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여행 -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 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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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네번째 서대문역 지하철 여행.. 경교장으로... 역시 홀로여행이다 ^--^ 

 

 

경교장의 이름은 예전에 들어본 기억이있다. 단순히 백범 선생의 거주지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그 보존상태나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을 해본적 없다..

요즘 나의 여행지 버킷 리스트에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까칠양파님의 추천아닌 추천과 가고 싶던 서대문역.. 두 가지의 교집합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경교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래 포스팅은 내가 경교장을 방문하기전 참조한 까칠양파님이 2015년 작성한 경교장 포스팅이다..

 

3·1절 시리즈 6화 - 경교장 京橋莊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33)

대한민국 초대정부 대통령은 김구선생, 부통령은 이시영선생, 외교부장관은 안창호선생, 국방부장관은 안중근의사, 교육부장관은 윤봉길의사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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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경교장을 찾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위치가 분명히 표시되어 있는데 거기가 강북 성심병원이어서 살짝 당황했다.

성심병원 주차장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조금 이상해보였다..

자세히 보니 병원건물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아보이는.. ㅎㅎㅎㅎ

그곳이 경교장이었다.

 

백범 김 구 선생

 

백범 김 구 선생의 삶

 

백범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선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어야한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지금은 동학 혁명, 동학 운동으로 불리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난'이었다... 지금도 많은 학술지나 인터넷에서 '동학난'으로 소개되어 지기도 한다.

동학 혁명은 조선의 근대화과정에서 임오군란, 갑신정변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일련의 농민 중심의 사회 혁명이지만 그간 상당히 저평가 되어 왔고, 이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백범 선생역시 동학군에서 그의 10대 후반을 보내며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정했을 것이다.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

 

일부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왠지 분위기에 맞추어진(?) 어두운 색감이 왠지 조금은 더 장엄해보이기도하고.. ㅎㅎㅎ

 

 

 

경교장과 함께한 사람들

 

 

 

 

 

김 구 선생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매우사(?) 신부에게 건네준 태극기라고 한다. 바탕에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한 김구 선생의 친필 묵서가 담겨있는 귀중한 물건이다.

 

 

김 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저격당시 입으셨던 의복이다.

 

백범 샌생의 유묵 '신기독'

 

신기독... 홀로 있을때에도 삼가다.....대학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김 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와 시계에는 먹먹한 이야기가 있다.

윤봉길 의사가 김 구 선생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면서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전의 일이다.

홍커우 공원의 의거가 결정된 후, 윤봉길 의사가 김 구 선생의 시계를 보는데 그 시계가 매우 낡았다고 한다..

그래서 윤봉길 의사가 자신이 가진 시계와 김 구 선생의 시계를 바꾸자고 하였다..

김 구 선생은 젊은 윤봉길 의사가 더 좋은 시계를 차야한다며 거절했지만, 윤봉길 의사는 자신의 시간은 이제 멈추지만 선생님의 시간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며 선생의 시계와 맞바꾸었고 김 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나의 낭만이라고 하기에는 그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너무나 안타깝고 숙연해지기에....

 

백범일지와 그 외

 

백범의 인장

 

 

서산대사의 선시 '답설야'

 

한동안 이 글귀앞에 서 있었다.

 

서산대사의 선시로 알려진 '답설야'는 백범 선생이 평소 자주 인용하던 글귀라고 한다. 사명대사의 글귀로도 알려져있지만 이 글은 유정 사명대사의 스승인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다.

 

 

경교장은 원래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금광(金鑛)으로 벼락부자가 된 친일 기업인 최창학의 개인 소유 자택이었고, 본래는 '죽첨장(竹添莊)'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었다.

당시 최창학의 성격상 친일(親日)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친일파 소유주 건물로 등록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인 1945년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하게 되면서 분위기를 파악한 최창학이 잽싸게 헌납을 하게 되고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거처지로 지정됨에 따라 김구의 개인 사저로 바뀌게 되었다. 이름도 왜색(倭色)적인 분위기가 짙은 죽첨장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경교(京橋)'는 '경구교(京口橋)' 라는 서대문 근처에 있었던 다리의 줄임 명칭이다.

백범 선생 사후 다시 최창학에게 돌아갔지만 그 이후 주중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 삼성 이병철 회장이 최창학의 후손에게 건물을 사들려 삼성계열인 성심병원의 병원현관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복원 전 1층 임시정부 국무회의실(귀빈응접실)은 원무과로, 2층 집무실은 야간 당직의사 휴게실로 쓰여 원형을 잃었으며 경교장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로는 표지석밖에 없었다.

 

 

 

경교장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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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u.wiki

 

경교장 연대기 1
경교장 연대기 2
경교장 연대기 3

 

경교장의 복원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 이 팩트를 인정하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서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기 직전 귀국에 대한 감회를 적은 것이다.

화평과 건국, 자강등의 구호가 적혀있다고 하는데, 내가 한자를 잘 모르니... ㅠㅠ

 

 

 

 

백범 '나의 소원'

 

'나의 소원'은 백범일지의 말미에 있는 글이라고 한다. 난 아직 백범일지를 온전히 읽어보지 못했고 이번 경교장 방문을 통해 일부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해드린다.

 

 

응접실 1
응접실 2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

 

 

백범 선생의 거실이자 집무실

 

 

백범의 죽음
백범의 죽음

 

백범 선생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백범을 죽인 안두희는 당시 포병 장교로서 죽을때까지 백범 살인의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않았다.

위 글에 쓰여진것처럼 안두희를 국군의 포병 소위를 우선순위로 볼지, 주한 미군 방첨대인 CIC 요원을 우선 순위로 둘지는 아직도 해석이 불명확하다.

어찌보면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게 백범 선생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을것이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통해 남한만이라도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계획에 이승만 박사를 내세웠지만 그 때 당시 민심은 이승만 박사보다 백범 김 구 선생과 해공 신익희 선생 등 민족주의 운동을 진행한 지도자들을 더 지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안두희의 김 구 선생 저격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에 그 당시 정부에서도 정확하게 이유를 밝히지 못했고, 이는 후에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에서도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다. 안두희는 김 구 선생 저격후 구속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석방 후 군에 복귀하였고, 예편이후에는 군납공장을 차려서 돈 많이 벌고 죽을때까지 잘먹고 잘살았다고 하면 참 세상이 비참하지만 안두희 역시 자택에서 버스기사가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죽었다. 인과응보라고했던가.. 예고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걸맞는 죽음정도는 될것이다.

 

백범 선생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렇게 자세하게 공부도하고, 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요즘.. 나름 보람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다...

좀 더 어릴때 이런 생활을 했더라면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내 삶을 풍족하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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