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세계사 27. 서양 문명의 시작(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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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철인 정치', '국가론'을 주장한 플라톤이다. 우리에게 플라톤은 '유토피아'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런 플라톤의 스승이 바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이다. 그리스의 철학과 문학, 과학, 수학 등 당시 모든 분야의 천재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인 플라톤,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다. 너무 길게 쓰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아서... 최대한 간단하게 쓰려고 노력하였다... -_-;;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에 있어서 첫번째로 알아야 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철학'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으며 그의 철학은 제자인 플라톤을 거쳐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서양 문명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한다. 특히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설명은 아직까지 논쟁거리로 남아있는데, 그의 생애와 철학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그의 제자들과 당대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직접 글로써 남긴 기록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의 수제자인 플라톤의 기록이 그나마 가장 중요한 자료인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였기 때문에 실제의 소크라테스를 조금 더 미화시킨 부분도 있다. 특히나 플라톤은 20대에 소크라테스가 71세의 나이로 '민주주의에 의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분노하게 된다. 플라톤이 민주주의가 아닌 철인정치를 주장하고 지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일반적인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직업을 세습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석공이자 조각가여서 소크라테스도 처음엔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과 기하학, 천문학등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전쟁에 3번이나 참여하기도 했고, 그는 그렇게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사회에서 부딪친 여러 가지 부조리한 문제점등을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변신하여 청년들에게 강연과 토론을 하며 지냈다. 

 

당시 아테네는 최후의 몰락기로 보수성과 귀족적인 정신, 그리고 진보성과 개인주의적 정신이 맞부딪치는 불안정한 시대였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소피스트'가 성행하던 시기이기도하다. 그는 수많은 강연과 토론을 통해 당시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철학적인 지혜와 정의등을 역설하며 많은 인파를 끌고 다니는 유명한 스피커였다. 하지만 당시 공포시대를 주장한  크리티아스 같은 인물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청년을 부패시킨다는 죄명으로 고소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기도 하며 플라톤과 친척관계였다. 크리티아스의 주장이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일 거라 생각한 배심원들이 그를 사형시켜 버린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그를 지지한 것도 젊은이들이었고, 그를 사형에 이르게 한 것도 젊은이들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자크루이 다비드, 1787년)

 

 

여기서 우리가 하나 잘못 알고있는 사실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약이 내려질 때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사약을 마신 후 사망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에우렐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약을 계속 뒤엎어서 난장을 부렸고, 결국 마지막에 간수들에 의해 억지로 사약을 먹고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자는 소크라테스를 조금 미화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유래는 아마도 그의 부인 크산티페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크산티페는 현재까지도 최고의 악처로 남아있는데 이것도 참... 정확한 실체는 없다. 부인인 크산티페가 악처였는지, 남편 소크라테스가 악부였는지... 조심스럽게 글쓴이는 소크라테스가 악부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그의 정신, 사고 방향성등을 감안했을 때 그는 그렇게 집안에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71세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그의 아들들이 어렸다고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늦게 결혼을 했든 재혼을 했든 두 가지 경우중 하나인데 보통 밖에서 유명한(?) 남자가 집안일까지 잘한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_-;; 물론 크산티페가 현모양처라는 증거도 없다. 내가 보기엔 크산티페는 그냥 평범한(?) 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뜬금없지만 내가 에디슨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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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경멸하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철인정치'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에머슨이란 시인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철인 정치, 이데아, 유토피아 등으로 알려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로 그가 배심원들에 의해 사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민주주의를 경멸하게 되었으며, 철인정치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기 스승이 당시 합법적이고 정의롭다고 생각한 민주주의에 의한 다수결로 사형이 확정되자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경멸하며 민주주의를 대체할 '철인정치'를 자신의 저서 '국가론'에서 펼치게 된다.

 

플라톤은 약 30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대부분의 책들에 등장하는 인물이 대화체인 희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두 '대화편'이라고 부른다. 그중 '국가 편'에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잘 나타나있다. 플라톤은 원래 '한 개인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질문에 몰두하였다. 플라톤은 각각의 개인을 우리 몸을 구성하는 일부로 상정하고, 그 개인이 모인 국가를 한 개인의 완성된 몸으로 비유하면서 올바른 국가의 모습을 상정하면 올바른 개인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로 '정체'를 완성해 나갔다. 참고로 플라톤이 말한 정의(justice)란 '올바름'이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금까지 사용하는 정의의 의미는 '분배에서의 정의(정의롭게 분배함)'라는 의미는 사용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주장한 것은 국가는 개인이 자기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잘하면 전체적인 통합체로서 올바르게 굴러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동양의 공자가 주장한 것과 일치하는 부분으로, 원시시대 각 개인이 따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보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을 국가 조직 내에서 충실히 하면 전체적으로 그 조직은 훌륭한 조직, 즉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형상'정도로 번역을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소피스트들과 논쟁을 하였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소피스트들의 주장과 행동들이 법정에서도 각자의 주장에 의해 불법이 되기도 합법이 되기도 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개념정의가 명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스승의 사상을 좀 더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기본적으로 용기나 절제, 정의와 같은 개념을 말하였다면, 플라톤은 본질적인 철학적 물음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데아는 이런 플라톤의 사상과 생각을 정리한 '개념정리'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왕이 되지 않는 한, 또 반대로 왕이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한, 정치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국가와 인류에 있어서 나쁜 것들이 종식되는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인정치'이다.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 정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는데, 한 나라의 정치를 이끌어 갈 능력이나 소양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참정권을 주는 민주주의 정치 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론에서 이성, 기개, 정욕의 영혼 3 분설을 기초로 이것을 국가에 대입하였다. 이성에 해당하는 것이 통치자, 기개에 해당하는것이 수호자, 정욕에 해당하는것이 생산자인 것이다.

 

 

서양 문명의 시작인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배운 사상을 알렉산더에게 전달하다

 

 

아리스토텔레스(사진 출처 - https://namu.wiki/w/%EC%95%84%EB%A6%AC%EC%8A%A4%ED%86%A0%ED%85%94%EB%A0%88%EC%8A%A4)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관계는 상당히 독특하다. 플라톤의 수제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학과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특히나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경우, 중기 이데아론은 상당히 비판한 반면 후기 이데아론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는 점도 상당히 이채롭다. 하지만 그의 출생을 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3세의 궁중의 의사였다. 아민타스 3세에 이어 마케도니아 왕에 오른이가 필리포스 2세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포스와 어릴 적부터 친구사이였다. 필리포스 2세 사후 마케도니아 왕에 올라 유럽을 정벌한 대왕이 바로 알렉산더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포스 2세의 궁전에 머물며 그의 아들 알렉산더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였다!!!!! 그가 생각하고 주장한 범위는 단순히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문학, 사회학, 수학, 기하학, 물리학등 사회전반에 걸쳐 서양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포함하여 '수사학', '시학', 형이상학', '정치학', '자연학', '범주론', '명제론'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본인이 읽은 저서는 '시학'이다. 시학은 시 창작의 기술에 대하여라는 뜻으로 지금 남아있는 원본 대부분은 '비극론'이 대부분이며 '희극'을 설명한 제2부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잘은 모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비극론'이 현재 모든 소설과 드라마, 영화의 비극론의 시초라고 많은 평론가가 말하고 있는데 본인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ㅠㅠ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뿐만이 아니라 과학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철학과 과학은 중세 서양 철학과 과학의 기본이 되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19세기에 와서 그를 과학자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19세기 이후 과학은 실험이 아닌 '증명'해야만 인정하는 풍토로 변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분야의 주장은 사실여부를 떠나 '과학'으로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적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 사실'을 실제로 증명하지 못했기(혹은 안 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전반에 걸쳐 서양 문명에 많은 자취를 남겼는데, 그가 말한 어록 역시 많이 남겨져있고 또한 알려져 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그의 어록은 바로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일 것이다. 그리고 종종 정치권에서 비유되어 사용되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말이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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