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8.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를 만든 탐라.. 그리고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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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우리나라 제일 남쪽 끝에 위치한 섬이다. 지금이야 제주특별자치도로 지정이 되어 제주도로 놀러 갈 바에야 동남아로 여행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가가 엄청 치솟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제주도는 4.3 사건으로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예전 탐라라 불리던 제주.. 그들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편입되었을까???

 

 

 

삼성혈 신화

 

 

제주도는 문명이 시작한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에서 발견된 뗀석기류의 유물을 통해 대략 제주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데, 앞선 포스팅에서도 말했듯이 당시 한반도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주시 이도 1동에 있는 '삼성혈'이 제주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삼성혈의 신화'가 시작된 곳이다. 신화상 약 4,300년에 이곳 삼성혈에서 탐라의 시조가 되는 3명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니 단군신화와 더불어 거의 경쟁에서 떨어지지 않는 신화이다. 이 세 분의 조상은 벽랑국에서 건너온 공주 세명과 혼인하게 되는데, 그들이 건너온 벽랑국은 외국이 아닌 한반도의 완도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시작된 탐라는 고씨, 부씨, 양씨에 의해 탐라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탐라의 초기

 

 

탐라에 대한 옛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이 현재에 발굴된 유물로 당시의 연대와 생활상을 추정하는 편인데, 제주 고산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나 돌도끼 등이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데 이는 기원전 3,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들에 대한 기록은 서기 3세기경에 '진수'가 쓴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인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서쪽의 큰 섬에 '주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일반적인 한반도의 말과 통하지 않았고, 가죽옷을 입고 생활하였다고 쓰여있다. 이 '주호'에 대해서 의견이 많은데 정확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고 한다. 탐라 이전의 제주를 주호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나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마한이라는 존재가 고대국가로 들어서지 못하고 군장국가상태에서 백제로 흡수된 국가이기때문에,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그들의 초기 기록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략적으로 유추가 가능한 건 당시 마한지역과 교류가 가능했다는 것은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고 또한 배를 타고 이동했다는 건 별자리로 점을 치는 생활을 했다는 것 정도가 유추된다. 중국인인 '진수'가 보았을 때 한반도의 말과 그들의 말이 다르다고 한 것을 보면 그때 당시에 사투리가 있었을리 만무하고, 한반도를 통해 이동한 민족들이 점점 자신들만의 '말'로 변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의 제주도 말을 완벽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제주도

 

 

 

제주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주도(濟州島, 영어: Jeju Island)는 대한민국의 남해에 위치한 섬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이다. 또한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한다. 섬의

ko.wikipedia.org

 

 

한반도와의 교류

 

 

앞선 탐라의 신화나 기록으로 유추해볼때 3세기 이전의 탐라는 군장형태의 부락생활을 한 것으로 유추된다. 한반도 역시 당시 고대 삼국이 탄생하던 시기와 맞물려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교류는 그때 당시를 기점으로 해서 조금씩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탐라는 백제와의 교역을 가장 먼저 시작한것으로 보인다. 백제 문주왕 2년인 476년에 탐라가 백제에 사신을 보내고 백제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 탐라는 앞서 얘기한 부락생활을 하는 집단으로 여겨지며 삼국 중 백제와 가장 먼저 교역을 하며 그들의 지배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와의 교역이 제일 먼저 시작된 부분은 백제 역시 조선 기술이 발달하였기에 탐라와 서로 왕래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의 탐라

 

 

탐라는 삼국시대 이후 꾸준히 한반도에 종속된 채 독립된 형태로 이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장보고가 탐라와 완도를 거점으로하여 신라, 당, 일본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당시 삼별호는 탐라를 거점으로 몽골에 계속 저항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인 자견왕 시절 900년대에 이르러 탐라의 태자 고말로가 고려에 입조 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고려는 탐라를 고려와 동일시하지 않고 외국으로 대하였다. 고려시대에 진행한 과거시험에서 탐라는 외국에 속하여 과거시험을 치르렀다. 이렇듯 탐라는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속국으로 조공을 받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원나라에서부터 명나라 초기까지 탐라는 몽골의 문화가 전해지기도 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한반도와 같이 목, 군, 현 단위의 행정구역이 설치되고 조선의 실질적인 관리를 받으면서 비로소 한반도 본토에 편입되게 된다. 그러면서 탐라는 전라도 강진지역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들의 귀양지로 남게 된다.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와 1954년 5월 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남로당 소속의 빨치산 조직 진압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2019년 12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따르면 민간인 희생자수는 14,442명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민간인 희생자수는 25,000명에서 30,000명으로 추정된다.

 

사건의 시작은 터무니없다. 1947년 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17,000여 명의 좌익세력 및 남로당계열의 군중이 미군정통치반대등을 주장하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따 가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여 소란이 발생하였다. 가마경관이 어린이가 차인 사실을 무시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몰려들어 가마경관에게 아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이때 군중들이 경찰서로 진입하자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하고 시위대에 총을 발포해 6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상자 가운데는 시위대와 관련이 없는 일반 구경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민심을 자극시킨 것이다. 좌익세력과 남로당은 이것을 빌미로 민심을 부추겨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탐라국이라 불린 제주.. 우린 얼마나 알고 있나...

오늘의 쓸데없는 history... 제주도 !!!! [주요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 제주의 시작.. 탐라 == 제주도에는 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제주도에서 발견된 뗀

chhyung.tistory.com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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