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22. (번외편) 대충 알아보는 중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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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국제연합)에는 현재 193개국이 등록되어있다. 국제 표준화기구(ISO)에 등록된 국가는 249개국이고, 국제축구연맹(FIFA)에 등록된 국가는 211개국이다.  2023년 8월 6일 US News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The world's most powerfull countries)에 2위에 중국, 6위에 한국, 8위에 일본을 선정하였다. 우리나라는 200개에 달하는 국가중 위아래로 2위 강대국과 8위 강대국사이에서 2,000여년을 버텨온것이다. 이번 포스팅은 대~~~충 알아보는 중국의 역사다.

 

 

 

구석기 시대 호모 에렉투스의 이동, 180만년전 ~ 130만년전

 

 

호모 에렉투스는 멸종한 인류의 한 종으로 '직립한 사람'임을 뜻한다. 호모 에렉투스가 중요한 이유는 다리가 길어지고 직립할 수 있으며 장거리 이동한 가능한 종이었기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현생 인류가 시작되었다면 그들의 이동운 아마도 호모 에렉투스 시기부터였을것이다. 또한 호모 에렉투스는 '불'을 처음으로 사용한 종이었다. 그들은 인류의 직계조상이라고 할 순 없지만 호모 사피엔스, 네안 데르탈인과 공존하기도 하였다. 예전 글에서 밝혔듯이 이들의 종족전쟁에서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을것이다.

 

중국의 구석기 시대는 이처럼 호모 에렉투스가 유라시아로 이동하는 시점인 180만여년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호모 에렉투스의 진화과정이나 아프리카 기원설, 다지역 기원설 등이 모두 존재하지만 발견된 유물을 기준으로 봐도 대략 100만년 전후로 중국 윈난성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중국의 신석기 문화 기원전 7,500년경

 

 

중국의 장 강 유역인 후난성 북서부에 위치한 곳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신석기 시대의 초기 문화로 알려져있고, 이를 핑터우산 문화라고 한다. 이때 색문토기를 비롯하여 쌀과 왕겨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당시부터 제사를 지낸 흔적이 발견되었다.

 

중국의 마지막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2100년경으로 이때 중국 최초의 왕조가 불리는 하나라가 기원전 2070년경에 건국된다.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의 중왕국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고대 아시리아 제국도 이 시기에 건국된다.

 

 

중국 문명의 시작 청동기 시대 삼황오제의 등장

 

 

보통 중국 문명의 시작으로 알려진 하나라를 비롯해 신화로 전해저오는 상나라의 경우 현대에 들어 그 유적이 발굴된 이후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보통 중국의 역대 왕들을 '황제'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들을 일컫는것이다. 복희씨와 신농씨, 여와씨가 삼황, 헌원과 전욱고양, 제국고신, 제요방훈, 제순중화를 오제라 칭하는데 이들 삼황과 오제를 통틀어 '황제'라 하였다. 이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관련된 내용은 희한하게도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 앞부분에도 등장한다.. ㅎㅎㅎ

 

상나를 무너뜨리고 기원전 1,000년경 상의 제후국이던 주나가가 중국의 패권을 잡게된다. 이때 주나라의 왕을 처음으로 '천자'라고 불렀다. 이후 기원전 700년경까지 지속된 주나라는 점점 국력이 약해지고 이후 중국은 '춘추 전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우리가 흔히 '춘추오패'라고 부르는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 월나라 구천이 바로 그들로서 아마 이 당시부터 한자가 상용화되지 않았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사자성어들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ㅎㅎㅎ

 

 

기원전 221년 진나라 시황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다

 

 

춘추 전국시대의 하나의 제후국이었던 진나라는 기원전 4세기 법가에 따른 개혁정책으로 급속도로 국가가 발전하게된다. 기원전 900년경에 건국된 진나라는 그렇게 법가주이 사상으로 기원전 221년 춘추 전국 시대를 마무리하며,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토지 지주제를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국민들을 관리하였다. 당시 시황제는 이민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만리장성을 축소하고 아방궁, 진시황릉, 병마용갱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진행하며 국력을 과시하지만 이러한 국력낭비는 오히려 진나라의 국력을 쇠퇘시키고 만다. 또한 당시 정부는 정부에 반발하는 학자들을 압살하며 분서갱유와 같은 학문적 탄압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시황제 사후 그의 아들인 호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직후 환관 조고에 의해 국정은 더욱 문란해진다. 이때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게되고 진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자영에 이르러, 초패왕 항우에게 항복하며 멸망하게 된다. 진나라의 중국 통치기간은 불과 15년 만에 막을 내리게된다.

 

 

초한지, 항우와 유방의 대결 패왕별희

 

 

진나라가 초나라 항우에 의해 멸망한후 중국은 다시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가장 강력한 제후국은 초나라로 항우는 초나라의 왕족출신으로 역발산기개세라고 할만큼 당시 최고의 무장이었다. 그에 대적하는 한나라 유방은 지방의 떠돌이 출신이지만 사람을 끌어모으는 묘한 매력이있어 그의 곁으로 재정을 총괄하는 소하를 비롯하여 한신, 번쾌등 항우에 필적할만한 무장들이 모이게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나라 유방을 통해 중국을 다시 통일시킨 참모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장량이다. 이 둘은 중국은 중국의 통일을 두고 계속적으로 부칮치고 전쟁하기를 반복하다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유방이 승리하게된다. 항우는 일생을 통틀어 한번의 패배가 바로 자신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전투'였고, 그는 해하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탈출하지만 스스로 자결하며 '초한지'의 승자는 한나라 유방으로 결정나게된다. 그 직전 항우가 아끼던 그의 연인 우미도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그들의 이야기는 중국 최대의 경극으로 알려진 '패왕별희'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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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족의 시작 한나라

 

 

초한전의 승리로 최종 승자가 된 한나라 유방은 진나라 시황제에 이어 두번째로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유방은 당시 중국 최초의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런 평민출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건 중국 역사상 1,500년 후 명을 건국한 주원장밖에 없다.

 

이후 한나라는 각지방의 반란군을 평정하고 황족이 아닌자들인 왕족들에 포함된 이성왕들을 모두 숙청하며 한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나 한족이라 불리는 오늘날까지 중국의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낸 왕조의 창시자라는 부분에서 중국역사에서는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보통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왕망에 의해 세워진 '신'나라에 의해 잠시 명맥이 끊겼기때문이다. 그래서 기원전 202년에서 8년을 전한, 25년에서 220년을 후한이라 구분한다.

 

 

이민족과 한족의 대결, 위진남북조 시대

 

 

184년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면서 후한의 국력도 급속도로 무너지며 중국은 다시 한족과 이민족이 세운 국가들이 난립하게 된다. 중국의 통일왕조들 사이의 위진남북조 시대는 가장 오랜 기간 중국의 분열기로 남아있다. 원래 한나라는 유교중심의 사회를 표방하였으나,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고 다시 한의 유수가 후한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교 사회의 문제점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중국은 유교를 비롯한 불교와 인도의 간다라 미술도 전파되는데, 이때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와 왜에도 중국의 문화들이 전파되며 동아시아의 문화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를 즈음해서 4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는 백제, 고구려, 신라순으로 전성기를 누리는데, 이유는 상대적으로 중국의 오랜 분열과 중국의 유민들이 한반도를 비롯하여 왜에까지 유입되면서 해당국가들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중국 역사 중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인데, 이유는 바로 소설 '삼국지'로 알려진 무대가 황건적의 난을 기점으로 위, 촉, 오 세 나라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이기때문이다. 우리는 삼국지의 기간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을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 약 40년정도의 기간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제갈공명이 181년에 태어나 234년에 사망한것을 미루어 짐작하면된다.

 

 

수나라 세번째로 중국을 통일시키다

 

 

후한의 멸망후 약 400년간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가 난립하면서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를 겪게된다. 물론 그로인해 한족의 유교문화와 더불어 다른 문화들이 섞이고 전파되며 동아시아 전체로 전파되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중국 내부는 계속 분열상태로 지속되었다.

 

양충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위가 서위와 동위로 분열될때 우문태와 함께 서위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우게된다. 그리고 북주가 건국된 후 수국공의 작위를 받게된다. 양충이 죽은후 아들인 양견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데 양견은 떄를 기다리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북주의 무제는 정복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사망하고 뒤를 이은 선제는 기행적인 행동으로 8개월만에 스스로 천원황제라 칭하며 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게된다. 이 과정에서 양견은 혼란한 국정속에서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하게되고, 양견은 자신에 대한 반란을 차례대로 제압하며 자신의 권력을 더욱 확고히 하게된다. 북주에서 권력을 장악한 양견은 기존 수국공의 자리에서 수왕의 자리에 오른뒤, 다음해 정제로부터 선위를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게된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내부는 돌궐족의 힘이 막강하여 양견은 자신의 딸을 돌궐에 공녀로 보내면서 돌궐의 비위를 맞추기도 하였다. 양견은 돌궐에 공녀와 조공을 보내면서도 차근차근 수나라의 국력을 키워 50만의 군대를 양셩하게된다. 이윽고 양견은 자신의 차남인 양광을 총사령관으로하여 중국통일에 나선다. 결국 589년 마지막으로 남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184년 황건적의 난 이후 약 400년간 지속된 분열의 중국시대를 마무리짓게된다.

 

604년 황제에 오른 양제(양광)는 다시 중국을 통일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황제 즉위이후는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나라의 재정이 파탄나고만다. 특히 대운하 건설과 3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게되면서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도로 기울게된다.

 

 

당나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 교역의 중심이 되다

 

 

이연은 수나라 시절 당국공의 직위에 있었다. 당국공이란 직위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북주시대 이후 8주국중 하나인 가문으로 수나라 시절에도 이연의 위치와 권력은 어마어마하였다. 수나라 말기 당시 이러한 노래가 시중에 떠돌았다고한다. '열길 깊은 물이 버드나무를 삼킨다네, 버드나무를 삼킨다네'  이를 의역하면 수나라를 깊은 물이 삼킨다는 의미로, 버드나무는 수나라를 깊은 물은 바로 이연을 칭하는 뜻이었다. 당시 돌궐족이 기승을 부려 수 양제는 이를 빌미삼아 관련지역 태수인 이연을 불러 상황을 듣고자하였다. 하지만 이는 빌미일뿐 문제는 이연을 불러다 죽일 생각이었던것이다. 당시 이연의 아들인 이세민이 이러한 수 문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연에게 차라리 민심을 이용해 수나라를 멸망시키자고 주장한다. 당시 수나라를 무리한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재정은 바닥나고 민심은 등을 돌린 상태였다. 이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세민의 주장대로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반역을 계획하게된다. 하지만 반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민심은 벌써 수나라에 등을 돌린지 오래이고 오히려 이연을 뒤따르게된다. 그러면서 수 양제가 근위병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게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게되고, 이렇게 수나라는 3대 38년으로 막을 내리게된다. 이후 이연은 이세민의 활약으로 멸망한 수나라에 이어 다시 중국왕조를 집권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당'나라이다. 

 

 

당시 당나라는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면서 동시에 대외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한 국가이다. 다른 역대 중국왕조들과 달리 이민족의 문화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면서 다민족적이며 국제적인 요소가 매우 짙은 중국 왕조로 평가받는다. 당나라는 당시 위구르와 토번(티베트), 베트남까지 교류를 하며 아시아 교역의 중심부로 활약하였다. 특히나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연합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시키게된다. 당 태종(이세민)은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원정을 떠나지만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을 중심으로한 고구려군에 패한 후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고 전한다. 당시 이세민은 퇴각때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이 맞았다고 되어있으나 정말.. 사실일까???? 신궁이네..그려.. ㅎㅎㅎ 하지만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고구려 내부적으로 연개소문 사망 뒤 그의 아들 3형제로 인해 고구려는 혼란기로 접어들며 결국 신라에게 멸망하며 한반도는 통일신라와 후의 발해, 이렇게 남북국 시대를 열게된다.

 

 

중국 문화의 황금기를 연 송나라

 

 

당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중국은 다시 오대십국으로 분열되고 조광윤은 960년 당시 후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개봉에 도음을 정하고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송나라를 한족의 계통을 이은 중국의 통일왕조였으나 당시 요나라와 서하, 북쪽에 위치한 금나라등과 침략전쟁으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된다.

 

송나라는 이와는 별개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문화를 꽃피우는데 당시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하여 사용하였고, 또한 상비 해군역시 세계 최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화약을 크게 발달시켰으며 나침반등을 사용하는등 과학기술분야에서 다른 왕조와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송나라는 300여년간 문화를 꽃피우며 지속되지만 1230년경 일어선 몽골족의 힘이 팽창해지면서 급속도로 국력이 약해진다. 당시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표방한 국가였기때문에 상대적으로 군권은 취약할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당시 송나라가 중국을 통치한건 맞으나 주변국들의 계속된 약탈과 침략으로인해 불안정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최강의 기마대로 세계를 재패한 원나라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했던 시기는 두차례로 그 첫번째가 바로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중국 대륙을 통치한 몽골 제국이다. 몽골의 작은 부족출신이던 테무진은 근방의 다른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며 최초로 몽골을 통일하게된다. 몽골을 통일한 테무진은 정복전쟁을 시작하며 서하와 금, 요나라등을 정복해가기 시작한다. 특히 서하는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던 왕국으로 그들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몽골은 13세기 초반인 1220년경 유럽 원정길에 오른다. 약 20여년간에 걸쳐 진행된 몽골의 유럽 원정은 동유럽에서 볼가강 불가리아를 비롯하여 쿠마니아, 알라니야, 키예프 루스국등을 모두 정벌한다. 또한 중앙 유럽에서 분할된 폴란드의 공국들을 비롯해 헝가리 왕국, 조지아 왕국,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라틴제국으로까지 정복전쟁을 벌이게된다. 이렇게 정복한 동유럽의 수많은 영토는 후에 킵차크 칸국에 합병되게 된다. 

 

 

참조 - 위키백과

 

 

이후 유럽의 왕국들이 연합하여 몽골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13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몽골은 유럽에서 완전히 철수하게된다. 몽골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로 지칭되는 이유중 첫번째는 바로 그들의 기마병이다. 몽골지역자체가 내륙의 초원지대이기때문에 농업보다는 축산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넒은 초원을 이동하기위한 필수 수단인 말을 타는법을 몽골인들은 어릴적부터 배우기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의 기마병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다.

 

몽골은 아시아를 넘어 유럽원정에까지 오르며 정복전쟁을 벌였지만 그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첫번째 이유는 바로 언어와 교육으로 몽골인들은 대부분 무지에 가까웠을정도로 문맹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에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역시 정상적으로 동작할 수 없었다. 

 

 

 

중국대륙 마지막 한족의 중국 제패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송나라가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후 중국은 몽골의 지배기를 거치며 한족의 암흑기에 접어들게된다. 원나라 말기 중국은 홍건족의 난등으로 인해 민생은 피폐해져갔다. 주원장은 처음에는 홍건족과 백련교 등에 몸담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전국 각지의 한족 토벌군들과 합세하여 원나라를 몽골고원으로 쫒아내며 명나라를 건국한다. 홍무제 주원장은 이후 난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대규모 숙청작업을 통해 공신들을 제거하며 나라의 기틀을 잡게된다.

 

홍무제는 아들이 일찍 죽는바람에 손자인 주윤문에게 황위를 계승하려고하였다. 당시 홍무제는 아들들에게 약간의 병사를 내어주고 번왕으로 임명한뒤 지방 제후로서의 역할을 맡겼다. 홍무제 사후 2대 황제에 즉위한 건문제 주윤문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이 삼촌들을 숙청하고 황권을 강화하고자하였다. 하지만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자 가장 강력한 군대를 소유한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키며 건문제를 죽이고 스스로 3대 황제에 등극하는데, 이가 바로 영락제이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통해 주변국들과 중국의 남해안을 따라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고, 당시 명나라와 대척점에 있던 티무르를 경계하기도하였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정화의 대원정'이 바로 이것이다.

 

 

출처 - 나무위키

 

 

명나라는 1368년 건국되었는데 이 시기의 한반도는 고려말 조선초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당시 고려의 권력 중심에 있던 이들은 친원세력의 권문세족들로 새롭게 부상한 신진사대부들은 친명세력들이었다. 이후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고 조선과 명나라는 사대주의에 의한 군신관계를 맺게된다.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를 건설한 누르하치의 청나라, 그리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청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여진족 출신으로 원래 중국 역사에서 여진이 건국한 금이라는 나라가 존재했다. 이에 누르하치는 후금이라 이름짓고 여진족을 통합하여 다시 국가를 건설하게된다. 우리는 보통 만주족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바로 청을 건국한 여진족의 후예들이다.

 

청나라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후 주변국들과의 정복전쟁을 벌이는데, 당시 한반도의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무시하였다. 청나라는 조선이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그들에게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청과 형제의 관계만을 맺을뿐 이에 응하지 않고 청과의 국교를 단절한다.

 

원래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서로를 적당히 견제하며 명나라와 사대관계에 있으나 후금과의 관계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또다시 후금이 침범한다면 또다시 전란에 휩싸이게되므로 광해군 입장에서 굳이 후금을 자극할 필요가없었다. 하지만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는 과정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게되고, 그와 반람에 가담한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치면서 정묘호란의 명분을 주게된다. 누르하치는 처음부터 명나라와 사대관계에 있는 조선을 정벌하여 자신들의 배후를 안정시키려하였지만 명분이 부족하였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1626년 1월 영원성 전투에서 패하며 사망하게되면서 조선에 대한 입장을 바꾸게된다. 

 

2대 황제에 오른 홍 타이지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광해군이 강제로 폐위된 것을 이유로 1627년 인조5년에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을 계기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게된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후 홍 타이지는 조선에 사신을 보냈으나 인조와 접견을 하지 못하게된다. 그리고 홍 타이지의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은 홍 타이지를 배례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홍 타이지는 조선의 친명정책이 바뀌지 않을것이라 확신하고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대비해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기로 결정한다. 1636년 12월 12만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한 홍 타이지는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줄것이라는 예상과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할 것을 대비해 최대한 빠른속도로 한양을 점령하게된다.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을 결정하였으나 이미 청나라의 군대가 그 길목을 차단해버려서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영화 '남산산성'에 그려지듯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홍 타이지 앞에 삼궤구고드례의 치욕을 당하게된다.

 

이렇게 1636년 건국된 후금은 이후 2대 황제인 홍 타이지시절에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키게되고, 이후 1912년까지 300여년동안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를 이루게된다.

 

청나라는 중국왕조를 통틀어 문화적으로 가장 번영한 국가이기도하다. 예전 송나라역시 문화적으로 번성하였으나 그들은 한족이 세운 나라로 상대적으로 이민족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긴하였지만 그 중심에는 한족 특유의 폐쇄성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경우 그들 스스로가 한족이 아닌 만주족 출신으로, 청나라는 한족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켰다.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사고전서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특히나 청나라는 스스로 중국대륙의 합법적인 계승자임을 강조하기위해 당시 명나라의 유교사상을 버리지 않고 더욱더 장려하는 방법을 펼치게된다. 그렇게 중국대륙를 지배한 청나라역시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근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영국과의 아편전쟁등으로 서양에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하면서 중국도 근대화를 이루게된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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