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10. 통일신라의 분열, 그리고 다시 (후)삼국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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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가가 건국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 전 국가의 멸망하는 과정을 함께하게 된다. 고대 국가의 탄생은 군장국가에서 좀 더 강력한 군장세력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지만 중세 국가의 탄생은 고대 국가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통일신라 말기, 점점 약해져 가는 신라와 그들이 세력이 미치지 않는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또 다른 국가를 꿈꾸는 이들의 반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분열

 

 

모든 역대 왕조가 그러하듯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면 왕권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기 마련이다. 통일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갈수록 부패해지는 귀족과 그들을 통솔할 힘을 잃어버린 왕권사이에서 백성은 더이상 백성이 아니었다. 특히나 신라의 경우 골품제로 인한 폐쇄적인 등급제로 인한 모순과 거기에 반발하는 6 두품등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후삼국시대를 연 궁예와 견훤은 이러한 귀족들의 부패와 피폐해진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후삼국시대의 개막

 

 

통일신라는 진성여왕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영토관리는 지방 호족들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이는 강력한 왕권으로 지방 영주들을 관리한것이아니라, 왕권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기에 지방의 힘 있는 호족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마음대로 운영하게 된 것이다. 통일신라는 겨우 경주지역의 통치만 가능할 뿐 이때에 이르러 통일신라는 지방 호족들이 경쟁하는 전국시대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강원도와 전라도에서 두 명의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다. 궁예와 견훤이 새로운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며 이들은 각기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국가를 다시 세우게 되는데, 이가 바로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이다. 이들이 국호를 후고구려, 후백제로 이름 지은 것은 당시의 영토가 각각 예전 고구려, 백제 지역으로 이들은 실질적으로 고구려, 백제의 후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 그들의 지역에 당시의 국호로 나라를 일으킴으로써, 통일신라시대 이후 핍박받던 그 지역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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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년 한반도 정세
915년 한반도 정세

 

 

또 다른 신라왕족의 반란 궁예의 등장

 

 

궁예의 태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신라 왕족의 아들이라는 설부터, 귀족의 아들, 고구려의 후손 등 궁예가 어떤 출신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왕의 아들이었으나 버려졌다'라고 애매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궁예가 신라 왕족인 '김 씨'가 맞는지, 아니면 아예 다른 성인지조차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궁예는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한쪽 눈을 실명한 것으로 보인다. 

 

 

궁예

 

 

10여 세에 세달사라는 사찰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이후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처음 궁예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한 이유는 당시 그의 중심지역이 철원지방으로 한반도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명분상 고구려를 잇는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민심을 사로잡는 데에도 크나큰 작용을 하였기 때문이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고, 911년 다시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세력이 가장 팽창했을 때에는 한반도의 2/3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국력을 크게 키우기도 하였다. 후기 자신을 미륵신상이라 칭하며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고 918년 당시 왕 건을 지지하는 홍유, 배현겸, 신숭겸, 복지겸 4인방에 정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백제의 땅에서 일어난 견훤

 

 

견훤에 대한 자료도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신라의 장수 출신이라는 설과 하층민이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전해져 오지만 정확하게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견훤은 실질적으로 후삼국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후삼국은 시작되었고, 그가 고려 왕 건에게 귀속됨으로써 후삼국은 끝나고 고려가 다시 한반도의 주인이 된다.

 

견훤에 대한 자료 역시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는 않는 듯하다.. 30여 년 정도 존립하다 그것도 병합이 아닌 망해버린 국가이기도 하고, 그의 라이벌 왕 건이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고려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견훤에 대한 자료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있다 하더라도 사실을 기반으로 한 역사일리는 없을 것이다.

 

 

견훤왕릉(충남 논산 소재)
견훤왕릉(충남 논산 소재)

 

 

궁예밑에서 기회를 엿보는 왕 건

 

 

왕 건은 통일신라 후기 지방의 거대 호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왕 륭은 송악을 거점으로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 왕 건이 어린 시절 송악 지역은 궁예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이어서 그는 아들 왕 건과 궁예에게 몸을 의탁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여기서 궁예 밑에서 일하는 게 아닌 궁예에게 몸을 의탁했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의 탄생 설화 때문이다. 

왕 건의 외 5대 조인 강충에게 어떤 승려가 지나가다 부소산 남쪽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 곳 군왕이 될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강충은 그 승려의 예언에 따라 송악 부소산 남쪽에 집을 짓고 그곳에 터를 잡게 된다. 이 승려가 통일신라 시대 최고의 승려로 손꼽히는 도선대사이다.

 

우선 왕 건의 조상이 언제부터 '왕'씨 성을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라도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 그의 조상들의 흔적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다만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의 외 5대 조인 강충이 송악에 터를 잡고 그 이후 그들의 집안이 송악을 기점으로 관직이 아닌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정도만 유추가 가능하다.

 

왕 건은 기본적으로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춘...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얘기하면 어렸을 때부터 리더의 자질을 교육받고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를 새로운 국가의 왕으로 추대한 홍유, 배현겸, 신숭겸, 복지겸은 원래 궁예의 부하였으나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주군을 궁예에서 왕 건으로 교체하였다. 궁예 입장에서는 자신의 왕좌를 왕 건에게 찬탈당한 것이지만 왕 건입장에서는 궁예의 부하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 건을 자신들의 주군이자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처음일정도로 특이한 점이다. 자신들이 왕이 되겠다고 정쟁을 일삼은 것이 아니라 왕 건을 추대한 것은 아마도 그들 입장에서 신라의 1,000년을 마무리 짓고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본인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신숭겸의 경우 왕 건이 견훤과의 '공산 전투'에서 스스로 왕 건으로 위장하여 전투에서 전사함으로 왕 건이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등 이 네 사람은 왕 건이 고려를 건국하는데 일등공신이 된다. 그리고 후일담이지만 이들은 왕 건의 후계전쟁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단지 공신으로서 왕 건을 보좌하며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음으로, 왕 건이 수하들을 잘 둔 것인지 수하들이 자신들의 주군을 잘 택한 것인지 애매할 정도로 이들은 서로에게 고려 건국에 있어 절대적인 필수불가결의 관계를 맺는다.

 

이렇듯 왕 건은 궁예를 보좌하던 세력들의 도움으로 반역에 의해서가 아닌, 추대 형태로 궁예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의 시작이다.

 

 

왕건의 친필로 추정되는 글씨
왕 건의 친필로 추정되는 글씨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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