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과 정치인을 통틀어서도 참 독특한 캐릭터의 정치인이긴하다.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판사에 임용되었지만 그는 고졸출신이다. 우선 이 부분부터 그는 통상적인 정치권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시정연설이나 국정연설을 할 때 그를 대놓고 무시하는 보수정당 정치인들과, 대놓고 무시할 순 없으나 결코 자기당의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그가 속한 민주정당의 정치인들... 지금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탄핵되었지만 열린우리당 창당은 당시의 보수적인 흐름에서 꼭 필요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과 결단에 모두 동의하는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라크 파병은 반대했고, 한미FTA와 영화 스크린 쿼..
2009년 5월 23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토요일이었는데 전날 감기때문에 온 몸이 완전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23일 8시쯤인가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에 tv를 켜는데 속보가 날아왔다.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추락했다는 속보였다. 그때까지만해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로 tv랑 인터넷을 번갈아보며 확인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속보가 다시 tv와 인터넷을 뒤덮었다. 내게 정치와 대통령이란 이런것이다를 알려준 그분은 그렇게 세상을 등지셨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현재 민노총이나 한노총등에서 데모를 위한 노래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원래 이 노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중 5월 27일 전라남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에게 희생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님과, 1978년 말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 님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백기완 선생이 글을 쓰고, 작곡은 김종률 님이 하셨다. 보통 작사가를 황석영 작가로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이는 백기완 선생의 시를 확석영 작가가 편집하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처음 공개된건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당시가 아닌 1982년 2월 윤상원과 박기순의 유해를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에 합장하면서 영혼결혼식을 거행할 때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이 노래는 당시 카세트테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