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보통 당시 역사를 임진왜란으로 기억하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왜란은 임진왜란이 아닌 정유재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한 기가막한 사연을 주말을 맞아 주절주절 끄적거린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생각보다(?) 조선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 오부나가를 물리치고 막 일본을 통일한 시기였다. 일본통일 후 히데요시는 수하의 다이묘들에게 전국을 분할하여 나눠 통치하도록 하였으나, 전국 전쟁이 끝난 후 더 높아진 다이묘들의 욕구를 일본에서 모두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대륙으로의 진출이다. 일본이 부산 동래성에 도착해서 요구한 건 간단하다. 자기네들은 명으로 진출할 것이니 그 길을 터 덜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명과 사대외교를 하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당연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나라를 굴복시키려는 전쟁이 우선이었기에 조선에서의 침탈과정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두 축으로 하는 일본 선발대는 최대한 빨리 한양으로 입성해 조선 임금을 굴복시킨 후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여 명나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선조의 어이없은 도주
하지만 어이없게도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평양으로, 그리고 의주로 도망치고 만다.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본으로서는 많은 당황을 하였고, 그렇게 흐지부지 시간이 흐르면서 명나라가 참전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도대체 선조는 정말 조선의 국왕이 맞나.. 이 사람이 조선을 버릴 때 그 후 이순신을 버릴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이후 조선을 사이에 두고 명나라와 일본은 명분없는 전쟁을 진행하게 되었고, 명나라 입장에선 그들에게 득이 될만한 전쟁이 아닌 바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어 했다. 일본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압에 못 이겨 전쟁을 일으켰지만 일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반기를 드는 다이묘들은 전쟁에서 점차 빠지면서 그 동력을 잃게 된다.
아무도 몰랐던 그들의 밀약, 그리고 정유재란
이에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서 휴전협정을 하게 되고, 이들은 휴전을 명목으로 각자 문서를 조작하여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만 협정문서를 작성하게 된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명나라 심유경 역시 후에 문서를 조작한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당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형당하진 않았으나 다이묘에서 축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쑥대밭이 된 조선, 그리고 도자기 전쟁
임진왜란의 명분이 일본의 명나라 침공이었다면, 정유재란은 그야말로 일본인들의 조선 약탈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흔히 임진왜란(with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정유재란 당시 일본이 약탈해 간 수많은 도자기와 조선의 뛰어난 도자기공들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차 문화가 상류사회에 번지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도자기보다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공예가 주를 이루었다. 그들 입장에서 조선의 도자기는 최고의 상품이자 반드시 일본으로 가져와야 되는 최고급 기술이었다. 그래서 정유재란 발발 시 일본은 조선에서 수많은 도자기와 도자기 기술자들을 강제로 데려갔고, 일본은 이후 도자기 공예가 발달하게 된다. 또한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의 성과를 위해 조선과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을 죽였는지를 성과의 가치로 판단했고, 이들은 전쟁 중 조선인들의 코와 귀만 베어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조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한반도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리는데 그중에서 전라도만이 그나마 왜란의 상처를 덜 받은 지역으로 남아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일본의 보급부대를 바다에서 모두 끊어버린 것이 그 첫 번째이고, 육지에서는 김시민 장군과 권 율 장군이 각각 진주대첩과 행주대첩등을 통해 일본의 서쪽 진격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정유재란의 결말, 그리고 오늘날 일본을 만든 세키가하라 전투
정유재란이 막을 내린 이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작스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출로서 오롯이 본인의 능력으로 쇼군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그의 출생이 미비하여 그의 출신배경을 완화시켜 줄 덴노가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쇼군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일본은 또다시 전국시대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히데요시 사망 후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다이묘들과 당시 에도를 중심으로 한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중심으로 한 다이묘들 간에 또다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드디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전국을 통일한 후 에도에 막부를 설치하고 일본을 통치하게 된다. 이 에도가 지금의 도쿄이다. 에도 막부는 1800년대까지 이어지게 되고, 일본의 근대화 정책인 메이지 유신에 이르어 그 명맥이 마무리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일본을 다시 통일시킨 후 끊어진 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되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조선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교역을 재개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에 당시 조선에서는 사명대사를 일본에 파견을 보내어 협상을 하게 되는데 당시 일본에서 사명대사는 불자로서 상당히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에서의 불교는 거의 국교와도 같이 숭배되는 시기였다. 사명대사는 일본과의 협정을 통해 왜란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과 도자기 기술자 일부를 데려오는 등 엄청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조선, 그리고 경술국치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그 이후 병자호란등을 거치면서 국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만다. 이후 영조와 정조시대를 거치면서 일정 부분 다시 르네상스 시기가 올 것 같았지만 정조 사후 두 임금이 평생을 두고 진행한 탕평정책은 순종 즉위 후 김조순 일파의 안동김 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조선보다 일찍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또다시 조선을 침략하게 되고 결국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만다. 바로 경술국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