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종교의 본질은 믿음인가, 신념인가.. 화성 '남양성모성지' 출사(feat. 성리학은 종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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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기본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는다.. 뭐.. 거창하게 무신론자.. 이런건 아니지만 최소한 종교가 끼치는 영향(?)으로 인해 내 삶이 바뀌거나 영향을 주진 않았다. 내게 있어 사찰은 경치를 구경하러 가는곳이고, 도심의 어둠 속 수 많은 십자가는....그냥 돈낭비일 뿐이다..이슬람은?? 딱히 생각해본적이 없다... 주말을 맞아 출사 곳을 찾다가 방문한 경기 화성에 위치한 

'남양성모성지'를 다녀왔다. 

 

(아래 포스팅은 천주교와 전~~혀 관계없는 나의 개인적인 종교적 포스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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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 가볼만한 곳 '남양성모성지' 출사

 

 

방문일 - 2023년 9월 23일

위치 - 경기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704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박해(1886년) 당시 이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곳이며, 199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모 성지로 공식 선포된 곳이다.

 

 

남양성모성지
남양성모성지

 

 

난 아직도 천주교와 기독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나의 구분법은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이고, 천주교는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는 정도???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ㅎㅎㅎ

 

천주교는 그리스도교에서 정교회와 함께 이어온 보편교회라고 한다.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에 대해 보편적이고 참된 교회라는 의미로 가톨릭교이다.(구글 검색)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당시 청나라에서 전파되었으며 흔히 서학, 서교라고 칭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당시 남인 일파가 몰살당한 신유박해가 그 전 신해박해와 함께 우리나라(조선)에서 제일 먼저 발생한 종교 박해라고 할 수 있다.

 

 

입구

 

 

기독교의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은 로마로부터 핍박받던 곳으로, 기독교의 시작은 유대교와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사람들로 시작하였다.

싯다르타 고타마는 인도의 왕족이었으나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은 브라만교의 사상이 그 밑받침이다.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종교의 전파보다는 개인의 수양과 참선에 그 의의를 두고 있다.

610년 무함마드는 '유일신 알라에게 복종한다'는 뜻의 이슬람이란 말로 유일신 알라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무함마드는 당시의 시댁적 배경으로 인해 본인들이 거주할 영토를 차지하기위해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불교에 비해서 국가란 개념에 좀 더 의의를 둔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신 역시 기독교, 유대교의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뿌리를 같이 한다.

 

 

누군가의 가르침

 

 

QR코드를 검색하면 홈페이지로 이동해요

 

 

오랜만에 듣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너무나도 좋다.. 하지만 성당에 다가갈수록 공사 소리때문에 자연의 소리는 다 묻혀버렸다.. >.<

 

 

새소리와 바람소리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동안 이 질문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였지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답은 '죽음'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는 인간의 삶... 그것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어딘가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불교든 기본적으로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의미를 둔다. 특히나 불교의 경우 윤회사상은... 뭐... 사람이 나쁜짓을 하면 개, 돼지 등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 않나...-_-;;

아마도 일상의 고닮픔이 나 자신을 무엇인가에게 속박시키려고 하는게 아닐까.. 멀리 서양까지 갈 필요도 없이 조선시대에 천주교가 급속도로 빨리 전파되고 수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뿌리내린 이유는 당시의 배고팠던(?) 백성들의 삶과 영향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추모하며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사회이자 양반의 사회이다.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또한 백성이 근본(民本)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조선시대는 개국과 함께 정도전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그 후에 세종이라는 말도 안되는 분이 나타나서 30여년을 제대로 국가를 운영하지만 그 이후 조선은 서서히 끓어가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자신들이 망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400년을 버티다 결국 망해버리고 만다. (다시 본론으로) 조선은 양반사회이다. 초창기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조선 후기에 가면 양반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70%를 넘기게 된다. 흔히 지금의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평민들의 비율이 가장 많아야하지만 당시 조선은 돈으로 양반을 사고팔 정도의 썩어가는 나라였다. 천주교는 이러한 시대에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당시 청나라 북경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시 큰 도시였다. 아시아의 문물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들도 청나라에 전파되었고, 그 중 천주교는 서학이라고 하여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서양의 학문과 함께 전파되어 학문적인 의의가 컸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조선도 그런 중화사상과 사대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사상이라기보다는 우주의 원리를 해석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성리학은 그저 쓸모없는 학문일뿐이다. 19세기 아시아가 서양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망가진데에는 이러한 국가를 운영하는 사상적 가치관도 많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동양의 전쟁은 정복전쟁이 아니라 방어전쟁이 기본이라면, 서양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국가간 정복전쟁이 주를 이뤘기에 동.서양의 전쟁에 대한 개념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잠시 고민

 

 

아시아에서도 종교가 국가를 하나로 합치는 그런 영향을 발휘하던 때가 있었다.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민심을 하나로 모으게 하는 역할을 하였고, 신라역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등의 불교를 통해 통일신라 이후의 분열되어있던 삼국의 민심을 모을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하였다. 이러한 종교를 이용한 민심의 통합은 고려시대까지 이용되었다. 통일신라부터 고려말까지 우리나라는 불교가 성행하였는데 국가에서는 각종 불교적 행사를 바탕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이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의 씀씀이는 고려말부터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한다. 신진사대부는 이러한 시기에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한 그룹들이라 할 수 있다. 과거제도를 통해 과거에 합격한 사람만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발상이지만 당시 권문세족들에게는 하늘이 두동강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을까.. 여태까지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태어나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정계에 진출했는데 갑자기 시험을 봐야하고.. 그 시험을 통과해야 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니....

 

 

그냥 고민만

 

 

그래도 묵념

 

 

데이지는 쌍떡잎식물로 국화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라고 구글 검색이 알려주었다.

 

 

데이지가 피었다

 

 

그렇게 종교는 국가운영에 깊숙히 개입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조선의 모든 이념과 사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종교가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불교를 배척하는 성리학의 억불정책도 한 몫 했으리라....

 

 

공원일거야

 

 

조선은 세종과 성종을 거치면서 국가의 기틀을 잡고 어느정도의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출현과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등을 거치며 백성의 삶은 더욱 궁핍해져갔다. 이 시기에 중국(청)으로부터 전파되어진 것이 서학에 포함되어 있는 천주교이다. 일단 왕정정치에서 천주교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였다. 서양의 경우는 모든 국가의 종교적 지도자를 로마 교황청으로 우대하였기에 국가 존립이 가능했지만 조선은 경우가 달랐다. 천주교가 조선에서 핍박받은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바로 제사문제이다. 조선은 종속번식과 가문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남다른 국가 중 하나이다. 내 조상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나의 신분이 결정나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제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하루종일 일해야 겨우 하루 두 끼 풀칠할 수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과거제는 그냥 요식행위일 뿐이다. 제사는 이러한 사회속에서 자신의 존재여부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제사 문화를 직접적으로 배격하였다. 

현재는 세상을 떠난 조상들에 대한 孝와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에서도 제사를 하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제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도 유교식 전통을 다 허용하신 것이 아닌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을 허용하고 있다.

 

 

남양성모성지는 지금 공사중

 

 

 

 

이러한 제사 문제는 조선시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1759년 윤지충은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정약용과는 내종사촌 관계였다. 그는 1791년 모친상을 당하게 되는데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은 관례에 따라 유교적 상을 치르고 조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외종사촌이자 천주교도였던 권상연이 이를 문제삼아 윤지충은 상복을 불태우고 조상의 위패까지 전부 없애버린다. 이것이 '진산사건'이다.

 

 

남양성모성지 - 성체조배실1
성체조배실1

 

 

이처럼 천주교는 조선의 성리학적 풍습에 완전히 위배되었기에 양반중심의 사회에선 전파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대부분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양반들과 중인들 사이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천주교 박해 당시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들이 많았던 이유는 당시 그들이 정조 사후 안동 김씨인 김조순 일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권력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중인들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그들은 상업을 중심으로 부를 안게 되었지만 그들의 출신성분으로 인해 중앙권력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태생적 문제로 인해 자연스레 천주교에 빠져들게 하였다.

 

 

남양성모성지 - 성체조배실2
성체조배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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