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고, 여성의 삶은 그냥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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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내가 '시집가다'라는 표현에 이상하게 꽂혀버린 두 여성에 관한 포스팅이다.

왜 꽂혔는지는 모른다..ㅠㅠ 그냥 꽂혀서 쓰다보니 포스팅을 2개를 끄적거렸고.. 오늘 포스팅은 그 주인공인 두 여성의 삶 이야기다.

 

 

S는 1504년인 연산 9년 출생하였다. 평산이 본관으로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집안이다. 부모가 그렇게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할 정도로 명문가 집안이었다. 외가 역시 노비가 100명이 넘을 정도로 재산이 상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시, 서, 화에 매우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인 안견의 그림을 따라 그릴정도로 어릴 때부터 다재다능했으며, 후에 송시열은 그녀의 그림에 발문을 할 정도였다.

 

H는 1563년인 명종 18년에 출생하였다. 역시 강원도 출신으로 양천이 본관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아버지의 호는 '초당'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강원도 초당 순두부의 초당이 그가 살던 곳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사성, 동부승지를 역임한 당시 최고의 명문가 집안이었다.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시, 서, 화에 능통했고 특히 그녀의 시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유명하였다고 전해진다.

 

S는 덕수 이씨 집안의 자제와 혼례를 올렸고, 이름은 이원수이다. 덕수는 충무공 이순신의 본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편의 능력은 그리 출중하지 않았던 듯하다.  본인의 집은 가난하였고, 벼슬에 나가지 못하여 친척인 당시 세도가 이 기를 찾아다니고 하였다.

이는 S의 아버지가 일부러 그녀의 남편을 그런 인물로 골랐다는 설이 전해진다. 당시 그녀의 집안과 비교해 남편인 이원수의 집안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너무 초라하였고, 아버지는 일부러 그런 집안을 골라 그의 딸을 시집보내게 된다.

그런 이유로(?) S는 결혼 초기 친정에서 생활하였고, 시집을 가서도 그 흔한 시집살이 없이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조선에서 비로소 여인은 시집을 간다는 표현이 나온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그 어떤 문헌에도 '시집가다'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집안의 능력(?)에 따라 충분히 시집살이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H는 안동 김씨 집안의 자제와 혼례를 올렸고, 이름은 김성립이다. 역시 김성립도 자신의 능력은 대단치 않은 걸로 보인다. 매번 과거시험을 준비한다고 구라(?) 치고, 기생집을 드나들었고 그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 자신의 아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고부간의 갈등이 심하였다.

H집안 역시 대단한 집안이었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에까지 간섭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큰 오빠가 그녀의 능력을 아낀 나머지 틈틈이 그녀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지만 그의 집안은 그녀가 결혼 후에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켜보았다. 물론 그 끝은 안타깝게도 27세에 그녀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S는 4남 3녀를 두었다. S는 죽음을 앞두고 남편인 이원수에게 자식이 7명이나 있으니 다시 장가들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시대의 여성상을 봤을때는 상당히 파격적인 유언이다. 

하지만 이원수는 부인과 사별뒤 3년상도 치르기 전에 첩이었던 여인을 후실로 들이게 된다. 그의 3남은 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후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그대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승려로 지낸 1년여는 그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불편한 이력이 된다.

그녀가 후대에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바로 그의 3남 덕분이다.

그의 3남은 명종 말, 선조 초 조선시대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 성장한다. 그는 붕당과 관계없이 당시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던 퇴계 이황, 성 혼등과 교류하며 그의 학문적 스펙트럼을 넓혔고, 그의 사상은 율곡학파로 후대에 명명되어 300여 년간 조선시대 붕당 정치의 지렛대가 되었다. 그의 정치적 목표는 동인과 서인의 화합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조선은 선조 이후 붕당정치로 서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조선이 붕당정치가 극에 달했던 것이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예송논쟁'때문이다. 도대체 성리학의 예법이 얼마나 중요한것이기에..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때 어머니나 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는지가 왜 그렇게 중요했었나.. ㅜㅜ

이런 지리한 논쟁을 하기전 백성들의 농사생활에 좀 더 집중하였더라면 최소한 조선 후기에 평민들이 그렇게 몰락하진 않았을것이다.

 

H 역시 김성립과 사이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하지만 두 자녀는 성장도 하기 전에 죽어버리고 만다.

김성립 역시 그녀와 사이가 그렇게 좋진 않았던 듯하다. 그도 그럴 듯이 김성립은 항상 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고, 앞서 말했듯 시어머니와의 사이도 좋지 않아 그녀의 시집살이 역시 순탄치 않았다.

 

포도도

 

위 사진은 S의 가장 대표작인 '포도도'다. 어린시절 국사 교과서에 있던 바로 그 그림이다. 이 당시에는 조선 초기 안 견의 영향으로 풍경화가 당대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S는 풍경화보다 포도 같은 과일과 곤충들을 그리며 세밀한 표현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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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의 친필과 그림 - 아버지와 행복한 한 때

 

위 그림은 H의 친필과 그녀의 어린 시절을 표현한 그림이다.

 

아래 시는 그녀가 딸과 아들을 여의고 난후 그녀의 슬픔을 표현한 시다.

 

哭子 곡자

去年喪愛女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蕭蕭白楊風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紙錢招汝魄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尊汝丘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應知弟兄魂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夜夜相追遊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縱有腹中孩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浪吟黃臺詞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血泣悲呑聲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S는 후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대한민국의 국정 교과서는 그녀를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상으로 묘사하였고, 우리나라 모든 여성은 다 그녀를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삼아야 했다.

그녀는 죽기 전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남녀칠석부동석인 나라에서 말이다..

그녀가 후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아들이 너무나도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그의 학통을 이은 송시열은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였기에 그의 정치적 스승의 어머니를 칭송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노론은 서인과 더불어 조선 후기 붕당정치 최대 계파를 형성하며 조선말기까지 이어지고 조선의 마지막 거대 붕당 세력을 형성한다.

참고로 나의 최애(?) 조선시대 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와 반대 세력인 소론이자 남인으로 그의 천재적 재능은 정조의 사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고, 그를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인생은 끝나게 된다. 

S의 3남은 왜의 침략에 대비해 '십만 양병설'을 주창한 율곡 이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왜는 1592년 조선을 침략하는 왜란을 일으킨다. 1차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항상 그러하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H는 자신의 시와 그림을 죽기 전 그녀의 남동생에게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으로 남겨, 그녀의 사후 실제로 그녀가 남긴 작품은 거의 소실되었다. 하지만 천재인 그녀의 남동생의 기억 속에 남아 일부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조선보다는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우연히 그녀가 쓴 시집을 읽고 그녀의 필력에 반해 그 시집을 중국으로 가져가 당대 중국의 문장가들에게 대서특필(?)되며 베스트셀러를 기록한다. 이러한 그녀의 시집은 중국을 거쳐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를 일으킨다.

H가문은 그녀의 남동생이 능지처참 당하면서 멸문의 길로 들어선다. 1618년 광해군 10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의 남동생 심복인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고, 그의 남동생은 동료들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 당하였다.

H의 아버지는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조선 최초로 붕당이 형성될 때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로까지 추대된 허 엽이다.

H의 큰 오빠는 동인의 선봉장으로 당시 실세인 병조판서 율곡 이이를 탄핵하여 유배되었다가 유배가 풀린 후, 벼슬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거절하고 춘천등을 유랑하다 마지막에 금강산에 들어가 병사한 허 봉이다.

H의 남동생은 서애 류성룡에게 학문을 사사하였고 당시 최고의 돌아이(?) 천재로 소문난 이 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그는 성리학이전에 도교와 불교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그의 봉건주의를 비판하는 개혁적이고 평등한 사상은 소설로 완성된다.

그는 조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 균이다.

허 균의 머릿속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편찬한 그의 누이 난설헌의 유고작이 바로 한류의 원조 !!!! '난설헌집'이다.

 

누구나 알듯... S는 사임 신 씨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

'사임'이란 호는 13살 때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겠다고 하여 그녀가 직접 지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임당이라고 알고 있는 이유는 후대에 그녀가 여자임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의 '당'을 붙여 사임당이라고 부른 것이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이 나와있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으며, 1990년경 위인전을 출판할 때 출판사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이름을 신인선이라고 하였는데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사임당 신 씨를 이 시대의 현모양처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의 아들인 율곡 이이 때문이다.

물론 사임당 신 씨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율곡 이이가 후대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 역시 훌륭한 아들을 키운 어진 어머니로써 칭송받는 것이다. 이는 앞서 얘기했듯 율곡 이이의 정치적 제자인 송암 송시열에 의해 더욱더 크게 부각되었다.

그 당시 조선에서 여인의 몸으로 시, 서, 화에 능했다는 것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주기는 한다.

그녀가 오만 원 화폐의 주인공이 된 이유도 상당히 이채(?)롭다. 당시 화폐의 모델(?)을 누구로 할 것인지 갑론을박이 이루어졌는데, 이제 여성도 전면에 등장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자연스레 사임당 신 씨가 거론되었다.

왜일까.. 오천 원의 주인공이 율곡 이이여서일까.. -_-;;

하지만 당시 진보적 여성단체에서 '화폐의 주인공이 여성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여성인가가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비판하였다.

현모양처의 표본인 사임당 신 씨. 현모양처는 어진 어머니이자 착한 아내라는 뜻이다.

율곡 이이를 키워낸 것을 보면 어진 어머니인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죽기 전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의 성격이 착한 아내인지는 모르겠다. 죽으면서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유언한 것이 착한 아내인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난 이 유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착한 아내보다 강단 있는 아내가 더 나은 표현 아닐까...

우리는 '착하다'라는 뜻을 왜곡하여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에 강단 있는 여자라... 뭐... 칭송받을 순 없을 것 같긴 하다.. ㅠㅠ

 

H는... 예상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선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칭송받는 난설헌 허 씨이다.

우리가 허난설헌으로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허초희다.(옥혜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초희가 더 예쁘다..^^)

그녀의 아버지 허 엽은 어린 시절 초희가 큰 오빠와 남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귀동냥으로 들으며 스스로 독학하였는데, 이를 본 큰 오빠인 허 봉이 어여삐 여겨 남동생 허 균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시는 당시 일반적인 시인들이 자아의 태도나 자연을 쓰는 것을 넘어 학문적 지식을 토대로 지를 지었다고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모를 중국의 과거 시대적 사건들을 자신의 시에 녹여냈으며, 그녀의 유고작인 '난설헌집'을 중국 사신들에 의해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며 중국 시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그녀는 지금도 그렇지만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바둑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지금도 강릉에선 '난설헌배 여자 바둑 대회'를 진행할 정도로 바둑에 관한 시도 남겼다고 하니, 그녀는 그녀의 원치 않은 결혼생활의 불행을 온전히 자신의 창작활동에 온전히 쏟아부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그녀의 집안은 허 균이 능지처참당하며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기에, 사후 그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책에서 시집가다와 장가들다의 차이를 설명한 글을보고 생각난 인물이 바로 사임당 신 씨와 난설헌 허 씨인 허초희였다. 누가 더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한건 아니다. 내가 볼 땐 두 분 다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사임당은 사임당대로, 난설헌은 난설헌대로 그냥 그녀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다. 단 사임당은 그 당시 사임당의 주변환경이, 난설헌은 난설헌의 주변환경이 그녀들의 삶이 그렇게 살아지도록 결정되었을 것이다. 누구의 삶이 더 비극적이었고, 가치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을 산 여성이 있는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난 허초희가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진 못하겠다. 그러기엔 그녀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나고 부럽다. 또한 사임당이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자신의 가치있는 삶은 오롯이 자신을 투영하여 밖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제목처럼... 찰리 채플린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내가 볼 땐.. 그냥 여성의 삶이 비극이었다. (과거형이다..ㅠㅠ)

어쨌든 그녀들의 남편은 그녀들을 책임지지 못했고, 그녀들 역시 그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것처럼 보인다.

아직 나는 유교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난 맹자가 주장한 측은지심... 애달픈 삶을 살다가 요절한.... 그 삶이 어떤 삶이었던 어쩔 수 없이 허초희의 삶이 더 끌린다. 십만 원 화폐가 생긴다면 그 그림은 허초희가 아버지와의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저 그림에 한 표를 던진다.^^

 

오늘의 끄적거림.. the end....

 

ps) 포스팅을 끝내면서.. 불현듯 든 생각.. 이 포스팅.. 과연 몇 명이나 읽으려나.. 5시간 걸렸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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