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설레는 광화문(역) 방문 씁쓸함으로 남는 화나는 기억
- 여행과 맛집/곰돌이의 여행
- 2023. 3. 2.
3.1절 특집 포스팅 제 1탄.. 광화문 광장 원래는 3월 1일에 맞춰 포스팅하고 싶었으나 이것저것 다시 확인하고 해야되는 내용들이 있어서.. ^^
오랜만에 광화문역으로 걸어본다..정말 오랜만이다.. 예전.. 서울에 10년 이상 살았으면서 실제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보기위해광화문에 온 적은 없으니까.. 그냥 지나가는 길에..(죄송합니다.. 이순신 장군님..세종대왕님..ㅠㅠ) 오늘은 마음먹고 광화문 광장을 거닐어 보기로 했다..
2번출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이순신 장군님과 세종대왕님이 차례대로 굳건한 의지로, 인자한 미소로
계신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의 발명품들.. 첫번째..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다 세종대왕님 혼자서 개발했다고 할 수 없으나...뭐.. 장영실에 대한 포스팅은 나중에...어쨌든 세종대왕님.. 짱!!!!!
이순신 장군님... 늠름할지어다....
어찌 이순신 장군님이 계신곳에 거북선이 없으랴~~~~~~~~~~아래엔 난중일기의 일부 기록들이다....
어쩔 수 없는 나도 한국인이다..이런 글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경건함.. 비장함.. 그런 것들을 느끼게된다...
조선시대에 여기는 흔히 육조거리라고 하였다고 한다...아래는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의 광고판에서 보여주는 3.1절 파노라마다...참.. 인상 깊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 한 명빼고 나머지를 사진으로 옮겨본다...오늘 하루 정도는.. 이 분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도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쓰신 글귀....[경천]하늘의 이치에 따라 국가와 국민이 스스로 본분에 맞게 도리를 지키고 양심을 거르지 말아야한다.. 도마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님의 편지를 소개한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니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마음 먹지 말고 죽어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의해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오,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도산 안창호... 평생을 나라의 독립과 교육에 헌신하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우리나라 최초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주도한 그때 당시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시인 윤동주... 무장 독립운동을 하지못하는 본인의 나약한 심성을 괴로워하며 글로써 민족의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자, 가장 좋아하는 시..
윤동주님의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매헌 윤봉길 의사.. 그가 홍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질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였다..
윤봉길 의사의 아들 담에게 보내는 편지...
이때 윤봉길 의사의 첫째는 겨우 3살이었고, 셋째 담은 엄마의 뱃속에 있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의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조선 말 10대 부자이던 그이 식솔들은 그들이 가진 집과 땅을 현재 돈으로 환산시 2조원에 달하는 금액에 해당하는 40만원에 처분하고 만주로가 독립운동과 자금을 지원하였다.그의 여섯형제의 아버지인 이유승이 이조판서를 지낸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로한일합병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묵인만하였더라도 일제로부터 충분한 대우를 받고 을사오적처럼 편안한 일생을 살았을것이다..헌데 이를 거절하고 그의 여섯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진정한noblesse oblige(노블레스 오블리즈)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서간도 지역의 한인단체 활동을 오롯이 이회영 집안의 재력으로 유지되었다..
둘째 이석영.. 당대 최고의 갑부였던 이유영의 양자로 입적하여 1934년 74세의 나이로 배고픔에 굶어죽었다.
우당 이회영...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진행하다 다롄으로 이동 시 상하이에서 밀정으로 걸려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성재 이시영.. 조선의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대 부통령이 됨.
조소앙 선생(소앙 조용은)... 1930년 안창호, 이동녕, 김 구 등과 대한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다.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최재형 선생...9살에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로 건너가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맡아 재발행..일본을 규탄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아버지 최흥백은 노비였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그는 집안이 너무나 가난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적이 없었다.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만해 한용운.. 일제 강점기때 독립 운동가이자 승려..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고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해 청년운동에 힘을 쏟았다.
[나는 웨스트민스턴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호머 힐버트 박사..일제의 한반도 강제침탈을 전 세계에 알렸다..그의 유언대로 그는 한국땅에 안장되었다..
여기가 광화문 육조거리다...
난 이 문지기 분들.. 인형인줄 알았는데.. 사람이었다.-_-;; 얼마나 피곤할까. ㅠㅠ
여기까지 정말 재밌고 뜻깊은 3.1절이었다...오랜만에 느껴보는 뿌듯함과.. 내가 지금 평화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안도감...위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근데... 이걸 단박에 깨트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광화문에 도착해서 다른 곳을 모두 탐방하고 다시 돌아왔을때까지 저런 미 XXX을 하고 있었다..스피커에는 계속해서 트로트를 비롯한 가요가 흘러나왔고... 여기 모인 일부 사람들은xxx처럼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고 있었다...도대체 3.1절에 성조기는 왜 꺼내들고 지 xxxx 하고 있는건지...우연찮게 옆에 어떤 아주머니가 핸드폰에 메시지 쓰는것을 봤다.. 주옥순 화이.... 나 참....3.1절에 자신의 자녀도 위안부로 보내겠다는 어미를 지원하는 이 여자는.. 이 단체는 도대체 뭘까...도대체 '자유마을'이란 단체는 무슨 단체일까....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해야하나....... 여기에 2,30대 젊은이들은 없었다...세대를 비하할 생각은없다.. 나도 이제 40대이니...하지만 대한독립 만세를 위치던 3월 1일... 말같지도 않은 개xxxxx들의 난장판을 보고 있자니..화가 치밀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