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사여행 - 국립 4.19 민주묘지에 위치한 [4.19혁명 기념관]
- 여행과 맛집/곰돌이의 여행
- 2023. 4. 20.
4.19혁명 기념관
서대문역에 있는것은 4.19 혁명 기념 도서관이고, 여기에 있는 것이 4.19 혁명 기념관이다.
백의민족이라서 건물은 백범 기념관도 그렇고 다 하얀색인것일까...(합리적 의심이다...)
이때까지만해도 맞을만한 봄 비가 내렸던 것이다... ㅠㅠ
아래 포스팅은 사진의 순서대로, 그리고 나의 기억에 맞추어 몇글자씩 끄적여본다..(틀린 부분은 댓글로...^^)
아래는 1층을 둘러보며 위 문구처럼....그때의 그들의 몸짓과, 소리... 바람을 들어보고자 한다..
[서 론]
(서론은 오롯이 나의 생각이다...상당히 길다... 안읽고 그냥 화면을 꺼버려도 상관없다.. -_- v)
꿈에 그리던 8.15 광복을 맞이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무정부상태였다.
백범 김 구 선생을 비롯해 상해 임시정부 세력은 독립국가의 지위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백범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것이다.
이 당시 세계는 미국, 영국과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대립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정면으로 대립하던 시기다.
미국의 입장에선 동북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기위해 반드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건 미국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 아닌, 미국을 위한 결정이었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이러한 결정을 반대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상해 임시 정부 조직이 무엇인가 세력을 갖추기엔 그 당시 상해 임시 정부 세력은 하나의 세력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았다.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뭉친 의로운 세력이기에 거기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과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양분하고 있었다. 또한 백범 김 구 선생처럼 오롯이 민족의 자주통일만을 위한 민족주의 계열도 함께 하였다.
이들은 독립 후 자연스럽게 세력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대한 광복 후 상해 임시 정부는 국가 건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틈을 타 자연스럽게 권력을 잡은것이 바로 이승만이다. 물론 이승만 역시 상해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 상해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진행할때 하와이에 있었다... -_-;;
물론 하와이서 해외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어떤 자료에도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인전빼고... >.< 우리는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처음 탄핵을 당한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초대 임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쓴 이유로 탄핵을 당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를 두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로 탄식하였다고한다.
물론 이 위임통치 청원서는 여러 다른 비하인드가 있지만 그건 접어두고... 이승만은 이렇듯 미국에 구애를 했지만, 미국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실제 이승만보다 여운형 박사를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염두해두고 있었다.
미국이 이승만이 아닌 여운형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첫번째 이유는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일주의자였고, 여운형은 보다 유연한 실리주의자였다. 또한 이승만의 권력에 대한 집착욕도 한 몫했을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의 묵인하여 남한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게되었고, 이들이 바로 자유당의 시초가된다.
그리고 이 자유당 세력은 흘러 흘러 지금의 국민의 힘에 이르렀다.. ㅠㅠ
내가 이승만을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된다. 이 사람이 독립운동을 게을리해서도(?), 아니면 권력욕이 강해서도 아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본성이 악하고 이기적이기에 본인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 단순히 이것을 욕할 수 는 없다...(맹자가 그랬었다.. 인간은 악하다고.. -_-;; 그러기에 교육이 필요하다...)
내가 이승만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런 단순한 인간에의 본성때문이 아닌 그의 극 반일주의적이었던(!!!!) 성향때문이다.
그렇게 일본을 싫어했던 사람이 권력을 잡고 첫번째로 한 일이 바로 자신의 모든 친위세력을 친일파로 구성해버린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과 가치관이 끝나버린건 태종 이방원이 삼봉 정도전 선생을 죽임으로서 조선의 '민본'은 끝나버린것이며 남한에서 이승만이 권력을 잡은 순간, 2005년 '친일반민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족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나라를 뒤찾은 후 다시 그 일본에 기생했던 자들이 반세기이상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세력이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 친일세력은 우리나라 권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머지 절반의 세력이 무조건 옳다는건 아니다...>.<)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필연적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할수도, 운영할수도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세력을 잡은것이 아니니 당연히 권력은 보수적인 독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4.19 혁명 후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한다... 그리고... 하와이로 망명한다... -_-;;
어떻게 이런 사람을 국부로 만들 수 있는가...
서론이 길었다.. 역사에 if는 없지만 대한민국 초기 정부 수립과정에서 백범 선생이 조금만 양보하여 남한 정부 수립을 찬성했다면... 선생님이 이승만의 반만이라도 권력욕이 있었다면....김일성이 조금만 덜 떨어져 북한을 장악하지 못했더라면....
이거 했더라면.. 저거 했더라면... 최소한 4.19 혁명이 일어났더라도 진영숙 학생같은, 서현무 학생같은 젋디 젊은 어린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총탄에.. 고문에..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냥.. 의미없는 가정이다....ㅠㅠ
쓰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여기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를 엿보고자 한다....
1960년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던 시기다. 국민은 전쟁의 폐허에 살기위해 몸부림쳤고, 자유당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이다.
'사사오입'은 이때 등장한 괴상한 산수법이다.. 0에서 4까지는 버리고 5에서 9까지는 반올림하여 인정한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이거 인정한 법률가.. 서울대생이다...(물론 모든 서울대생이 이렇다는건 아니다....-_-;;)
이렇게까지 '사사오입'으로 통과시키려던 법률은 이승만의 대통령 연임 제한 면제였다. 이 당시 대한민국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은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연임까지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욕심쟁이 이승만은 죽을때까지 대통령해먹겠다고 이 연임 제도를 초대 대통령인 자신에 한해서 면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가 80이 넘었을것이다...
집권세력이 이러할진대 정치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다.
자유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당시 이승만의 재산은 5억환, 이기붕 부통령의 재산은 15억환이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 환율로 계산하면 대략 92억원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나라 재벌의 시초는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시작한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우리나라 재벌들도 함께 승승장구하지만, 그 시작은 자유당 시절 정권에 빌붙어 살아남은 자들이 재벌이 된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이뤄지기 시작한건... 애석하게도 박정희 정권인 1970년대부터이지만 이 시기부터 조금씩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하지만 이 당시 정부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에 대한 구제능력이 전혀 없었고, 국민들은 피폐해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3.15 부정선거는 자유당 정권의 야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4.19 혁명은 단순한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혁명이 아니다.
정부는 국민들이 바라는 것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것이 아닌 해줄 생각이 없었고, 국민은 이러한 상황에서 더이상 먹고 살기 힘든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4.19는 누군가가 얘기했던 것처럼 개인 한 사람의 의로운 거사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꾸기 위해 그 당시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인 것이다. (4.19 혁명을 세계 4대 시민혁명으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김주열 열사... 진영숙 학생은 이 김주열 열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녀 역시 자신의 목숨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기꺼이 동참하였다.
최소한 이때의 대학생들은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아니다.. 이러면 지금의 대학생은 뭐가되냐... ㅠㅠ(대학생 화이팅이다..)
한동안 '저는 1944년생 입니다'라는 문구를 곱씹어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1947년생이다.... 그냥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마산과 대구, 부산이 대표적이지만 전국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 실질적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모두가 혁명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정말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나....
결국 대한민국을 일으켜세우는건 권력자나 재벌이 아닌 그냥... 국민들이다....
다시 한번.. 고인이 된 분들의 넋을 기립니다....
경무대는 현재 청와대가 세워진 장소에 조선시대에 붙여줬던 이름이다. 이때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곽영주였다.
원래 그는 일제강점기때 경찰이 되어 구 일본총독의 관사 경비업무를 보다가 이곳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경무대가 되는 바람에 곽영주도 경무대 경찰서에 근무하였다고한다..
드디어...하야... 한국전쟁때도 라디오뉴스로 서울 괜찮다고 구라치고 본인만 대전으로 도망치더니.. 도망치는것도 모자라 북한군이 쫒아오지 못하게 한강다리까지 폭파시켜버리더니... 이제서야 하야를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간다.
2층은 그들을 공감하고 기억하는 공간이다.
4.19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튀르키예 역시 독재정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일본은.... 뭐.. 그렇다고한다... -_-;;
'자유를 다오.. 다른 생명이 또 필요하다면 나도 여기 가슴을 벌리고 있노라'
유창범(당시 중앙대 1학년)의 '피를 태워 날은 밝았다' 중에서...
중앙대학교는 그 당시 서울대학교와 더불어 4.19 혁명당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의 4.19 혁명역시 위 혁명들과 함께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려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가장 처절하지만, 가장 아름답게 기록되어야할 시민혁명이다. (다시한번 4.19 시민혁명을 세계 4대 시민혁명으로 !!!!)
일부러 안보이게 찍었다.. -_-;; 물론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도 계셨지만 그냥 이렇게 찍고 싶은 심술이 발동하였다..
어떤 글이 있을까.. 내심 궁금하였다...(이 와중에...ㅠㅠ)
최소한 이때만 하더라도 민족 고대로 불릴 수 있었다.
하.. 이놈의 빗방울... -_+;;
기념관을 나오자.. 어째 빗방울이 더 굵어져있다....묘역을 먼저 갔어야했나... ㅠㅠ
음... 드디어 끝난건가....-_-;;
4월 19일을 기념하여 드디어 포스팅이 끝났다.....(대한민국 만세 !!!!)
지금 시간이 새벽 3시를 향해가고 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나 뭐하고 있냐... >.< )
일단 지금은 먼저 잠을 청해야한다... 나 아직.. 몸살기운이 있다...ㅠㅠ .... 이런 뚱땡이 비실비실.... zzzzz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