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21. 선조는 도망가기 바빴고, 이순신은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순국 하였다(feat.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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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부터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단순히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나쁜놈 이전에 그가 계획한 명나라 정복과 조선 조성의 안일한 대처방식을 모두 알아야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는데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재란의 뼈아픈 과거를 그대로 잊어버린듯 결국 경술국치로 일본에게 조선을 빼앗기고 만다. 왜란당시 임금은 도망가기 바쁘고, 이순신 장군만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순국하였다. 나라가 잘 될수가 없는 구조였다.

 

 

일본은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조선의 문물을 매우 쉽게 흡수하였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이뤄지던 곳이다. 대마도에서 온 500여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며 그들은 조선과 왜와의 중간에서 교역활동과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원래 조선 초기에는 왜관에 가족을 동반할 수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금지되었다. 당시 대마도는 평지가 적고 농지로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적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섬으로, 조선 이전에는 해적의 근거지로 사용되는 등 일본에서도 등한시되는 섬이었다. 오히려 조선 초기에는 태종의 대마도 정벌로인해 일본보다는 조선 조정의 간섭을 더 받던곳으로, 일본과 조선사이에서 대마도는 부산을 통해 교역활동과 무역업으로 성장하던 곳이다.

 

 

부산 전포동 송공삼거리에서 송상현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송상현 선생

 

 

이렇게 일본은 부산에 설치된 왜관을 통해 조선의 문물을 쉽사기 받아들였다. 이는 일본인의 민족적 특성에도 기인하는바인데 자세한 내용은 후에 포스팅할 '일본 역사'편에서.....

 

 

일본의 입지전적인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극명한 평가(조선,명나라 vs 일본)

 

 

일본은 당시 센코쿠 시대의 다이묘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전국시대를 마감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으로 자결하게되고 그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다도 싸우다가 결국 자결하게된다. 이것이 '혼노지의 변'으로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다 노부나가 대신 권력을 움켜쥔 자가 바로 그의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역사에서 상당히 특이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입신출세하여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시킨다. 당시의 일본은 오래된 구체제가 무너지는 기간에서 히데요시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태합'의 자리에 올랐기에 일본인들의 평가는 매우 우호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철천지 원수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실질적인 장본인으로 조선을 피폐하게 한 장본인이며, 명나라(중국) 입장에서는 조선을 돕기위해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에 군대를 투입시킨결과 명나라 재정은 바닥나며 결국 멸망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신사의 오판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리한 전략,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이 당시 조선은 일본과 계속적인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통신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통해 임진왜란 전인 일본의 무로막치 막부 시기에는 통신사를 통해 조선에 공물을 받치고 교류를 하는 식으로, 통신사는 임진왜란 전까지 70여회에 걸쳐 서로 교류를 하였다. 물론 이런 통신사는 조선보다는 일본이 더욱 원했던 것으로 그들은 조선에 공물을 받치며 꾸준한 교류를 통해 당시 전국시대로 피폐해진 일본 영토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조선 입장에서도 일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통일된 정황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분석하고 있었을것이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정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조선은 황윤길과 김성일을 정사와 부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여 동태를 살피게한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이 둘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게된다.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의 야심이 매우 높아 그를 견제해야한다고 말한반면, 부사 김성일은 풍신수길을 깍아내리는듯 조선의 입장에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정도로 보고를 하게된다. 이후의 일은.... 뭐.... 다들 알고 있으니....

 

물론 김성일의 반론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는 황윤길이 너무 과장되어 보고하는것이 민심을 동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풍신수길에 대해서 두려워할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반론하였다. 누구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고 올바른 주장인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를테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사진출처 - 위키백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황윤길과 김성일이 돌아간 후 조선의 정세를 좀 더 면밀히 파악하였고, 이윽고 결단을 내린다. 그는 명나라를 정복하고 조선을 굴복시키기위해 1592년 16만의 군대를 출정시킨다. 당시 그는 조선 침략의 이유로 명나라로 가기위한 길을 열어달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대관계에 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원인을 이처럼 명나라 정복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하지만 실제 당시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면 많은 원인들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나 일본의 통일전쟁 과정에서 공을 세운 다이묘들의 공신 책정과정에서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위해 내부 갈등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는 부분은 참고할만한 주장이다. 도요툐미 히데요시는 후에 명, 조선과의 강화조건에서 명나라의 후비를 일본에 받치라는것과 조선팔도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주장을 하게된다. 그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단순한 공명심을 벗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력 다이묘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해외무역권의 장악, 그리고 도요토미 정권의 불확실성으로인한 정권안정의 목표등 여러가지 당시 일본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판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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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일본의 한양 진격과 선조의 의주까지의 도망.. 누가 더 빨랐을까?

 

 

그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1592년 음력 4월 부산으로 진격하게된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고니시와 가토는 서로가 종교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견해에서 서로 대책점에 있던 인물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둘을 경쟁시켜 최대한 빠른 시일에 조선을 점령하려고 계획하였다. 물론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대 정적인 도쿠가와 이에아스와는 전략적 파트너로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조선 침략전쟁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일본내에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군사적 협정을 맺는다. 이렇게 내부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쿠가와 이에아스와 협정을 맺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에 몰빵할 수 있게된것이다.

 

아래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후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그냥 도망이라고하자..ㅠㅠ)한 기간을 어느 블로거(?)분이 정리한 내용인데 텍스트만 따로 정리해보았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진성 상륙, 4월 15일까지 부산진성, 동래성 함락. 동래부사 송상현 

 

1592년 음력 4월 18일 밀양 입성, 동래성과 밀양읍성까지 거리 43.8km

 

상주에서 탄금대까지 66.9km 3일만에 돌파, 신립 장군 탄금대에서 배수진으로 사망. 선조의 파천 결정

 

1592년 음력  4월 30일 선조 한양을 탈출, 5월 1일 개성 도착. 2일간 58km이동

 

일본 탄금대에서 한양까지 103km 4일만에 돌파, 1일 26km 진군

 

선조는 개성에서 다시 평양으로 4일만에 136.4km 도망, 1일 34.1km 도망

 

선조 다시 평양에서 6월 13일 영변에 도착, 1일 43.7km 도망

 

선조 다시 영변에서 출발하여 6월 22일 의주에 도착, 12km를 9일간 1일 평균 13.5km 도망

 

일본의 한양까지의 평균 진격 속도 1일 16.61km 

 

선조가 한양에서 의주까지 간 평균 도망 속도 1일 30.1km (왜 파천이라 하는것이냐)

 

이 내용을 보면 선조는 일본이 한양으로 진격한 속도보다 거의 2배 가까운 속도로 의주로 튄것이다.. -_-;; 1일 30km라고 하는것이 지금 시대에도 1일 30km씩 이동하라고해도 상당히 힘든 거리지 않을까. 특히나 이때 당시 선조는 가마를 타고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 자꾸 내 조국, 내 나라 임금을 도망이라고 표현하니까 좀 그렇긴 하지만... 뭐.. 그렇다...ㅠㅠ

 

 

심유경의 강화밀약, 히데요시의 항복표문을 위조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명나라는 당시 상황을 심각하게 보진 않은듯하다. 일본이 명나라 본토까지 정복전쟁을 할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조선을 도와 일본의 진격을 막게끔하면 끝날 수 있는 쉬운 전쟁(?)으로 보였던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명나라의 군대가 투입된 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었고, 명나라는 명분만 있고 실리는 없는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하였다.

 

명나라는 이에 심유경을 일본군에 보내어 전쟁을 끝마치려하였다. 일본도 당시 보급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중 명과의 협정에 나서게된다. 8월 29일 심유경은 평양에서 고니시를 만나 강화조건을 주고받으며 50일이내로 각국의 구체적인 조건을 전달하기로 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않기로 하고, 조선군도 남쪽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심유경이 일본군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영에 들어간 후 2~3년간 지속적으로 왕래하였으나 협정을 결렬되고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협정조건으로 명나라에 대하여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것과 조선팔도중 4도를 할양할것,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인을 인질로 삼을것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으로 명나라의 허가를 얻게된다. 1596년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인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반발하며 사신을 다시 돌려보낸뒤 다시 조선 침략을 계획하였다. 심유경은 명나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면서 오랫동안 결론을 내지못한 협정은 결렬되게된다.

 

 

정유재란 발발

 

 

심유경의 거짓된(?) 활약으로 잠시 주춤했던 일본의 조선 침략은 정유년 다시 발발하게 된다. 이것이 정유재란으로 흔히 우리가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왜란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의 기간을 모두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일본 입장에선 명분을 앞세웠기에 조선을 침략하더라도 조선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말 그대로 조선은 일본 입장에서보면 명나라로 가는 교두보였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쟁에서 가급적 많은 피해를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조선 백자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백자 광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은 다르다. 글쓴이가 다른 포스트에서도 한 번 밝혔듯이 정유재란은 흔히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이 당시 일본은 작정하고 조선을 쓸어버리기로 마음먹은듯하다. 그 중심에서는 조선의 뛰어난 도자기 기술도 있었는데 당시 일본은 정유재란을 일이키면서 조선의 수많은 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납치해가게된다. 아울러 당시 조선의 영토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리게되는데.. 1차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곡창지대로 일본입장에서도 그곳은 폐허가 아닌 자신들의 보급로로 유용한 곳이기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정유재란 당시에는 조선팔도 전역이 폐허가 변해버리고만다.

 

 

성웅 이순신 노량에서 전쟁을 끝내다

 

 

그렇게 조선은 일본의 침략으로 영토뿐만이 아니라 모든것이 허물어저버린다. 임진왜란 전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면서 군대를 증강시켜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국가 재정은 군을 증강시키기는 커녕 유지하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결국 조선을 구한건 선조인 임금과 위정자들이 아닌 스스로 봉기한 의병들과 권율, 김시민, 이순신을 비롯한 일부 장군들이었다. 특히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방어전)과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방어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대첩(추격전)은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며, 실제 조선이 망하지 않고 의병들의 합세로 일본을 물리친 최대의 대첩으로 알려져있다.

 

 

노량-죽음의 바다는 지금 상영중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동향은 서애 류성룡에 의해 발탁되지만 관운은 별로 없었던듯하다. 특히나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이순신 장군은 23전 23승이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일부 연구결과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이 23전 23승이 아니라, 43전 38승 5무라고 주장하기도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시기 해전 횟수가 47회이고 이순신 장군이 참가한 해전이 43회이다. 후에 난중일기와 선조실록등을 검토한 결과, 실제 이순신 장군의 전적은 43전 38승 5무라고 주장하게되는데 뭐.. 잘은 모르겠다.. 아무튼 이래나 저래나 이순신 장군이 짱이다.

 

 

이순신 장군(사진 출처 - 나무위키)

 

 

1597년 일본은 직산 전투와 명량 해전의 패배로 육로와 수로가 모두 끊어져버리게된다. 이에 일본 다이묘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남해안 부근에 왜성을 쌓고 방어진을 구축하게된다. 그런데 1598년 9월 갑작스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게된다. 이후 조선에 주둔한 다이묘들은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철수하게된다. 하지만 조선 입장에서 일본이 안전하게 철수하게 내버려두면 또다시 침략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 있는바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박살내고자 하였다. 그렇게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의 협공으로 일본 수군을 박살내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노량해전'의 시작이다.(12월 20일 영화 '노량'이 개봉합니다!!!!)

 

1598년 12월 노량에서 관음포로 향하는 일본 수군을 격추하던 당시 조선 1군의 전라좌수영의 다수 장수들과 최고 지휘관이었던 이순신 장군이 사망하게된다. 이때 이순신이 유언을 남기는데 바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였다. 서애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을 보면 당시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고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라고 전했다고 알려진다. 당시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이순신의 전사 소식에 남은 장수와 병사들이 분기탱천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대장선에 동승한 송희립 장군(영화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나오죠^^) 역시 이때 부상을 입은 기록이 있다고 하니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 사후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이 예가 당황하자 군사들 역시 어찌할바를 몰랐다. 이에 손문옥이 예를 어루만지며 이순신 장군의 시체를 가리고 사기를 북돋아 진격하였다고 전해진다.

 

노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300여명이 전사하였고, 일본 수군은 2만 3천여 수군중 절반의 군사와 전선 350척 가운데 200척이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100여척은 모두 나포하였다.

 

 

 

1) 일본이라는 표현은 701년 당나라로 간 사신이 '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라가 해가 뜨는곳에 가까워 '일본'으로 하였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왜'인은 일본의 열도 남서부에 위치한 고대 부족 국가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ps1)

지금 글쓴이가 이 글을 쓰고있는 날짜가 2023년 12월 20일이다...-_-;; 바로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가 개봉하는 날이리도 하다..원래 오픈런으로 개봉 당일 영화를 보려고했으나 나의 게으름으로 24일까지 예매하였다..ㅠㅠ 처음 계획은 영화 개봉에 맞추어 이 글도 발행하려고 했지만 어찌하다보니 아마도 발행은 영화가 개봉된 후 12월 26일 될듯하다. 한편으론 궁금하긴 하다. 영화에서 이 노량해전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노량해전이 한산도대첩에 묻혀서(?) 그렇지 당시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 해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뭐.. 영국의 넬슨 제독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이순신 장군이라고 하니까....넬슨 짱이다... ㅎㅎㅎ

 

ps2)

1907년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는 가능하지만, 이순신 제독과 비교하는건 불가하다. 그는 신의 경지에 오른 분으로 나를 그런 분과 비교하는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오롯이 군신으로 존경받을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이 유일하다'라고 하였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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