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1편 1894 - 1945 :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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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 역사관 관람이다.

원래는 1탄 주제관, 기획전시실과 2탄 역사관으로 나뉘어 포스팅하려 했으나 역사관 포스팅이 생각보다 사진이 많아서 부득이하게 역사관을 1편 1894 - 1945 :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와 2편 1945 - 1987 : 평화, 민주, 번영을 위하여와 1987 - : 나 - 대한민국 -  세계의 2편으로 나누어 올린다.

참고로 아래 포스팅의 그림에 1에서 5까지 쓰여있는 사진과 내용은 꼭 쓰고 싶었던 내용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가급적 1포스트당 3시간은 넘기지 않기로했다..-_-;;), 이번주에 포스팅해야할 곳을 5월 20일 토요일 환장하는 두 식당의 청국장 시식으로 인해 다른 곳을 둘러보지못함에 자료가 없는것도 비밀아닌 비밀이다.. ㅠㅠ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역사관으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역사관 안내

 

전에는 그림이 주는 임팩트에 끌려서 그 다음 텍스트를 읽었다면, 이젠 텍스트가 주는 묘한 정적인 감정이 있다.물론 아직도 그림에 먼저 끌리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그림과 텍스트가 70 : 30 이었다면, 지금은 50 : 50 정도는 되는것 같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

 

한국은 문호개방 이후 자주독립의 독립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백성은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1890년대 각계각층의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열강에 침탈에 맞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한국은 전쟁터가 되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로인해 한국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과 차별을 겪어야했다.

[근대 국가를 향한 노력과 좌절]

 

여기 아래서부터 1~ 5라고 되어있는 사진과 그 설명이 내가 오늘 이 포스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99%이다. 시간이 괜찮으면 한 번쯤 읽어보는것을 권한다.

 

위의 설명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문구는 백성이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이전에 한반도는 단 한번도 백성이 주체인 나라는 없었다. 고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백성은 국가의 부속품(?)이었지 무엇인가 결정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비약같지만 전제군주 제도에서 당연한것이다.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빨리 실행했다는 아테네에서도 폴리스에 모인 일부 아테네 귀족에게만 허용된것이 민주주의였고,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는데, 이 혁명이 세계 최초로 시민세력이 왕조를 무너뜨린 사건이며 이때부터 '민주주의'가 태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전봉준 공초와 전봉준의 사진이 실린 일본 잡지

 

1894년 12월 2일 전봉준이 체포된 후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신문 기록으로, 274개 문항으로 이루어져있다. 농민군 최고 지도자급에서 남긴 유일한 진술자료이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복제)

이게 설명에는 '신문'이라고 되어있는데 '심문'이 맞는 표현이 아닐까..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심문 기록'.. 이게 더 올바른 표현같은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위 오른쪽 일본잡지는 1895년 5월 10일 발간된 '사진화보'이다. 서울 일본 공사관에서 심문을 받던 전봉준이 1895년 2월 27일 법무아문으로 이송되기 직전에 무라카미 텐신이 촬영한 사진이다. 전봉준이 들 것에 태워진 것은 발에 중상을 입어서이다.(박뱅수 기증)

여기에서는 또 '심문'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아마 앞의 '신문'이 잘못된 표현인것 같은데.. 누구에게 질문을 해야하나..ㅠ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호는 '해몽'이다. 왜소한 몸때문에 후에 '녹두장군'이라는 별호가 붙었고, 그의 출생지는 몇군데 설만 유력할뿐 정확하지 않다. 그의 시조가 백제의 개국공신 중 한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함께 거론되는 이가 바로 고부 군수 조병갑이다.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하던데 난 남자임에도 강동원만 보여 영화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_-;;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에 의해 곤장을 맞고 죽임을 당하는데, 이 아버지가 전봉준의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한다. 조병갑은 조선 후기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그는 여러가지 죄명을 씌어 백성들에게 터무니없는 세금과 재물을 약탈하였고, 이에 전봉준은 1894년 정월 10일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는데 이것을 '고부민란'이라고 한다. 당시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로서 관내 교도들을 관리,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독립협회 안내문과 기부금 영수증

 

안내문은 독립협회를 소개하고 독립문 건립을 위한 기부를 당부하고 있다. 보조금, 곧 기부금 영수증은  1897년 1월 6일 독립협회 안경수 회계장이 금구군 조병식 군수에게 발급해 준 것이다. 대조선국독립협회지장이 날인되어 있다.(설명)

약간은 다른 내용이지만, 당시 독립운동과 관련된 독립자금은 일부 깨어있는 돈 있는 양반들과 상인들이 몰래 몰래 전답을 팔고 장사로 모은 돈을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에게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독립운동에 얼마나 많은 자금을 지원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위와 같이 기부금 영수증이 모두 존재하면 좋으련만 독립운동을 위해 쓰인 자금은 자료를 찾아보니 정확하게 명시된 영수증은 없는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국 국제

 

대한국 국제  tmi....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국권은 국민이 아닌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있었다. 하물며 지금의 헌법과 비슷한 것이 바로 위 사진의 '대한국 국제'인데 그 내용을 찾아보면....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500년 전래하시고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라고 되어있다. 이는 조선의 땅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모든 권리는 황제한테만 있다라는 것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바 자립 정체이니라'라고 되어있다. 이또한 백성들한테는 주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일병합조약문

 

1910년 8월 22일 이완용 내각총리대신과 데라우치 마사다케 통감이 서명한 한국병합에 관한 협정문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완용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이름을 남겼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복제)

 

한일병합조약문 tmi....

아무것도 아닌 이 박물관의 '한일병합조약문'이라는 안내문 때문에 난 '한일병합조약문'을 보기 시작한 이후의 박물관 관람부터  포스팅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열받아서 글을 쓰고 있다. 

이게 박물관 설명에는 '한일병합조약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탄조약문'이라고 쓰는것이 옳다.

병합의 사전적 의미는 둘 이상의 기구나 단체, 나라따위가 하나로 합쳐짐이라는 뜻이다. 병탄은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어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이라는 뜻이다. 네이땡에서 병합을 검색하면 유의어로 병탄, 합방, 합병이라고 되어있다. 정말 병합과 병탄이 유의어인가.. 유의어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서로 비슷한 말, 소리는 다르지만 그 뜻이 비슷한 말을 유의어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90%이상이 사용하는 포털사이트에서 병합과 병탄의 뜻이 비슷하다고 되어있다. 혹시나 해서 다땡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다땡은 최소한 병합의 유의어가 병탄이라고 되어있진 않았다. 단.. 영어단어는 찾아보지 말기 바란다. 영어로는 병합이나 병탄이나 모두 'annexation'이라고 되어있다. 

annexation의 어원에 대해서도 찾아보았다..(이런 쓸데없는 고집..ㅋㅋㅋ) 이게 라틴어 annexatio에서 유래된것으로 보이는데, 외국 영토의 일부 또는 전체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여 주권을 넘겨받는 것을 말한다. 주권을 완전히 이양하지 않는 점령지나 조차지, 보호국, 보호령과는 구별된다고 위키백과에서 말하고 있다. 병합이나 병탄이나 한글이긴 하지만 그 의미가 한자에 있기때문에 이를 외국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국민이라면 '병합'과 '병탄'의 의미정도는 정확하게 알고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것같은 쓸데있는 생각이다...

 

이 한일병탄조약문을 보면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라고 되어있다.

이 말은 대한제국 황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한을 일본에게 넘겨주는 양도계약서가 되는셈이다. 바꿔말하면 이 당시 국민한테는 주권이 없는 상태인것이므로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대한제국의 국민 입장에서는 나라를 빼았긴적은 없는것이다. 대한제국 이전에 국민 주권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면 너무 극단적인 표현인가.. -_-;; 이는 어느방송에서 본것인데 상당히 새롭고 독특하기도 하고 나름 일리있는 주장이어서 계속 생각이났었다.

실제로 이때부터 대한제국의 국민은 '국민주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독립투쟁'인 셈이다.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공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선언서의 첫 문장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에서 '조선'이 '선조'로 글자가 바뀌어 인쇄되었다. 조판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이다.(설명)

 

기미 독립 선언서 tmi....

위 선언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겠다는것을 표현하고있다. 아래는 독립선언서의 문장이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를 해석하면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대한제국의 복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자유민이고 독립국인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독립투쟁은 단순히 대한제국을 되찾는 것이 아닌 국민주권을 찾기위한 투쟁인것이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민주 공화정'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임을 바로 임시정부의 민주 공화정이 설명하고 있는데 3.1운동이 일어나고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게 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시작은 3.1운동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있다.

또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명시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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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군인 혁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국채보상금 모금 장부

 

1907년 국채보상금 모금 내역을 기록한 회계장부들이다. 단연상채회는 담배를 끊어 빚을 갚는 모양이다. 모금한 돈을 의금, 곧 의로운 돈으로 부르고 있다.(설명)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1894년 10월 27일 일본 병참총감이 보낸 전보의 내용이다.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니.. 이 전보가 사실이라는게 더 오싹하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정치 풍자화로 그려진 동아시아의 정세

 

1:러시아, 2:일본, 3:영국, 4:미국

러.일전쟁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영국내에서 제조하는 산업상품을 영국내 판매만으로는 그 물량을 모두 소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식민정책을 펼칠수밖에 없었고, 이는 일본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영국은 일본의 식민정책 확장을 은근히 부추기게된다. 미국은 이런 일본에게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중립이라는 명목으로 실질적으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의병의 흔적

 

이 사진은 국정교과서 시절 국사책에서 제일 먼저 보았고, 최근(?)에는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에서 보았다.. -_-;;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의병에 대한 사진이나 자료는 상대적으로 내용이 적고 부실하다. 사진속 왼쪽에서 세번째 소년은 과연 몇살이나 되었을까... 저 소년에게 국가와 독립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임시헌장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시민증

 

미국 워싱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담당한 구미주차한국위원회가 1924년에 발행한 안재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민증이다.(설명)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전통도시 읍치

 

조선은 지방행정 중심지인 읍치에 바탕을 두고 전국을 통치하였다. 조선 팔도의 명칭도 각 지방의 대표 읍치 두 곳을 합쳐 만들어진 것이다 .읍치는 숭수지리상의 요지에 입지하여 배산임수의 지형적 특성을 띠고 있었고, 읍성을 두고 있었다. 조선 팔도의 교통망은 한성에서 팔도의 각 읍치를 연결하여 이뤄졌다. 하지만 전국의 읍성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거의 모두 헐렸고, 지금은 성내리, 성내동 같은 마을 지명으로만 흔적이 남아있다.(설명)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신문물과 신문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신교육과 학생

 

한국인은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새로운 문화와 교육을 폭넓게 경험하였다. 젊은이는 학교에 들어가 더 나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고자 노력하는 한편 민족적 자각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총독부의 대중매체 검열과 민족 차별적인 교육 정책 속에서 진행되었다. 생활수준 차이에 따른 문화 향유와 교육 기회의 격차도 있었다.(설명)

 

 

에디슨 전화기

 

에디슨의 전화기와 축음기... 뜬금없지만 난 이 세상의 혁명은 3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술과 전기 그리고 커피라고 생각한다..ㅋㅋㅋ 에디슨의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백열전구'를 꼽는데, 갑자기 이 두가지를 보니 뜬금없이 떠올랐다.. 술과 전기 그리고 커피는 지금 내가 준비하는 포스팅 내용중 하나이다..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에디슨 측음기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축음기 형태로 원통에 홈을 파서 소리를 녹음하고 바늘을 사용해 소리를 재생시키는 장치이다. 구한말에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는 원반형 음반을 재생시키는 형태로 대체되어 간다.(설명)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라디오청취료 영수증과 조선방송협회 보급형 3호 라디오

 

1943년 조선방송협회가 월 청취료 75년을 받고 발급한 영수증이다. 라디오 등록대수는 1927년 한국인 949대, 일본인 1481대에서 1942년 한국인 14만 4912대, 일본인 12만 5882대로 증가하였으나, 100가구당 보급률은 일본인 73대, 한국인 3대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설명)

오른쪽은 조선방송협회에서 수신료를 확보하기 위해 시중에 저렴하게 보급한 라디오이다. 한국에서 정규 라디오 방송은 1927년 일본어로 시작되었고, 한국어 방송은 1933년 제2방송으로 추가되었으나 1943년 중단되었다.(설명)

 

열받은 감정이 커피와 생수를 번갈아 2번씩 교차하며 마시며 포스팅을 쓰다보니 조금은 풀렸다.. .-_-;;

3시간을 넘기지말자고 다짐했건만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다시 첨언을 하고, 글을 검수하면서 욕설을 삭제하고 수정을 하니..5시간을 넘겼다..(참고로 오늘은 5월 21일 일요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ㅠㅠ)

남은 포스팅은 결코 3시간을 넘기지 않으리라!!!!

 

 

 

 

똑같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어도 역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에 2023년 지금 내가 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그 이전에 본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은 다를것이다. 이렇듯 같은 공간을 조금은 다른 시선과 다른 시기에 바라보는것도 상당히 색다르고, 재밌고, 흥미롭다. 나와 지금 가치관이 비슷하다면 금상첨화이다. (가치관이 다르면..속으로 상처받는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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