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저곳 종로를 거닐며 - 고종 칭경기념비, 보신각 그리고 YMCA
- 여행과 맛집/곰돌이의 여행
- 2023. 5. 21.
서울 종로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500년의 수도로 곳곳에 유적과 당시의 흔적등이 남아있다.
오늘은 고종의 칭경기념비와 보신각, 그리고 YMCA에 대해서 하나의 포스팅으로 엮어 끄적여보고자 한다.
위 기념비는 1903년인 광무 6년 9월 2일에 세워졌다. 비석의 앞면에 '대한제국 대황제의 나이가 60세를 바라보게 된 것과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직접 글을 썼다. 원래 고종이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자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해는 1902년이었지만, 나라 형편이 어려워 한 해 늦게 세우게 되었다.
비를 보호하는 건물은 비극은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2중기단위에 정자형 건물로 짓고, '기념비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고색창연한 이 비전은 조선의 아름다운 전통 건축 양식이 잘 남아있어 예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남쪽 정면에는 돌기둥 위에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을 만들고, 그 양 옆에는 해치상을 조각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떼어가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하던 만세문과 담장을 찾아다가 1954년 경에 일부를 보수했고, 1979년에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feat. 칭경기념비 설명)
시전행랑은 시전을 구성하는 건물 중 직접 매매행위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지금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시전행랑은 조선 초기의 시전행랑이 아닌 조선후기의 그것이다.
시전과 금난전권 그리고 상업의 발달.. tmi....
시전은 시장 거리의 가게를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당시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상설시장이다. 관에서 임대하여 주고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과 난전을 금지하는 특권을 주는 대신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바칠 의무를 부과하였다.
드라마 '이 산'을 보면 시전상인과 금난전권의 문제점을 다루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은 상인들이 자연스럽게 시장을 형성해서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닌 국가에서 정해주는 곳에서 임대료를 내고 그곳에서 장사를 하였다. 이게 언뜻 보면 상당히 체계적이고 관리가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엄격한 관리와 규제를 동반한 것이었기에 시장의 자체 활성화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 점점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인들이 많아지게 되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의 활동공간을 넓혀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시전에 속한 상인들에게 더욱더 큰 권한을 주어 상업적 발달을 위축시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금난전권'으로 말 그대로 난전을 금하는 권리를 시전에 주어 시장의 활성화가 아닌 폐쇄성을 강화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 번째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양반사회의 우월성과 상인에 대한 계급적 차이와 무시가 가장 크겠지만 이렇듯 권한을 가진 시전의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만 준하는 권한을 정부와 결탁하여 행사하여 10%의 시전이 90%의 난전을 힘으로 억누르는 사회적 제도도 한 몫하였을 것이다.
이곳 종로 청진 8지구에서 발견된 우물은 조선시대 통행이 잦은 피맛길과 피맛2길이 만나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물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의 모든 문명이 강 주변에서 발생하였듯이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안정적인 물의 확보는 매우 중요했다.
또한 이곳은 6.25 전쟁 당시 징병업무를 담당한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가 있던 자리라고한다. 정부수립 후 병역법이 공포되면서 병력모집은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바뀌었다.
피맛골에 대해서는 지난 포스팅에 잠깐 설명해서 그냥 안내판으로 대체한다. 위의 위치도처럼 피맛골(길)은 딱 한 군데가 아니라 종로를 기준으로 중심거리를 벗어난 여러 군데에 피맛골(길)이 형성되었다. 저 빨간 부분들이 평민이라 불리는 조선의 백성들의 삶이 묻어나는 곳이다. 참고로 평민에 해당하고 천민이 생활하고 활동했던 지역은 따로 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조선에도 신분 계급이 있어 각 계급에 맞추어 생활하고 활동하는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종각역 바로 앞에 있는 누각인 '보신각'이다. 보신각이라고도 불리우고 종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종각역의 종각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보신각은 6.25 전쟁때 완전히 파괴되었고, 1953년에 중건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1970년대 서울 지하철 1호선을 공사하는 과정에서 세종 때 지은 옛 종루의 초석이 발굴되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파악하였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1979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종루를 다시 세웠고, 당시 발견된 주춧돌은 현재 서울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의 보신각은 추측으로 지어진 형태로 정말 조선시대 당시의 모습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보신각 종은 조선 세조때 현재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에 걸기 위해 만든 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각사가 사라진 후 광해군 때 지금의 장소로 옮겨져 도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새해의 시작을 여기 보신각에서 타종을 하는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 종이 어떤 특별한 문화재였다기 보다는 현재 서울 종로에 남아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시간적으로 가까워서가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살짝 해본다.ㅋㅋㅋ
여기서 보신각 tmi...
지금도 그렇지만 보신각에서 타종하는것으로 새해 시작을 알린다. 이때 서른세 번의 타종을 하는데 이는 불교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불교에선 '도리천'이라하여 불교 우주론에 따르면 도리천은 육욕전 가운데 네 번째 하늘을 말한다고 한다. 도리천은 산스크리트어가 그 기원이며, 이를 의역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이라고 하는데 서른세 번의 타종은 이 삼십삼천에서 유래하였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시대에 사찰(원각사)을 지은 것만으로도 대역무도한 사건일 텐데 그 사찰을 장식하는 것으로 종을 만들었다.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은 불교 사찰을 위해 만든 종으로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하였고, 또한 이 종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대한민국에서 불교의 도리천으로 향하는 서른세 번의 타종을 하며 새해를 시작한다.
그냥.. 포스팅을 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ㅋㅋㅋ 참고로 난 종교가 없다. 무교다... ^^
이건 처음 알았다. 여기가 3.1 독립운동 기념터라는것은....
마지막으로 포스팅할 곳은 YMCA건물인 서울 기독교 청년회관이다. 직접 가본 적도 없고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이다..ㅋ이곳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당시 운동권 세력의 아지트로 사용됐던 곳이라고 한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전후로 수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신군부에 의해 잡혀가고 고문을 당했는데, 거의 유일하게 그들의 치외법권 지역이 YMCA 서울 기독교 청년회관이었다. 당시 신군부 세력은 국내의 언론을 검열하였는데, 기독교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인사들에 대해서까지 강제적인 진압을 할 수 없었기에 이곳은 수많은 운동권 인사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도피처가 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은 아니지만, 시대의 상황이 그런 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