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20. '성리학'의 왜곡된 해석, 그리고 '붕당 정치'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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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새로운 나라 조선의 근간으로 하여 건국되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이 성리학의 왜곡된 해석과 그에 따른 붕당 정치로 망하게 될 것을 알았을까? 성리학의 왜곡된 해석은 글쓴이의 주관적 입장이긴하지만 어쨌든 정도전이 무덤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일것이다. 성리학과 붕당 정치, 그리고 조선의 멸망한 원인에 대한 포스팅이다.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이황과 이이(and 김종직, 조광조)

 

 

퇴계 이황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사성과 대제학에까지 이를 정도로 학문적 완성도 높았던 퇴계는 '을사사화' 후 고향으로 내려와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자의 생을 살아갔다. 그이후에도 선조에 이르까지 계속적으로 관직진출의 요청을 받았다. 1560년 고향에 '도산서당'을 짓고 7년여동안 서당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쓰며 제자양성에 주력하였다.

 

선조 3년인 1670년 어느 아침 평소처럼 매화분에 물을 주게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에 자신을 일으켜 달라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 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그의 역책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고한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한 선비의 죽음에 '역책'이라고 높여 부를 정도의 인물은 없었다. 우리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죽음에 대해서도 '역책'이란 표현을 사용하진 않을만큼 퇴계 이황이 조선 성리학에 끼친 영향은 다분히 몇 줄 그의 업적을 적는것으로 부족하다. 이황 본인도 조선조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로 이름을 남겼지만 그의 제자들 역시 조선중기 이후 조선의 중요한 역사마다 등장하였다.

 

 

천원권 표지모델 퇴계 이황

 

 

같은 동향의 류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김효원, 이산해, 심의겸, 윤근수, 윤두수, 허엽이 모두 퇴계의 제자들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필하며 후에 '징비록'을 편찬하였다. 1590년 일본 통신사 부사로 갔다가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잘못된 주장을 펼친이가 바로 김성일이다. 이산해는 고려말 대학자인 이색의 후손으로(7대손)  조선시대 서예 8대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나 류성룡과 함께 퇴계밑에서 수학하였지만 당시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이었던반면 이산해는 후에 류성룡과 갈라지며 북인의 영수자리에 오르게된다. 김효원은 조선 붕당정치의 시초인 동인의 영수이고,  심의겸은 서인의 영수이다. 윤근수와 윤두수는 형제사이로 윤두수는 퇴계 이황의 대부분의 제자들이 동인 계열이지만 그는 서인의 편에 선다. 허엽은 '홍길동전'을  집필한 허균과 조선최고의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다.

 

이황의 묘비탁본(나무위키)

 

 

퇴계 이황이 사후 계파를 막론하고 모든 선비들에게  존경받은 이유는 단순히 그의 학자적인 역량을 떠나 그의 인품과 열린 생각때문이다.  특히나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은 단순히 성리학의 이기론을 벗어나 자신보다 몇십년이나 아래인 기대승과 존중을 기반으로한 품격있는 토론덕분이다. '사단칠정 논쟁'은 예전에 작성한 아래 포스팅으로 대신한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핵심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인 1502년 안동에서 출생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퇴계 선생에 대한 지식은 아주 소박하다. 도산서원과 조선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자정도로만 알고 있

chhyung.tistory.com

 

 

율곡 이이가 더 유명할까, 신사임당이 더 유명할까...-_-;; 율곡은 강릉출신으로 신사임당의 아들이다. 율곡은 심사임당의 아들로 알려질게 아니라 그의 임진왜란 준비책인 '십만양병설'로 기억되어야하는 학자다. 율곡은 임진왜란 전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가 나를 포함 국정교과서 세대가 배운 내용이다. 율곡이 어떤 이유로 '십만양병설'을 주장한지에 대해서는.. 내 기억에서는 배운적이 없다.. 나름 다른 과목은 다 수면시간이었지만 국사시간은 그래도 똘망똘망하게 수업을 들었는데.... -_-;;

 

 

5만원권 표지모델 사임당 신씨(세계최초 모자모델 '모')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하나 알아둘점은 당시 가문을 중요시하던 동아시아에서 고향이란 '내가' 태어난곳이 아니라 '나의 집안'이 어디냐에 따라 불리었다. 율곡의 모계 집안은 강릉이고 부계 집안은 경기도 파주이다. 6살때 '본가'인 파주로 이사하였는데 '율곡'이란 아호가 그의 본가인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따온것이다. 하지만 실제 율곡의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으로 알고있는 이유가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가 사임당 신씨 집의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이와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있지만 아버지 이원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유가 사임당 신씨와 율곡이 워낙 유명하고 그 능력이 아버지를 넘어섰기때문에 아버지 이원수의 존재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리가 그나마 '십만양병설'을 제외하고 이이에 대해 알고있는 이야기는 두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잠깐동안 불교에 의탁한것과 '구도장원공'이라 불리는 그의 천재성에 대한 일화다. 이이는 16세에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사망하고 3년간 시묘살이 후, 갑자기 봉은사에 들어가 불경에 빠져 속세를 떠날 결심을한다. 이후 3년정도 불교에 심취했다고 알려지고 어느 이유에서인지 불교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하게된다. 이러한 그의 전적은 후에 그가 성균관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당시 '면신례'라고 하는 신임관리를 길들이는 그들 관료세계의 폐습이 있었는데, 이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로 벼슬자리를 차버리고 물러난  후에 그러한 관료들의 폐습인 '면신례'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일례로 당시 사대부들이 존경하던 정몽주의 증손자도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한다가 숨졌다고 하니 그냥 평범한 사대부 출신인 이이에 대한 면신례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심했을것으로 예상된다.

 

 

5천원권 표지모델 율곡 이이 (세계최초 모자모델 '자')

 


이이는 퇴계 이황과도 교류를 하며 서로의 학문에 대허 질문하고 답하며 학문을 쌓아갔다.당시 이이는 22세의 젊은이였고 이황은 56세로 이미 그때 조선의 성리학 대부로 모든 선비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황은 고봉 기대승과도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의 학문을 논했듯이 이이와도 나이에 구애됨없이 교류하였다.  보통 이황을 동인의 정신적 지주로, 이이를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하지만 그건 당시 그 둘의 제자들때문이지 정작 그들은 당파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물이다. 하물며 이이의 경우 성리학 해석의  차이가 당파싸움으로 변질되는 매우 경계하였다.


이이가 가장 많이 알려진계기는 바로 '구도장원공'이라 불린 그의 천재성이다.  구도장원공이란 당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불려지게 됐는데, 이이는 모든 과거시험을 장원으로 통과하였고 특별시험인  별시에서도 장원을 차지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시, 외시, 행시를 모두 3차에 걸쳐 수석으로 합격한 셈이다... (아...재수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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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t.m.i(일부일처제? 측실? 서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강릉 오죽헌에 구경가면 앞에 '오죽헌 모자 화폐 포토존'이라고 있습니다...-_-;; 예전부터 든 궁금증인데 율곡과 사임당의 후손들은 이 지폐 초상권에 대한 권리가 있을까요? 얼핏 누구나 알만한 위인들은 그런게 없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 후손들은 초상권 사용료를 못받는건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이들 후손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찾아보다가 일부일처제, 측실, 서얼등의 궁금증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죽헌 모자 화폐 포토존

 

 

율곡의 정실 부인은 곡산 노씨였는데 이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고합니다.  율곡은 양자를 들이지 않고 측실을 통해 아들과 딸을 두었다고 하죠. 또한 율곡의 딸은 후에 김집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는데, 그녀도 정실이 아닌 측실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찾아보니 아들에 대한건 찾아볼수 없네요. 아시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는 명백한 '일부일처'사회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서얼'이 존재하고 그들 사이에 계급이 발생하는거죠. '일부다처'였다면 애초에 서얼이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계급도 존재하지 않았겠죠...조선시대의 이중적 잣대가 바로 이부분인데 그렇게 성리학을 숭배하는 나라에서 '일부일처'가 공식적인 사회체제임에도 임금을 비롯한 왕족과 양반들은 '대놓고' '일부다처'를 매우 모범적으로(?) 실천합니다.

 

원래 인류는 일부다처제와 일부일처제를 병행하는 '종'이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하층민으로 불리는 이들은 어쩔수없이(?) 일부일처제였지만 상류층은 일부다처제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상류층은 그들의 신분 유지를 위한 정략결혼이 보편적이어서 첩을 두는것이 그들의 해방구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처다부제 사회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일처다부제는 환경적인 요소가 많은데 중국의 모수오 족이나 인도 공화국 남부의 나야 족처럼, 땅이 척박하거나 한곳에 정착이 불가능한 경우 남성 여럿이 여성을 간간이 만났다 가는식으로 일처다부제를 유지하는것이지 상류층(어떤 상류층을 말하는것일까요?? -_-;;)의 욕구해방을 위해서 일부다처제를 혀용하지않고 지들끼리 유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는 현생인류가 시작된 이래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 인류가 생각을 하고 무엇인가 정치, 사회적 규범을 만들기 시작한 후부터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지켜져(?) 내려오는 일종의 상위포식자의 행패입니다. 힘있는 자는 되고, 따르는 자는 안된다는 이상한 헤게모니를 가진 자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인 1920 ~ 1930년대 근대적 민법체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부일처제'가 법적으로 정착되는 시기였습니다. 또한 혼인신고를 통한 부부의 법률적 효력을 인정하는 '법률혼주의'는 1923년부터 시행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축첩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민법체계가 만들어집니다. 6.25 전쟁 이후에는 법이 제정되어 간통쌍벌죄와 혼인빙자 간음죄가 도입되었고, 1960년에는 재판상 이혼의 원인이 확대되어 축첩이 이혼사유로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후 간통죄는 1988년 헌법재판소 설립 이후 5차례의 위헌법률 심판이 제기되고 2015년 2월 26일 2 대 7로 위헌결정이 내려저 제정 62년에 폐지됩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면서 관련 법률들도 모두 일부일처제를 옹호하고 지향합니다. 조선시대도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이긴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단서가 붙는데 바로 '축첩'을 용인한다는 것입니다. 양반인 남성은 본처가 죽지도 않고 살아있어도 양인 이하의 여성을 첩으로 들일 수 있는것인데, 이렇게 첩으로 들어온 여자들도 그 계급에 따라 첩, 소실, 측실, 부실, 후실등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이는 조선 초기 일부 사대부층과 고려의 귀족출신들은 '다처병축'이라 하여 원나라의 풍습이 고려에 전해지게 된것입니다. 그렇게 고려의 폐악과 폐습을 뜯어고치며 백성들을 잘 살게 하겠다고 일어선 조선의 위정자들이 그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한 원나라의 '다처병축' 풍습을 그대로 따라한것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은 신라와 고려에서 행해지던 동성혼과 근친혼을 법적으로 금지하였고, 남녀가 중매자가 없이는 서로의 이름조차 알아서는 안되며, 폐백을 주고받지 않으면 친교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원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가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다처병축'의 문화가 위정자를 비롯한 상류층들에게 이어지게 된것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후궁을 비롯해서 양반들의 첩 문화(?)가 어떻게보면 구 악습, 혹은 폐습, 폐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입장에서는 좋은(?) 풍습이라고 생각한것이죠. -_-;;

 

 

조선의 건국세력 훈구파와 고려 길재의 후예 사림파의 대결 '4대 사화'

 

 

동서양의 모든 국가들이 처음 건국되었을때 그러하듯 조선도 새롭게 왕조를 건국한 후 건국과정의 공신세력들이 우선적으로 권력을 잡게된다. 조선 초기는 아직 사림파(나중에 언급)들의 영향력이 적던 시기로 성종때까지는 공신세력을 포함한 훈구파가 조선 권력을 장악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세종이나 문종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은 서로가 적당히 견제를 하며 공생하던 시기였는데 이는 태종을 비롯해 세종이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한다.

 

이러한 그들의 공생은 세조가 즉위하면서 1차적으로 붕괴되는데, 훈구세력은 '계유정난'으로 세조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단종을 지지하는 세종이 발탁한 사림세력들을 축축해버린다. 당시 제거된 '사육신'은 세종이 아끼던 신진사대부 출신들로 세종과 함께 훈임정음 창제와 조선 초기 황금기를 열었던 주역들로 세종의 장자 승계원칙으로 즉위한 문종의 아들 단종이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으로부터 축출당하자 그들은 단종을 복위시키기위해 노력하지만 수양대군과 그의 측근인 훈구세력에 의해 제거됩니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훈구파는 계속 승승장구 하지만 세조 사후 성종이 즉위하면서 성종은 훈수파를 견제하기위해 사림파를 다시 중용하기 시작한다. 성종이 그나마 성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이렇듯 정치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하지않고 경쟁관계에 놓음으로써 나름의 탕평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 시절 훈구파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다시 한 번 사림파를 축출하게 된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에 원고가 된 사초들 중 '조의제문'을 문제삼았는데 이 조의제문의 내용이 계유정난 당시 세조의 행위를 비판한 내용으로, 세조의 손자이기도 한 연산군은 이를 근거로 사림파를 제거해버린다. 또한 '갑자사화'는 많이 알려져있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관련된 사건으로, 연산군은 폐비 윤씨와 관련된 자들을 제거하기위해 스스로 기획하고 연출한 연산군 친위대의 활약이다. 영화 '간신'이 연산군의 이야기다. '갑자사화'전까지만 하더라도 연산군은 그래도 왕과 신하들 사이에 견제하는 기능이 작용하였지만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그 누구도 연산군을 제어하지 못했다.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사림파는 급격하게 힘을 잃게된다. 겨우 명맥만 유지할정도로 큰 타격을 입게된 사림파는 중앙정치에 진출하는 대신 후학양성에 더 힘을 쏟게 된다. 그렇게 조용히 힘을 기르던 사림파에게 또다시 불운이 닥쳐든다.

 

중종 재위시 사림세력은 또 한명의 인재를 발굴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정암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문하인데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였다. 조선시대 사림파를 얘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김종직이란 인물이다. 조선은 건국이후 길재와 권우등으로 성리학이 전승되었고 사림파 출신으로 거의 처음 조선 정게에 진출한 이가 권근이다. 이런 길재의 제자중 한명이 김숙자란 사람이고 그의 막내아들이 바로 김종직이다. 세조 이후 조선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 바로 김종직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로 김종직은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평가받는다. 김종직의 제자들은 정여창, 김굉필, 김안국, 김일손 등으로 그의 후학들이 조선의 사림파를 이루게되는데, 김종직의 이러한 제자들을 '우리당'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사림의 시초이다. 이런 사림파의 직계인 조광조는 급진적 개혁파로 연산군으로 인해 무너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각종 개혁정책을 펼쳤고, 이러한 그의 정책은 당시 중종의 강력한 지원도 받게된다.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정책을 지원하면서 기존 훈구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훈구세력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고 기회를 엿보게된다. 바로 '위훈사건'인데 이는 중종반정으로 공신반열에 오른 자들중 실제 참여하지 않은 자들의 공신첩은 회수하자는 사림파의 주장을 훈구파가 반대하면서 훈구세력은 중종을 압박하여 사림파를 다시 숙청하기에 이른다. 기묘사화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주초위왕'인데 이중 '주초' 한자를 파자한것으로, 조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말이다. 훈구세력은 이러한 '주초위왕' 문구를 궁궐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새기고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게하여 이를 본 중종이 결국 사림파를 제거했다는 것이 여태까지의 통설로 남아있다. 하지만 진짜 이러한 방식으로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했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주초위왕'에 대한 내용이 야사가 아닌 선조실록에서 언급되었기때문에 어떠한 방식으로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는데 사용되었을것으로 보여진다.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이렇게 한순간의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여러 사상들과 정책들은 그의 문하생이었던 백인걸에 의해 율곡 이이에까지 전해지게됨으로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과 정암 조광조의 사상으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조선시대 사화는 명종 즉위 후 일어난다. 중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는데 인종이 8개월여만에 죽고만다. 그리고 이어 즉위한 이가 바로 명종인데 명종의 어머니는 tv드라마로 많이 알려진 문정왕후이다. 인종과 명종 모두 중종의 자식이었는데 인종은 장경왕후의 아들, 명종은 문정왕후의 아들이었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모두 파평 윤씨 가문이었지만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대립하면서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지게된다. 인종 즉위당시는 자연스레 대윤인 윤임세력이 득세하였지만 인종이 갑작스레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게되면서 우리가  tv드라마 '여인천하'를 통해 많이 알고 있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국 소윤인 윤원형에 의해 대윤일파는 숙청되는데 이 윤씨 일가의 싸움에 휘말린 사림들 역시 숙청당하게 된 것이다. 특히나 윤원형은 이후 6여년동안 자신의 반대세력을 윤임파로 몰아부쳐 모두 숙청하는데, 그때 유배가거나 죽은자가 100여명에 이른다.

 

사림파는 이렇게 세조이후 4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그들의 정치적 기반은 계속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훈구세력이 조선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림파는 지속적으로 후학을 양성하였고, 때때로 훈구세력들을 탄핵하는 등 사림에서 힘을 기르고있었다. 훈구파는 기본적으로 공신계열의 후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수 없이 보수적인 환경을 조성할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사림파와는 달리 후학을 양성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세력은 단순히 가문에서 가문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훈구파는 사림파의 지속적인 탄핵으로 서서히 힘을 잃어가게된다. 그리고 사림파 스스로는 후학을 길러내면서 자신들의 학문이 후대에게 전해지게 하였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다 - 붕당의 시작

 

 

사림파들은 각종 사화를 겪으면서 중앙정치로의 진출이 계속 가로막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때를 기다리게된다. 그리고 훈구파를 향한 탄핵역시 계속 이루어지며 그들은  다시 조금씩 세력을 쌓아나가기 시작면서 16세이후 훈구파는 세력을 잃어버리게되는데 그 이유는 역시나 사림파에 비해 훈구파는 후학을 양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시 중앙정계로 진출한 사림파는 이제 그들 스스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첫 시발점이 바로 선조 5년인 1572년  이조전랑 문제였다. 당시 이조전랑은 인사권을 가진 중요한 직책이었다. 더불어 훈구세력을 어떻게 처리하고 마무리 짓느냐의 문제를 두고 사림파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지게 된다.

 

김효원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구인관계로 한때 윤원형 가문의 식객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할 당시 소장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당시 김효원과 뜻을 함께한 동인들은 류성룡, 이산해, 허엽등으로 이들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 정계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인물들이다.

 

심의겸 역시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황의 문인임에도 당시 이이 성혼등과도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의 출신에서 비롯되는데, 세종의 국구인 영의정 청천부원군 청송 심씨 심온의 6대손이 심의겸이었다. 청송 심씨는 세종 이후 꾸준히 중요관직에 오르는데 세조때 영의정인 심회의 6대손이기도하고 명종때 영의정인 심연원이 그의 할아버지다. 또한 명종의 국구인 영돈녕부사 청릉대원군 심강의 차남이며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이기도한다. 그리고 선조당시 병조판서를 역임한 심충겸의 형이고, 선조 당시 영의정인 윤두수와 사돈지간이었다. 이렇게 심의겸의 가족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 스스로는 이황과 조식의 문하생으로 사림파에 속하지만 그는 이황, 조식외에 이이, 성혼과도 교류를 하며 학문의 스펙트럼을 넒혔는데 이는 그의 출신 성분자체가 조선시대 취상위층에 속하는 엘리트 집안이기에 다른 사림들보다 좀 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졌을 것임에 짐작해본다. 특히나 이이의 경우 그의 종조부인 심통원을 탄핵하기도 하였지만 이이와는 그에 따른 사감없이 꾸준히 교류하며 친교를 이어갔다. 심의겸은 자신의 출신성분때문에 사림이면서도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도 명망이 높았던것이다. 

 

김효원과 심의겸은 이렇듯 태생부터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사림의 소장파격인 김효원은 좀 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반면, 심의겸의 같은 사림출신이라 하더라도 좀 더 온건하고 보수적인 편이었다. 이때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불리게되고, 심의겸의 집이 한성부 서쪽 정릉방에 있어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처음 동인이 먼저 세력을 가져갔다. 하지만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고 이번엔 서인이 권력을 잡게된다. 당시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며 유배를 가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계기로 다시 동인이 집권하게된다.

 

이때 집권한 동인들 사이에서 다시 분화가 발생한다. 서인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열되게 되고,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으로 분화되었다. 이후 조선에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당시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한다는 '주전론'을 주장한 북인이 먼저 집권하게된다.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면서 임진왜란 이후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켜버리고 만다. 이러한 북인의 인목대비 폐위사건에 반발해 서인과 남인은 연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북인을 숙청하게된다. 그리고 다시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북인은 다시 한번 숙청당하게되고 정계에서 사라지게된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남인과 서인의 차지였다.

 

이후 남인과 서인은 북벌론, 예송논쟁등을 거치면서 서로 집권과 실권을 반복하게되고, 숙종 재위시 환국정쟁과 허적 유약사건, 장희빈 사사등에 휘말려 남인역시 완전히 실각하게된다. 이제 다시 서인의 시대가 온것이다.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은 남인의 처벌문제를 가지고 서인또한 다시 분화되고만다. 여기에서 강경파가 '노론', 온건파가 '소론'으로 나눠지는데,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게된다. 경종 이후 영조가 즉위하지만 영조는 조선 임금들가운데 역대급으로 장수한 임금이자 치세또한 영민해서 영조 재위시에는 노론의 세력이 우세하긴 하였지만 영조의 탕평책으로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노론이 영조 재위시 사도세자를 처리하는 과정의 정당성 문제에서 다시 '벽파'와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다. 영조 재위시에는 벽파가 우세하였지만 영조 사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게 되면서 다시 소론과 서인, 남인들이 세력을 키우며 서로 견제하는 탕평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다 필요없고 군주제 국가에서는 군주가 똑똑해야한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책

 

 

이렇게 조선의 붕당은 상대방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눠지고, 거기에서 다시 강경파와 온건파를 나눠지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결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기위함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떠한 학문적 해석이나 가치관을 두고 논쟁하는것이 아니라, 자기 밥그릇을 조금 챙기느냐 많이 챙기느냐를 가지고 서로 옥신각신 한것이다. 이렇게 선조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들은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서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중시조인 김종직이, 그의 스승인 길재의 학문이 그런한것이 아닐텐데 말이다.

 

이러한 군주제 국가에서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이되려면, 무엇보다도 군주의 능력이 우선이다. 앞서 을파소와 진대법에 대한 글에서도 밝혔듯이 군주제는 군주의 역량에 의해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기때문에 군주가 정사를 조정하는 능력이 없으면, 정쟁에 휘말릴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다.

 

이런면에서 조선의 역대 임금을 통틀어 영조와 정조만이 그러한 당파싸움에서 좌우를 적절히 조정하며 견제하면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끈 유능한 군주로 기억될만하다. 영조 즉위후 군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이 군역부담을 덜고 생업에 집중할 수 있게했으며 조선 초기 신문고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소리를 들을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노론의 지원속에 즉위하게 되지만 국정운영은 노론을 비로한 당시 경종을 지지한 소론, 세력이 약해진 남인등을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영조의 어머니가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출신으로 자신 스스로 자격지심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있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즉위후 국정운영은 모든 당파가 참여하여 서로 경쟁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시간에 영조를 조선 후기 정조와 더불어 존경할만한 임금으로 배웠다.

 

정조 또한 마찬가지다. 정조 역시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당파싸움에 휘말려 그의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그 스스로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게한 노론과 척을 지지않고 오히려 남인과 소론을 중용하면서 조선 후기 최대의 성군으로 불리게된다. 소론과 남인을 노론과 경쟁시킴으로써 노론의 팽창을 억제했으며 다산 정약용으로 하여금 수원성을 축제하도록 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전파되는데에도 많은 역할을 하게된다. 그러면서 수원성을 제2의 수도로 정하며 당시 한양에 집중되어있던 양반들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가져오게 하였고, 본인 역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며 스스로의 적통성을 증명하며 왕권도 일부 회복시키기도한다. 이러한 정조의 탕평책으로 인해 동시대 실학사상은 급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조어필(출처-나무위키)

 

 

우리가 역사시간에 세종대왕에 이어 조선 후기 문화를 꽃피운 르네상스 시대로 영조와 정조시대를 일컫는 이유는 이러한 군주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영조 시대의 체제공과 정조 시대의 정약용같은 유능한 신하들의 등장도 한몫하였지만 군주가 그들을 발탁하는 안목이 없었다면 당시 조선의 부흥은 일어날 수 없었을것이다. 그에 대한 반증이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약용은 천주고 박해로 인해 18년간 유배를 가게되고, 조정은 마지막 남은 붕당인 시파에 의해 장악되고 결국은 19세기에 이르러 시파의 소수가문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군주의 힘이 없으면 군주제 국가는 망한다, 세도정치의 시작과 흥선대원군의 패착 '쇄국정책'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모든 경제와 사회가 무너져버렸다. 이후 그나마 영조와 정조라는 뛰어난 군주의 등장으로 마지막 영화를 누릴수 있게된다. 하지만 영조와 정조가 불사신이 아닌이상 그들 역시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조선도 그때부터 급수직 낙하하게된다. 바로 세도정치의 시작과 흥선대원군의 등장이다.

 

22대 왕인 정조의 사후 즉위한 23대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다. 정조는 즉위 초 아들을 얻지 못하였으나, 정조 14년인 1790년에서야 아들을 얻게되는데 그가 바로 순조였다. 순조는 즉위당시 11세였으므로 당시 왕실의 어른인 영조의 계비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된다. (드라마 '이산'의 후반기 큰 줄거리가 정조와 정순왕후의 대결 이야기죠^^) 정훈왕후는 영조 재위당시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벽파와 뜻을 같이하며 수렴청정 기간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며 정조때의 집권세력이던 시파를 숙청해버린다. 또한 신유박해를 통해 당시 천주학을 공부하면서 실학운동을 전개하던 남인들도 모두 숙청해버리고 만다. 정약용은 남인 출신으로 이때 신유박해를 통해 전라도 강진으로 18년간 유배를 떠나게된다. 아이러니하게 정약용은 이 기간동안 그의 최대업적 중 하나로 알려진 1표2서를 포함 수백권의 저서를 남기게된다. 1표2서란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이다.

 

이렇게 정조 사후 순조의 재위기간동안 15세기 이후 펼쳐진 붕당싸움은 최종 벽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된다. 최종 승자가 된 벽파는 더이상의 붕당싸움이 없어지면서 붕당정치 자체가 힘을 잃게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권력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당시 순조의 부인인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김조순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것이 조선 시대 세도정치의 시작이고 안동 김씨의 권력 잉태의 시작이된다.

 

순조의 사후 그의 손자가 즉위를 하는데 그가 헌종이다. 우리가 조선의 역대 임금을 통틀어 헌종이 누구인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순조이후 헌종과 철종 즉위당시는 붕당정치의 폐허보다 더 막심한 세도정치가 판을 친 시기였기 때문이다. 헌종은 순조의 아들인 호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세에 즉위하게 된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그녀가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였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출신으로 순조의 대를 이어 권력을 잡게된다. 하지만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외척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들의 안동 김씨와 더불어 세도정치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풍양 조씨였다. 이렇게 헌종 재위기간동안 정권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헌종은 재위 9년만인 1843년 1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된다. 순조에 이어 헌종 재위까지 중앙권력은 외척들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에 의해 끌려다니게되는데 이로써 조선의 운명은 외세가 아닌 내부의 세도정치에 의해 쪽박나기 일보직전까지 오고 말았다.

 

헌종에 이어 즉위한 철종은 보통 '강화도령'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아들이다..(휴...길다...ㅠ) 하지만 은원군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왕족으로의 예우를 박탈당한채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되면서 그는 어쩔수없이 왕에 즉위하게된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인 은언군이 사도세자의 서자였고, 그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이광역시 은언군의 서자였다. 또한 철종스스로가 유약하고 힘이 없었기때문에 당시 허울뿐인 임금일뿐 실질적인 정사는 다시 세도정치를 이끌던 안동 김씨 출신인 김문근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철종 역시 재위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국정에 참여하며 정국을 이끌려고 하였으나, 워낙 안동 김씨의 세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순조 이후 조선은 급속도로 망해가기 시작했으며 1862년 '진주민란'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난다. 영화 군도:민란의 시기가 바로 이때 당시의 조선의 상황을 그린 영화로 알려져있다.(하정우, 강동원 주연) 이때 조선에서 동학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하다.(녹두장군 전봉준) 그렇게 타의에 의해 즉위한 철종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후사도 남기지 못하며 33세란 짧은 나이에 승하하였다. 당시 이하응은 이러한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우리가 흥선대원군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리는건 그의 아들인 명복이 왕위에 즉위하기전 그의 행실이다. 그는 당시 안동 김씨가 정권을 쥐락펴락할 당시여서 설사 이하응이 왕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안동 김씨가 당시 왕실과 종친들도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하응은 살아남기위해서 하나의 계책을 떠올리는데 당시 시정잡배들로 불린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 등과 어울리며 파락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계략은 안동 김씨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그의 이러한 계략은 어느정도 먹혔들어갔는지 안동 김씨에서도 그를 중요한 왕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안동 김씨의 감시에서 벗어난 이하응은 자신의 외척들과 함께 당시 궁궐의 큰 어른이던 조대비와 함께 철종의 다음 임금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철종이 후계자없이 사망하자 안동 김씨는 또다른 자신들의 허수아비가 될 왕족을 찾게되고, 이때 이하응과 조대비는 명복에게 다음 왕위가 이어지게 하였다. 안동 김씨 입장에서도 명복의 아버지인 이하응에 대한 견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큰 무리없이 명복은 다음 보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광무황제)이다.

 

자신의 아들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진 이하응은 권력의 정점에 서게된다. 우선 그는 순종이후 외척들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는 것을 보고 고종의 아내로 힘없는 외척 가문을 고르게 되는데 그렇게 발탁된 이가 바로 여흥 민씨이다. 우리가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로 알고 있는 이가 당시 고종의 비인 여흥 민씨인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이후 조선을 바로 세운다는 명목아래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나게 하였고, 당시 일본을 비롯하나 열강들의 문호개방 요구를 거절하며 '쇄국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조선이 현대로 접어들 수 있는 기간을 늦추게되며 단순히 이 이유때문은 아니지만 이때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불과 몇십년후 조선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된다. 제국주의 국가의 장점을 말하는것이 아닌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흥선 대원군은 거부했던 것이다. 후에 여흥 민씨는 성장후 흥선 대원군의 최대의 적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흥선 대원군과 여흥 민씨의 싸움으로 당시 세도 정치로 인해 쪽박나기 일보직전이던 조선이 완전히 멸망하는 계기를 서로(?) 마련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은 15세기 이후 훈구파를 대신할 세력으로 사림파가 등장하였지만 그들이 결코 훈구파보다 더 뛰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것 같다. 이번 글을 작성하면서 꽤나 많은 자료들을 검색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파의 순기능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은 정계에 진출한 직전부터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고, 다시 북인과 남인 그리고 노론과 소론으로 끝없이 분화하였다. 그 분화의 목적은 백성이 아닌 자신들의 반대세력을 어떻게 처리할것인가를 두고 엇갈린 것이었기에 그들의 붕당이 결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러한 붕당경쟁속에서도 뛰어난 인물은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런 인물들로 인해 잠깐동안의 부흥기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바로 영조와 정조시대의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로 최소한 그들은 권력에서는 멀어졌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통찰력을 가진 임금의 존재로 조선 후기 실학을 꽃피울수도 있게된다. 

 

계속된 붕당싸움은 최종적으로 벽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지만 그즈음부터 시작된 새로운 문물의 교류와 개방에 조선은 전혀 대응하지 못하였다. 붕당정치가 막을 내린후 수렴청정을 빙자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고, 그렇게 정쟁에만 몰두한 결과 정조와 실학자들의 노력으로 서학을 받아들여 부흥시킨 조선을 그냥 옛것그대로의 상태로 외세의 침략에 까발려놓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다. 조선 말 일제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일제가 문호를 일찍 개방하여 신문물을 빨리 받아들인 이유도 있겠지만 조선은 쇄국정책과 당시 위정자들의 사리사욕때문에 문호를 개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이유도 매우 클것이다. 이렇듯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과 판단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누구에게?? 쪽xx... >.<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중 하나는 예전의 잘못됨을 배우고 익혀 다시 반복하지 말게하자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그들은 예전의 나쁜것만 경쟁적으로 취사발췌하여 자기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는것같다. 이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건 그렇지 않은 정당이건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도 도긴개긴이다. -_-;; 드래곤 마운틴은 높디 높은곳에 올라 아래를 보지 못하고 산 정상에서 자신들만의 무릉도원을 즐기고 있고, 나의 희동이 아빠네는 '지금이 기회'라며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짓밟아버리는 용호상박(!!!)의 전쟁을 펼치고 있으니..... 곧 다가올 총선에서 나는 누구를 뽑고 지지해야하나.... 뭐.. 크게 마음이 변할것같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씁쓸할뿐이다... ㅠㅠ

 

 

여흥 민씨 - 그녀의 이름이 '민자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의 경우 보통은 아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름이 없는 경우도 흔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출가외인으로 족보에 이름을 올라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 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5일간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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