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한 편에 속한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이며, 정치인이가 혁명가였다.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백범 김 구 선생과 마지막에 대척점에 섰다는 것과, 그의 공산주의에 대한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이번 포스팅은 대한민국 초기 백범 김 구 선생,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정치계 최대의 인물인 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한 짧은 이야기다. 여운형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내가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고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그냥.. 인터넷에 나와있는 대략적인 그의 생에 대해서만 기술할 것이다.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서도 굳이 여운형 선생에 대해 기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박하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분들의 활동 -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 2편 '몽양 여운형 선생'에 대한 평가
여운형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냈다. 그는 구한 말 평등 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교육과 계몽 활동을 이어갔으며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감동받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활동은 중국으로 건너가 신한청년당 당수로 활동하며 1919년 3.1만제 운동을 기획하는 일을 담당한 분들 중 한 명이며, 김규식 선생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직접 일본과 담판을 지으려고 하였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등을 엮임 했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 때 안창호, 김동삼 선생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나 그 이후 임시정부를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중화민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활동하던 도중 쑨원의 권유로 중국 국민당에 가담해 국공합작을 통한 중국 혁명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1929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고 그 이후에는 주로 언론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중국 상해에서 동아일보 상해 주재 촉탁 통신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33년에서 1936년까지 조선 중앙일보 사장을 엮임 하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 중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은 이때부터인데 1944년 비밀 지하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결성하고 해방 뒤 1945년 8월 안재홍, 박헌영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와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하게 된다. 1946년 김규식, 안재홍 등과 함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진행하였으나 좌. 우익 양측으로부터 모두 테러를 당하게 되고, 또한 좌파 단체의 주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대립하게 된다.
1947년 7월 19일 지금의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차량으로 이동하던 도중 백의사의 멤버인 김영철이 주도한 '한지근'을 비롯한 다섯 명에게 저격을 받고 암살되었다. 여운형 선생의 암살에 대한 이야기는 tv에서도 몇 번 다룬 적이 있다. 당시 백의사가 어떤 단체인지, 그리고 실제 암살을 자행한 한지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많은 가설들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결론 내어진 부분이 없다. 분명 암살도 맞고, 암살을 자행한 인물도, 그리고 그 배후세력이 백의사라는 것도 밝혀냈지만 왜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여운형 선생과 김 구 선생의 관계에 있다. 당시 이 두 분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 구 선생은 합리적인 중도 우파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고, 여운형 선생은 누가 봐도 좌파였다. 당시 남. 북의 관계개선에 대한 시각차가 존재했던 두 분은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위의 내용에 첨언되는 미국과의 관계이다.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이유로 주둔을 결정하였고, 당연히 북측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해 공산주의화되어가고 있었다. 당시의 좌파라는 개념이 어떤 부분에서는 공산주의자와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비추어보면 그의 암살에 미국이 관여되었음을 유추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운형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1907년 동생인 여운홍과 대한협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형제는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감격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1914년 여운형은 집안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 유학길에 오르는데 당시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집안에 남아있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켜 주게 된다. 이후 중국 금릉대학교 영문학과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한다. 졸업증서를 받지 못한 재 영문학 과정을 수료하고 학교를 마치게 된다. 이후 상해에 정착하여 '협화서국'이라는 미국사람이 경영하는 곳에서 출국수속 관련 업무를 맡아서 생활을 이어나간다. 이 당시인 1917년 중국국민당의 쑨원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