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세계사 31. 유럽의 명가 이야기 - 결혼동맹으로 유럽 최대의 가문이 된 '합스부르크'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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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여러 유명한 가문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가문중 하나가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최고 가문이었다. 이번 포스팅은 '합스부르크'가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이야기다.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외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몇 안 되는 황제 가문이었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칭제 이전까지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오스만 왕조의 오스만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이 유일하였다.

 

그들 왕조가 지배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한 후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했던 나라들이 군주제와 귀족제를 폐지함으로써 모든 제위와 왕위를 상실하고 특권들이 사라졌지만 현재까지도 유럽에서는 예전 향수를 기억하게 하는 명문 가문이다.

 

원래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합스부르크 백작위가 작위였던 초창기에 쓰던 말이고 이후에는 18세기 이후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기위해 사용되었다. 

 

 

시골의 조그만 가문에서 시작된 합스부르크 가문

 

 

지금은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는 10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독립된 구심이 없는 몇몇 가문들의 세력다툼이 즐비한 곳이었다. 합스부르크는 당시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위치한 시골의 작은 귀족 가문이었다.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이름 자체도 사용하지 않는 이름 없는 가문이었다. 이들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고 교황을 배출하기도 한 대귀족인 에티호넨이라는 가문의 방계가문으로 약간의 명예는 가지고 있었다.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로첼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로 알려진 라트보트가 지금의 스위스 아라가우 지방 하비히츠부르크에 기반을 잡고 여기에 성을 쌓고 백작 노릇을 하게되는데, 이 성을 삽스부르크 섬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작이다. 

 

라트보트의 손자인 오토가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이라고 칭하였고 이들은 사위스 아르가우 지방을 벗어나 유럽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시기는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였다. 당시는 교황이 강력한 위세를 지니고 있었는데,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연이어 파문해 버리는 상황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대공위 시대인데 이런 시기가 지속되자 독일은 혼란해진 정세를 수습하기 위해 교황에게 황제의 자리를 추천해 달라고 하게 된다. 선거권을 가진 각 제후들은 다른 세력이 커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이러던 중 독일계가 아닌 슬라브계인 뵈멘 왕국의 아타카르 2세가 황제 후보로 떠오르게 되는데, 각 제후들이 슬라브계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일부러 아무런 힘이 없는 황제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때 후보에 오른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였다.

 

당시 마인츠 대주교와 호엔츨레른 가문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하고, 합스부르크 백작인 루돌프 4세는 이를 기회삼아 독일의 중요 가문들과 혼인을 맺으며 세력을 형성한다. 1273년 루돌프 4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되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루돌프 1세로 즉위하며 대공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루돌프 1세는 야심가였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십분활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루돌프 1세에게 눈에 띈곳이 바로 오스트리아 공국이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되어 오스트리아를 통치해 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시대의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루돌프 1세는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트리아 공국과 그의 형제국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하는데 이곳을 그의 맏아들인 알브레히트에게 주게 된다.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며 반란을 일으키는데,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된다. 이때부터 루돌프 1세의 사촌들이 각자 분가하면서 스위스 부근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서로 다른 독자노선을 추구하게 되면서 15세기에 이르러 단절되게 된다.

 

 

합스부르크가문 문양

 

 

가문의 성장

 

 

대공위시대에 왕위에 오른 알브레시트 1세가 사망한 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당시 유력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하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한동안 제위에서 배제되었으나 그들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기반을 더욱 탄탄히 다지는 기간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락적인 결혼 동맹으로 그들의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335년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1363년에는 티롤 후백국까지 획득하면서 현재의 오스트리아 영토의 근간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해 독일 남동부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제후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세력을 확장한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그 세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분할 상속을 통해 가문의 영지들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14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타이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후세를 얻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자,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가 황제 작위를 계승하면서 1438년 독일의 알브레히트 2세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알브레히트 2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제위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최대 전성기를 시작하는 합스부르크 가문

 

 

16세기에 이르어 합스부르크 가문은 최대 전성기를 열게 된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를 최초의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며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시키게 된다. 그렇게 황권을 안정적으로 구축 후 막시밀리안 1세는 결혼정책으로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연합인 스페인 왕국, 동유럽의 옹가른 왕국, 크로아티엔 왕국, 뵈멘 왕국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가문과 차례대로 혼인을 맺게 되는데 이들 가문들의 부계가 끊어지게 되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하게 되는 행운이 일어난다.

 

15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다시 되찾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라인강 유역과 알자스 등지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국과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부르고뉴의 공작이던 샤를이 외동딸만 남긴 채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남자 계승자가 없는 부르고뉴를 침공하며 마리 드 부르고뉴를 겐트 성에 가둬버리고 자신의 어린 아들과 결혼을 강요한다. 부르고뉴의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프랑스가 논독들이던 북해 연안 17주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바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와 강제로 결혼하며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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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사진출처-pixapay)

 

 

막시밀리안 1세는 그의 장남 필리프를 트라스타마라 왕조 카스티야 왕국의 후아나와 결혼시키고, 딸인 마르가레테는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결혼을 시키며 연합 스페인 왕국과 결혼 동맹을 결성한다. 또한 후계자였던 후안이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필리프와 후아나가, 그리고 둘의 장남 카를 5세가 물려받게 된다.

 

또한 막시밀리안 1세는 껄끄러운 관계였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던 야기에우워 왕조와도 결혼 동맹을 성사시키는데, 1438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었을 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위도 일시적이긴 하지만 차지하게된다. 막시밀리안 1세는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의 울라슬로 2세의 딸 언너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니난트, 안나의 동생인 러요시 2세와 손녀딸 마리아를 결혼시키게된다. 그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의 침공으로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단절되게 되는데,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스페인 가톨릭 부부왕의 손자이기도 함) 조상들의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당시가 외향적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카를 5세가 통치하는 카스티아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며 신대륙에까지 진출하면서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올랐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가진 가문이 되게 된다.

 

카를 5세는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된다. 이후 프랑스는 30년 전쟁을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되지만 100여년 동안 프랑스는 유럽의 약소국으로 조용히 지내게 된다. 당시 잉글랜드의 유명한 헨리 8세는 이들 사이에서 적당한 견제 속에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까지 간섭할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과 권력을 쥐게 된다.

 

아무 거칠게 없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도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종교개혁에 대한 부분과 오스만 제국이었다. 독일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오게 되는데, 독일인이 주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연으로 연결되었만 외국 군대 개념인 스페인군이 개입됨으로써 서로 간의 암묵적인 룰이 깨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독일의 제후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불신을 갖게 되고, 그 결과가 30년 전쟁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연방을 분열시키게 하였다. 또한 당시 최전성기를 맞이한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는 웅가른 왕국을 침략하게 된다. 이에 합스부르크는 여려 내전과 1529년 1차 빈 포위를 계기로 전 영토에 걸쳐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에 카를 5세는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적인 성공과 신대륙 개척을 통해 축적한 부를 통해 가문의 유산을 지키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 이후 계속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서서히 무너지게 되고 이후 연방 체제가 계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탄생과 쇠퇴기 그리고 중흥기

 

 

카를 5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본가인 스페인계 합스부르크와 분가인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된다. 또한 선거군주제였던 신성 로마 제국 또한 동생인 페리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카를 5세는 원래 신성 로마 제국 제위도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당시 독일 제후들의 반대로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카를 5세를 이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형에게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 동맹으로 보헤미아, 헝가리-크로아티아라는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페리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교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루터파에 관대한 정책을 펼친 막시밀리안 2세 이후 후계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 문제에 완강히 대처하게 되는데, 이런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이 '30년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게 된다. 이 전쟁으로 독일은 인구가 2/3으로 줄어들게 되고 국토는 완전히 황폐화되어 버린다. 그리고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북독일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지위 또한 명목상의 이름으로 남게 된다.

 

30년 전쟁 이후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18세기에 들어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된다. 1683년 오스만 제국고의 대튀르크 전쟁과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탈환하고,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점령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계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게 되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게 된다. 13년의 전쟁 끝에 부르봉 가문이 스페인 왕위를 가져가게 되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보유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후 '프랑스 대혁명'까지 100여 년간 점차적인 쇠퇴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18세기 다시 중흥기를 이룬 합스부르크 가문이지만 카를 6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한다. 카를 6세는 살리카 법의 위배임을 알고도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한다. 하지만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많은 반발에 카를 6세는 1736년 로트링겐 공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주었다.  또한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빈 조약(1738년)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계승하기 위해 상당 부분을 양보하게 되고, 결국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라므 공곡을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내주게 된다.

 

이러한 카를 6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망하자 주변 세력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계승을 반대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요제프 1세의 사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된다. 하지만 카를 7세가 짧은 기간 안에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일단 제위를 이어가게 된다.

 

 

마리아 동상(사진출처-pixapay)

 

 

18세기 후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또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대프랑스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패배 후 벨기에와 이탈리아마저 빼앗기게 된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한 후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등과 손잡으며 공동 전선을 결성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와해당해버리고 만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실패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랑스를 압박하면서 빈 회의를 통해 영토를 상당수 회복한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민족주의' 바람이 유럽을 뒤덮게 되고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된다. 그러면서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칸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다른 여러 제국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며 예전과는 다른 사회상을 띄게 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러한 민족주의 바람이 유럽을 뒤덮은 상황에서도 한동안 유지되었으나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보어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배하게 된다. 이 결과로 독일 내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고, 통일 독일에서 강제로 배제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에 이어 베네토 지역을 잃게 되고, 분가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영향력도 잃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몰락한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후 남쪽 발칸 반도로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보어전쟁으로 잠시동안의 우호관계를 독일과 맺고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준비를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당시 남쪽으로 진출을 준비하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끼어들게 되면서 발칸 반도는 복잡하게 돌아가게 된다. 이즈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게 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면서 드디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준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웅가른 왕국을 복원시켜 헝가리 왕위는 남아있긴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면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나라는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유럽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유럽의 가문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가문에 들 정도로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문으로 남아있게 된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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