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9. 이차돈과 한반도의 불교 전파
- 역사와 정치/벌거벗은 한국사(곰돌이의 글쓰기 연습)
- 2023. 11. 28.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될 당시 신해박해, 신유박해등으로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희생되었다. 흔히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회 사제이며, 그는 26세의 나이에(1846년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에서 국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렇게 천주교는 수많은 희생자들 위에서 서서히 조선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럼 불교는 언제, 어떻게 한반도에 전파되었을까? 이번 포스팅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내가 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대 국가(신라)의 종교
한반도의 고대 국가는 토네니즘 신앙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고대 국가는 군장형태의 부락집단생활에서 실질적인 국가를 갖추기 시작하던 시기인데, 이 당시에는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사장의 권한이 막강한 시기였다. 드라마 '주몽'에서 신녀 여미을의 권력이 송일국과 비슷하거나, 정책결정 등에서는 권한이 더 막강했음을 보면 당시 제사장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하였는지 유추가 가능하다. 이렇듯 한반도의 고대 국가는 아직까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불교나 기독교 등 종교적인 개념이 없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하늘에 제를 올리고 관장하는 우두머리가 그들의 종교적(?) 통치자였다. 백성들은 왕의 말보다 제사장의 말에 더 복종하였고, 이러한 제를 관장하는 제사장들은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제사장의 권력은 필연적으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이든 방법을 강구해내야 했다.
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신라의 불교 포교
고구려는 17대 왕인 소수림왕 시절에 중국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375년 '초문사'를 절을 창건하여 전진에서 온 승려인 '순도'를 머물게하며 고구려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아불란사'를 창건하여 374년에 건너온 승려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소수림왕은 이렇게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결속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이렇듯 고구려는 공식적인 외교채널(?)을 이용하여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백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한 부분이있다. 전해져 오는 기록으로는 13대 미추왕 시절인 263년 고구려 승려인 '아도'가 불교를 전했다는 설과, 19대 눌지왕 시절에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했다는 설, 21대 소지왕 시절에 승려 '아도'와 함께 온 자들이 불교를 포교했다는 설 등이 있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에 불교와 관련하여 무엇인가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정확하지 않는 내용이다. 어찌 되었든 신라는 이처럼 고구려와 달리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승려가 신라로 내려와 백성들 사이에서 불교를 포교한 것이 특징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기에 대략적인 추정만 가능할뿐이다. 이렇게 신라는 고구려가 중국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이래, 약 150년이 지난 법흥왕 시기에 이차돈의 순교로 정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한반도 최초의 종교적 순교자 이차돈
이차돈은 지증왕 7년인 506년 출생하여 법흥왕 14년인 527년, 22세의 나이로 순교한 승려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단순히 '이차돈'이라고 알고 있는데,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유사를 보면 그의 성은 김 씨 혹은 박 씨이며 이름이 이차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법흥왕 당시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사인'이라는 직책으로 법흥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사람이었다.기록으로는 법흥왕과 당숙과 조카사이정도 되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고대국가로의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지만, 신라의 경우 아직 고대국가로의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부족중심의 연맹체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지증왕시절부터 서서히 고대국가로의 체제를 준비하던 신라는 법흥왕이 재위하면서 전통신앙 중심의 연명체 사회를 불교를 중심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으며,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이차돈은 이러한 법흥왕의 왕권 강화정치에서 불교를 신라에 뿌리내리게 하는 개혁작업의 선두에 있었다. 당시 이차돈은 법흥왕의 왕권강화 정책과 개혁정책에서 불교가 수용된다면 새로운 신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할 것을 법흥왕에게 제안했다.
이차돈의 순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승려 일념이 지은 '촉향분례불결사문'에서는 불교가 공인되는 데 있어서 이차돈과 함께 법흥왕의 역할을 강조하며, 왕이 사찰을 창건하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법흥왕은 무기와 형을 집행하는 도구들을 모아놓고 위엄을 갖춘 다음, 신하들에게 자신의 사찰 창건을 지체시키는 자가 누구인가를 일갈하며 신하들을 추궁하였다. 이에 신하들은 모두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대답을 못했을 때, 법흥왕은 사인 이차돈을 불러 꾸짖으며 그를 처형시키게 된다.
다른 하나는 사인 이차돈이 법흥왕의 왕명이라고 속여서 절을 지으려고 하자, 신하들이 법흥왕에게 고하였고 이에 화가 난 법흥왕은 이차돈을 처형하였다. 위 두 가지 설 중 첫 번째는 법흥왕의 역할이 강조되는 부분이있고, 두 번째는 이차돈의 역할을 좀 더 강조하는 부분이있다. 첫번째 설은 '촉향분례불결사문'에 등장하고, 두번째 설은 '향전'에 의해 전해 내려 온다.
결국 법흥왕은 이차돈을 처형하게 되는데, 그때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솟아올랐다고 전해진다. 이어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은 진동하며, 사방에서 꽃비가 내리는 재해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이차돈은 26세가량의 젊은 나이로 신라에 불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게 되고, 천경림에 최초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조선말기 신유박해와 신해박해를 통해 순교한 분들에 대해서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조선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수많은 희생을 통해 어렵게 조선에 정착될 수 있었듯, 신라시대는 당시 전통 신앙 중심의 토네이즘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나 신라의 경우 고구려, 백제와 달리 정식적으로 불교라는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에 그 전파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에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