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과 3천궁녀.. 우리는 잘못된 역사관에 속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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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백제의 멸망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나...문헌상 백제의 멸망에 대해 기술해놓은 책은 거의 전해지지않는다.
우린 단순히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들을 멀리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정도만 알고 있다...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장자로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에 따르면 그는신라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태종 무열왕의 이종사촌이다..이때의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니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절반 정도만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선덕여왕과 태종 무열왕의 촌수를 생각하면 이종사촌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이자 무왕의 왕비이다.
선화공주가 선덕여왕과 자매라는 이야기도 있고, 사촌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어찌되었든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들이 부여의자... 즉 의자왕인 셈이다..의자는 이름이다.. 부여는 성.. 그래서 부여 의자....의자는 의롭고 자비롭다는 뜻으로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왕의 칭호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즉.. 의자왕과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이종사촌내지는 촌수로 6천을 넘기지 않을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서에 담긴 백제의 기록중 그나마 의자왕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재위 초기에는 정복 군주로서 신라, 고구려와 영토전쟁을 벌였고 아버지인 무왕의 뒤를 이어 결과적으로 본인이 마지막 왕이 되었지만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마지막 명군이자 성군이었다.하지만 재위 15년인 655년경부터 갑자기 주색을 탐하는 최악의 폭군으로 묘사된다. 역사서 어디에도 의자왕이 이렇게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한 이유에 대해서 기술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백제에 관한 기록 중 가장 많은 부분을의자왕이 차지하고 있지만 왜 폭군이 되었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이때부터 의장왕에 대한 비틀린 기록이 이어진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역사라는것 자체가 승자의 기록이니 신라 입장에서 특히나 태종 무열왕은 자신의 딸이 백제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으니 태종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 김법민이 자신의 누이를 죽인 무왕과 그의 아들인 의자왕을 좋게 표현했을리는 없다.. 아무리 촌수가 가까운 친척이라도 자기 누나보다 가까울까..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의자왕의 자식에 관련된 내용과 낙화암의 3천궁녀다. 역사에 따르면 의자왕은 슬하에 50남을 두었다고 한다.. 남자만 50명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대략 딸도 비슷한 비율로 태어났다면 자녀만 대략 100여명인 것이다..
도저히 설명이 힘든 부분이다..이건 신라입장에서 의자왕의 향락을 과대포장함일 것이다.물론 마지막 백제 부흥운동에 관련하여 부여의 왕족들이 의자왕의 자녀들로 묘사된 부분도 있지만 아들 50명은 너무하지 않는가...
또하나 기가막힌 부분은 앞서 말한 낙화암의 3천궁녀 이야기다.. 혹시 이 포스팅을 읽는 블로거분들 중 낙화암을 가보신 분이 계신가?

 

 

백마강에서 바라본 낙화암

사진의 출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낙화암 (落花岩)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낙화암_백화정에서 바라본 낙화암 전경 (촬영년도 : 2015년)

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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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이 낙화암이다...가보면 알겠지만.. 여기.. 낙화암... 절대로 3천명이 서있을곳이 못된다... 
그럼 궁녀들이 차례대로 나라잃은 슬픔에 자결하려고 줄 서서 올라갔을까...위 두 내용은 의자왕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백제의 멸망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서가 아닌 백제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게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기위함일 것이다..
난 백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만..(오히려 고향이 경상도이니 신라에 더 가까울수도) 이런 어찌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어릴때.. 
특히.. 중학교 교과서에 너무나 당연한듯이 교육을 받았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자결을 한 3천궁녀를 그 당시 우리는 순결을 지킨 숭고한 죽음이라고 배웠다.. 말이되나.. 나라가 망했는데.. 숭고한 죽음이라니... (나 너무 열받았나.. -_-;;)
나의 중학교 시절의 교육이니 대략 1992년에서 94년정도일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런 차별적 교육이 당연하다고 여겨졌고, 우리는 3천 궁녀의 죽음이 애틋하고 의롭고, 정의로우며 지조를 지킨 숭고한 죽음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아니 내가 성인이 되어 내 나름의 역사관이 생긴 이후 다시 생각하면
정말 말도안되는 xxxxx같은 교육이었다.

그냥.. 역사에 대한 리뷰를 하면서... 
그때 당시 나의 무지했던 지식의 얕음을 비관하며 성질나서 그냥 막.. 끄적였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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