, 변한의 부족국가들이 있을 당시다. 이 당시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하는데 일본은 이때 이후 계급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조몬 시대 이후 일본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는 기원전 400년 전후 한반도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인 야요이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한다. 벼농사 또한 이 시기에 일본으로 전파되었으며 1세기 전후로 일본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일본은 홋카이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3세경부터 본격적인 농경 생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원시 수렵 채집 생활을 반복하던 기존의 조몬인들과 달리 야요이인들은 한 단계 발전된 문명인 농경문화를 비롯해 금속 제련 기술들을 일본에 전파하였고, 이들로 인해 일본은 단기간에 매우 급속도로 빠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참고로 당시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이 현대 일본인의 혈통의 87 ~ 97%를 차지한다고 한다.
고훈 시대
3세기 후반 일본은 기타큐슈와 혼슈 서부를 비롯하여 남부를 중심으로 부족형태의 소국들이 세워지게 되고, 4세기경에 지금의 나라현에 그나마 자그마한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갖춘 정치체제가 나타난다. 이들은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으로 일본의 문명시작 이후 거의 처음 역사서에 등장하는 권력이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고훈 시대'라고 부른다.
이후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 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한자를 수입하여 고분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4세기말무럼 잠시 줄어들었던 도래인들의 유입이 급증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한반도의 고구려가 4세기말부터 남진 정책으로 백제와 가야를 공격하면서 이들이 일본 열도로 피난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의 일본 왕실은 가야왕족의 후손들로 백제를 비롯하여 피난 오는 도래인 기술자들로부터 대륙의 문화 및 기술들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할 수 있도록 제반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일본 앙실은 도래인들에게 여러 특혜를 주며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도래인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의 지리적 위치상 그들의 문명이 발달하는 데에는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에서 이동한 자들에 의해 전파된 농경 기술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화들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단지 우리(한반도) 입장에서 일본에 비해 비교우 위에 섰다고 주장하는 것은 좀.. 틀린 주장이다.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권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황하에서 시작된 문명에서 비롯되었고, 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이동하는 민족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다.
아스카 시대
6세기 이후 일본에도 한반도를 통해서 불교가 전래되고 이를 바탕으로 7세기 전반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를 '아스카 시대'라고 하는데 특히 도래인 계열 중 대표적인 씨족인 (1) 소가씨는 불교를 앞세워 경쟁 씨족인 모노노베씨 등을 제압하고 일본 왕실과 인척으로 관계를 맺고 약 5대에 걸쳐 (2)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일본 주류의 실질적인 정치권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1) 소가씨는 고겐 덴노의 증손자로 알려진 다케우치노 스쿠네가 소가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백제에서 가져온 불상을 숭배하였는데 이로 인해 일본 신토파인 모노노베와 대립하게 된다
(2) 일본왕실(천황)은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이는 근대 이전의 일본인들의 신토 핵심 교리이다. 이들은 실권은 없지만 각 정권마다 역성혁명 또한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는 신을 참칭 하는 불경한 짓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략 2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일본 신화의 초대 천황으로 알려진 진무 덴노이래 약 2,700년간,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은 스진 덴노 이후 약 2,100년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창기 천황들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불투명하기에 약간은 과장된 주장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6세기초 게이타이 덴노가 천황에 즉위한 뒤 이가 지속된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뒤의 주장을 맞다고 해도 약 1,500년을 지속된 혈통이기 때문에 전 세계 어떤 왕조 국가들보다 오래된 왕조임은 분명해 보인다. 6세기 전후 백제의 무왕 후손들이 일본 천황가와 혈연관계에 있다고 하는 건 또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아스카 시대 이후 천황을 정치적, 종교적 중심으로 중앙집권의 율령국가가 형성된다. 이러한 '다이호 율령'은 중간 중간 몇 번의 수정과정을 거치며 10세기 전후까지 일본에서는 최고 법전으로 인정받는다. 이때까지를 통상적으로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시기상으로 약 7세기에서 9세기 후반이다.
헤이안 시대
나라 시대 후기 일본 문화는 대부분이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절대적이었다.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율령국가로 변모하였고, 여기에서 섭관정치와 '인세이'라는 독특한 정치형태가 나타난다. 인세이란 천황이 황태자에게 양위를 한 뒤 상황으로서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당시 일본 왕실의 정책에 참여했던 (3) 후지와라 씨는 9세기에 이르러 예전 소가씨처럼 황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전 간무 천황과 사가 천황은 귀족들의 권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한 적이 있으나, 사가 천황 사후 후지와라 씨는 몬토쿠 천황 사망 후 외손자는 세이와 천황을 즉위시키고 섭정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후에도 '관백'이라는 최고 직급으로 천황이 어릴 때는 섭정으로, 성인이 되면 관백직으로갈아타며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를 섭관정치라고 하는데 이는 11세기 후반 시라카와 천황의 인세이가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다.
(3) 후지와라 씨는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와와 함께 일본의 4대 성씨로 불리우는 가문이다. 이들 가문은 668년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던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의 자리를 대신해 나라 시대때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헤이안 시대시는 섭정정치를 할정도로 최대 전성기를 누린다. 또한 후지와라씨는 일본의 4대 성가운데 사성을 받은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이다.
가마쿠라 막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방 주민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할 정도의 체제는 갖추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지방은 그들 스스로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때를 즈음해서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무사들이 성장하게 되고 그들은 귀족들과 결탁하여 일본 왕실과 서로 권력 대결을 벌이게 된다. 이때 일본 왕실과 귀족은 각각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 씨를 통해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일으키는 내란이 발생한다. 두 차례의 난으로 미나모토 씨는 거의 절멸당하고 다이라 씨의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권력을 잡게 된다. 하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남은 다리아 씨도 미나모토 씨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서 궤멸된다.
디나모토노 요리토모는(4) 막부 체제를 만들어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으나 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며 대가 끊기면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창시한 가마쿠라 막부는 호조씨의 싯켄 정치를 동해 명맥이 이어진다. 12세기 일본은 겐페이 전쟁을 거치며 무사들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천황과는 별도로 쇼군이 통치하는 막부가 세워지게 되고, 쇼군이 사실상의 실권을 잡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가마쿠라 막부'가 약 150년간 일본을 다스리게 된다.
하지만 호조씨의 싯켄 정치 체제 역시 당시 대륙의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의 일본 정벌을 막아내면서 세력을 굳건히 하였으나 논공행상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함께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지만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에 불만이 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기존 고다이고 천황을 몰아내고 반대판인 고묘 천황을 내세워 고다이고 천황의 요시노 정부와 대립하게 된다. 이때를 일본의 남북조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1392년 10월 남조의 천황이 북조의 천황에 양위하는 형식으로 흡수되기까지 57년간 지속된다.
이에 앞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하사 받고 14세기 중엽 교토 교외의 무로바치에 쇼군의 저택을 짓고 '무로마치 막부'가 시작된다.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된 이후에도 일본은 약 600여 년 동안 사무라이들이 실권을 장악하며 계속적으로 막부정치를 이어가는데 이 당시의 쇼군과 천황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이러한 사무라이들의 실권장악은 19세기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지게 된다.
(4) 막부 정치 - 원래 막부란 사령부를 뜻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표현법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사령관이 천막을 치고 진을 편 데서 유해하였지만 현재는 중국과 일본의 무신정권을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무로마치 막부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킨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과의 국교를 회복시키면서 무로마치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이 당시 구케와 부케의 문화가 융합을 이루며 동산문화가 번성하지만 아시카가 요시미쓰 사망 후 다이묘들이 차기 쇼군 계승 후보들이 앞세워 권력 투쟁에 들어가면서 막부 체제는 흔들리게 된다. 1467년 '오닌의 난'이 발생하고 일본 전역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난립하며 전국시대로 돌입하는데 바로 '센고쿠 시대'의 시작이다.
무로마치 막부시대인 중세의 일본은 경제분야에서 매우 높은 발전을 이루는데 이는 견당사를 통해 유입된 모내기법인 이모작이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우경이 시작되며 상업이 발달하는 등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데 매우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편이었다.
센고쿠 시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아스의 승리
'오닌의 난'이후 기존 각 지방의 유력자였던 슈고 다이묘들이 새롭게 부상한 센고쿠 다이묘들에게 압도당하며, 고대 귀족들은 몰락하고 막부의 권력은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즈음한 16세기 중엽 기독교와 총이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지게 되고, 총은 센고쿠 다이묘의 전술과 축성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 등장하여 16세기 후반에 세력을 키운 집단이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히데, 모리 모토나리등이다. 이들 새로운 세력은 치열한 경쟁 끝에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인 (5-1)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가신 (5-2)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흩어졌던 일본의 전국시대는 통일되고 센고쿠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특히 전국시대 중에 등장한 쇼군들 중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시기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토의 호조씨를 패망시키며 일본 열도를 통일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대파 다이묘들의 불만을 억제시키고, 명나라와 인도를 정벌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1592년 조선으로 16만여의 군대를 진출시킨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일본은 빠른 진격으로 평양성까지 진격하지만 그 후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이순신, 권율 같은 명장들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 등이 겹치며 위기에 몰리게 된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일본은 다시 열도로 철수하게 되며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일본 침략은 막을 내리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시다 미스나리의 문관계층과 가토 기요마사의 지방 무장들이 서군과 동군으로 나뉘어 권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600년 이들은 미노의 세키가하라에서 마주하였고 이 전쟁에서 결국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승리하게 된다. 이 전쟁이 바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서군의 다이묘들을 처단함과 동시에 통일국가를 재건하며 1603년 쇼군에 올라 '에도 막부'를 개창한다. 오다 노부나가 이후 계속된 일본의 패권이 마지막 도쿠가와 이에아스에게 넘어가게 되고,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거함으로 도쿠가와 씨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이 시기는 한반도의 조선이 건국된 후의 시기와 맞물리는데 일본 역사에서도 이때 전국시대를 통일한 직후와 이후 에도 시대 이후의 풍습과 문화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고 아직까지 상당히 많은 관습적 영향을 받고 있다. '무사도'문화의 기원이 바로 이 시대이며 일본인들이 말하는 '혼네'와 '다테마'문화를 말하는 사회적 규범과 암묵적인 규율 역시 이 시기에 고착되어 갔다고 평가된다.
특히나 전국시대인 1543년 포트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일본은 서양과 교역을 시작하게 되고 이때부터 일본은 조총을 비롯하여 서양의 신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일본은 당시 포르투갈의 철포라 불리는 조총을 도입하였는데, 이후 분석과 개량을 통해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체계까지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에도 막부
(5-3) 도쿠가와 이에아스에 의해 개창된 에도 막부는 1603년에 시작되어 1868년까지 약 260년간 지속된다. 당시에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고정되고 기독교 전파가 금지되는 쇄국정책을 실행했으며, 오히려 조선의 유교문화를 다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교화에 이용하여 전국을 지배하였다. 이때 교통과 상공업이 발전하며 화폐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다수의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특히나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문화를 번성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아스와 도쿠가와 시데타다가 안정시킨 에도 막부는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이르어 유교 사상을 좀 더 연구하여 일본의 실생활에 맞도록 발전시킸으며,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대일본사'라는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치를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 쇼군들의 치적은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에 이르러 에도 막부는 겐로쿠 호황이라고 부르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전성기는 짧게 막을 내리게 되고 막부 체제의 모순들을 하나 둘 표출되기 시작한다. 8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무네는 기존 이에야스 시대의 정치 제도를 바탕으로 교호 개혁을 단행하고,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다누마 가문의 사라가 번 초대 당주인 다누마 오키쓰구와 함께 재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당시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로 실패하게 된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국을 비롯한 외세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일본에게도 문호 개방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당시의 존왕양이 운동과 막부 타도 운동이 격해서지면 에도막부는 260년에 걸친 막부 정치가 막을 내리고 일본도 근대화에 들어서는 메이지 유신을 맞게 된다.
5.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이 세명은 일본 전국시대의 3 영웅으로 불리는 자들로 일본을 최초로 통일시키고 근대화 이전까지 일본을 지배한 막부 정치의 정점에 있던 자들이다. 위 세 사람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바로 두견새에 관한 이야기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바라보는 세 명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인데,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죽여버린다고 두견새를 협박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견새가 울도록 꼬드긴다. 마지막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이들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센류라는 에도 시대에 적힌 일본의 정형화된 시의 구절을 해석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여기에 빗대어있지 않나 생각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다 노부나가의 성격을 빗대어 나머지 둘의 성격도 묘사한 것이지만 묘하게 현대의 인간성에 비추어 설명해도 가능할법한 꽤나 괜찮은 비유다
메이지 유신
1868년 에도 막부로부터 실질적인 천황의 권리를 갖게 된 메이지 천황은 에도 막부가 위치한 에도를 도쿄로 바꾸고 이듬해에 교토의 고쇼에서 도쿄의 고쿄로 천도한다. 이후 모든 체제를 중앙집권제로 강화하며 정부는 부국강병책으로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하고, 군대와 경찰을 비롯하여 전신, 철도, 공장 등 관영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신분제를 철폐하며 왕족과 다이묘, 사무라이 계층은 모두 귀족층으로 통일시킨다. 그리고 사농공상순의 신분층은 헤이민이라 불리는 평민층으로 통일시키고, 1877년 서남전쟁을 계기로 남아있던 불평 사족들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제국주의
당시의 세계사 흐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를 이룬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스페인, 미국등은 자국 내의 수요로 모두 해결하지 못하는 공산품들을 팔고 새로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대향해의 시대가 시작된다. 영국의 인도 침략을 시작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등 세계는 제국주의를 표방한 세계열강들로부터 아시아권 국가들은 식민지로 전략하고 만다. 일본의 경우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빨리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체제와 군사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의 문호를 강제 개방시키게 된다. 그리고 청. 일전쟁의 승리고 타이완섬과 관동주를 얻게 되고, 러. 일 전쟁의 승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은 '경술국치'로 강제적으로 일본에 합병되게 된다.
일본을 이해하다 - 메이와쿠, 매뉴얼, 보수성, 신분제
일본문화의 특징은 다양성에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서로 공생하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본에 보편적인 종교와 가치관이 제대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보편적 가치가 결여된 현실주의적 사회성이 일본인들의 생활양식을 규정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또한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그 다양성이 많기로도 유명한 문화 강국이기도 하다. 이는 동아시아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자국 내 문화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전통과 외래의 문화가 묘하게 섞이며 일본만의 독특한 현대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 문화는 그들만의 '메이와쿠'라고 부르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메이와쿠는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민폐 그 자체를 뜻하는 단어이다. 일본인들은 극도로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꺼리는데, 이러한 문화는 개인이 알아서 규칙을 지키고 이행하기 때문에 사회가 매우 안정적이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먼저 나서지 않는 일본인들의 성향상 사회적 갈등이 제때에 해소되지 못하다가 사회의 제도적 압력으로 인해 개성의 표출이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다.
이런 일본인들의 메이와쿠적 성향은 기본적으로 매뉴얼로 모든 사회질서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결정된다.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기존에 정해진 질서와 법규를 따르게 되고, 이러한 사회는 기본적으로 보수성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의 신분제는 법적으로 철폐되긴 하였으나 부라쿠민이라 불리는 가장 하위계층에 대한 차별의식등은 여전히 존재하기도 한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