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이 한반도에 세워진 이후 우리는 기억하는 역사(국가)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가령 우리가 백제로 알고 있는 온조가 세운 나라는 백제이기전에 십제국으로 당시 백제의 영토에 존재하였다. 역사가 기록으로 남기 위해선 우선 우리의 말과 글이 존재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역사를 기록하는 주체(국가)의 힘이 강성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전체의 0.01% 정도밖에 되지 않은 권력자와 정복자의 위인전일수도 있다. 소서노가 한반도의 집권세력이었다면? 고대 한반도에서 가장 잊혀진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소서노'이다. 예전에 한 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우리가 소서노에 대해서 알게 된 경위는 드라마 '주몽'을 통해서다. 하지만 드라마의 특성상 소서노는 철저한 조연으로..
어릴 때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지금은 우리 집 한채만 산꼭대기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경상도의 흔히 말하는 깡촌이고, 졸업한 국민학교는 내가 중학교 3학년때인가 폐교가 되었을 정도로 인구도 적고 놀거리도 없는 시골마을이었다. 그런 곳에서 내가 놀 유일거리는 서울에 계신 작은 고모가 보내준 각종 백과사전과 위인전을 읽는 것이었고, 그것이 내 독서의 시작이었다. 벌거벗은 한국사를 마무리하며 앞으로 내가 읽을 책들과, 내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과거의 나의 기록이 미래의 나의 관점과 얼마나 달라졌을지를 기록으로 남긴다. 가끔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조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않고 권좌에 오르지 않았다면 세종은 훈임정음을 창제하..
22편 중국에 이어 이번 포스팅은 대~~~ 충 알아보는 일본의 역사다. 구석기시대 일본에는 약 4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약 2만 년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이 되어있어서인류의 왕래가 이루어지던 일본 열도는 약 1만 년 전 대량의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대한해협과 쓰가루 해협등 일본을 둘러싼 해협들이 형성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에서 분리되었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의 일본은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시기에 인류가 일본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본은 섬이 되었다. 이후 일본은 약 12만 년 전 구석시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물이나 화석 등이 많이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은 판경계 특성상 지각 변동이 심하고 산성 화성암..
UN(국제연합)에는 현재 193개국이 등록되어있다. 국제 표준화기구(ISO)에 등록된 국가는 249개국이고, 국제축구연맹(FIFA)에 등록된 국가는 211개국이다. 2023년 8월 6일 US News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The world's most powerfull countries)에 2위에 중국, 6위에 한국, 8위에 일본을 선정하였다. 우리나라는 200개에 달하는 국가중 위아래로 2위 강대국과 8위 강대국사이에서 2,000여년을 버텨온것이다. 이번 포스팅은 대~~~충 알아보는 중국의 역사다. 구석기 시대 호모 에렉투스의 이동, 180만년전 ~ 130만년전 호모 에렉투스는 멸종한 인류의 한 종으로 '직립한 사람'임을 뜻한다. 호모 에렉투스가 중요한 이유는 다리가 길어지고 직립할 수 있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부터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단순히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나쁜놈 이전에 그가 계획한 명나라 정복과 조선 조성의 안일한 대처방식을 모두 알아야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는데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재란의 뼈아픈 과거를 그대로 잊어버린듯 결국 경술국치로 일본에게 조선을 빼앗기고 만다. 왜란당시 임금은 도망가기 바쁘고, 이순신 장군만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순국하였다. 나라가 잘 될수가 없는 구조였다. 일본은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조선의 문물을 매우 쉽게 흡수하였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이뤄지던 곳이다. 대마도에서 온 500여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며 그들은 조선과 왜와의 중간에서 교역활동과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왜관..
고려는 문치주의우선의 귀족사회였다. 지배층에 속하는 귀족과 하급관리들과 피지배층인 농민과 천민으로 이루어진 귀족중심의 사회였다. 고려가 귀족(호족)중심의 사회가 된데는 왕건의 삼국 통일정책의 일환인 그의 혼인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방의 각 호족들과 연맹을 맺기위해 그들 딸과의 혼인으로 왕건은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그의 이러한 정책으로 고려는 삼국을 다시 통일하게된다. 고려를 통일왕국으로 이끈 왕건의 혼인정책은 왕건 사후 고려 왕권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고려 건국의 일등 4대 공신 -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홍유는 통일신라의 호족출신으로 배현겸,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궁예의 휘하에서 활동했지만 이들 3인과 궁예를 몰아낸 후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앞장선다. 후삼국이 통일되..
신라의 풍습을 얘기할때 빠지지않는 주제가 바로 화랑과 골품제이다. 신라의 적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이 골품제라면 화랑은 신라가 삼국의 주인이 될 수 있던 근본이 되었다. 이번 포스팅은 귀산과 추항의 질문에 '원광법사'가 답하고 그에의해 정립된 화랑의 가르침 '세속5계'와 화랑들의 이야기다. 15세 관창, 죽음으로 백제를 섬멸하다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전장인 황산벌에서 신라의 화랑 15세 관창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계백을 목을 베고자하였다. 계백은 관창이 어린것을 알고 풀어주기를 반복, 관창은 끊임없이 홀로 계백을 죽이기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계백은 이제 백제가 망하겠구나 여기고 관창의 목을 잘라 신라진영으로 보낸다. 관창의 죽음으로 분노한 신라의 군대는 결국 계백의 5천 결사대를 전멸시키고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