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붕당정치의 허무한 시작과 예견된 몰락

반응형
반응형

 


추석연휴.. 할일없는 솔로가 끄적이는 조선의 역사공부... 조선의 붕당정치의 시작과 몰락... start !!!!

 

 

반응형

 

 

고려말... 흔히 신진사대부라 불리는 성리학을 공부한 지식인들은 태생부터가 달랐다. 당시 고려는 권문세족과 승려가 지배하는 국가였다. 고려 창업당시 왕 건과 함께 고려를 창업한 개국공신들의 후손들이 음서제를 통해 자연스럽게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고, 그들은 그의 선조들이 일궈놓은 수많은 땅과 재산, 노비들을 아무런 제약없이 고스란히 되물림받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고려라는 나라는 자신들의 안위가 보장된 아주 안전하고도 편안한 나라였다. 물론 무신정권이나 몽골지배기 당시 국가가 위태로운적은 있었지만, 그건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이지 자신들... 즉 권문세족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최소한 조선시대는 이러한 고려시대의 퇴행적 악습을 끊었다는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의의가 있다고 본다. 평민들도 최소한 열심히 공부하면 관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 하지만 그러한 희망도 조선을 지탱하는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조선은 세종이라는 불세출(?)의 지도자를 만나면서 최대의 황금기를 구축한다. 당연하게도 그의 최대 업적은 한글인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물론 당시에도 이두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언어가 있었지만 양반들은 사대주의에 집착하며 한자를 최고라 여기며 모든 관리문서는 한자로 사용되었다. 물론 세종이 한글을 만든이후에도 한자는 사라지지 않고 조선시대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최소한 한글이 생김으로서 일반 백성들은 조금이나마 편하게 글자를 배울 수 있었고, 한글은 일반 평민들과 사대부 여인들에 의해서 알음알음 조선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중기이후 붕당정치의 시작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사회로 접어든다. 조선시대 붕당정치는 김효원과 심의겸의 정쟁으로 인해 시작된다. 성종이 훈구세력에 맞설 사림세력을 정계에 진출 시킨 후 사림세력은 조선시대 정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되는데, 이 사림세력이 김효원과 심의겸에 의해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이들이 분화한 이유는 '외척의 정치참여 허용여부'였는데 신진 사림인 김효원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외척은 배척해야 한다는 강경파 사림을 대표하였고, 심의겸은 각종 사화를 겪으며 뜻을 함께한 세력이라면 외척이라도 상관없는 온건파 사림이었다. 이때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추천되자, 김효원을 위시한 강경파와 심의겸의 온건파는 둘로 갈라지게 된다. 이때 김효원의 세력을 동인, 심의겸의 세력을 서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상당히 합리적인 정치대결의 구조였다.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었지만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기반에 둔 세력의 가치관의 싸움이었다. 외척의 존재를 단순히 외척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함께 힘을 합쳐 의기투합한 세력으로 볼것인지.. 

 


하지만 이렇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이후... 조선시대 붕당정치는 권력의 아귀다툼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선 정권을 잡은 서인 출신의 정철(관동별곡 저자)은 정여립의 반란사건을 수사하면서 동인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서인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정철역시 선조에게 세자 책봉 문제로 미운털이 박히면서 유배를 가게되고(이때 관동별곡을 지음) 다시 동인들이 주도권을 쥐게된다.

 


하지만 이때 동인들 사이에서 정철의 처리를 두고 분화하게 되는데, 강경하게 보복해야 한다는 북인과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던 시기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는 의주로 도망가면서 아들인 광해군에게 분조활동을 맡기게 된다. 이때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북인이었고 의병장들 중에서도 북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권은 다시 북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즉위하는 과정에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이 당시 남인과 서인은 정권에서 거의 축출되었다. 그리고 다시...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가 왕에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게 되었고, 북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당시 남인들은 그나마 서인들과의 부채관계가 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게된다. 

 


그리고 서인과 남인이 완전히 결별하여 후에 세도정치까지 이뤄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예송논쟁 사건이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그 왕비가 죽었을때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을 어떻게 해야하냐는 어처구니 없는 논쟁으로 벌어지게 된다. 서인을 대표하는 송암 송시열은 1년으로 주장하였고, 남인은 3년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서인은 대부분 율곡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자들이 많았고, 남인은 퇴계 이황의 사상을 계승한 자들이 많았다. 율곡과 퇴계가 이따위 상황을 볼려고 후학을 양성한 것이 아닐텐데.. 그들은 1년상과 3년상으로 피터지게 싸우게되고 결국 남인의 얄팍한 수로 남인이 승리하면서 정권을 쥐게된다. 남인의 얄팍한 수는 다음 기회가 있으면 그때~~~~

 


이때부터 붕당은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하며 공존하던 기존 붕당정치를 떠나서 내편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대결의 구도를 펼치게 된다.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군사력을 강화해야한다는 명목으로 그나마 서인이 가지고 있던 군권마저 자기들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때 경신환국을 통해 남인은 몰락하고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경신환국 당시 외척이었던 김석주는 서인과 연대하였지만, 몇몇 거짓 고변사건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지게 된다. 당시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눈감아주자는 노론과 제거해야한다는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당시 왕으로 있던 숙종은 박살난 남인과 분열된 서인들틈에서 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조정을 이끌게 된다. 숙종은 이후 장희빈으로 인해 여러차레 환국을 거치며 정국을 주도하게 되고, 최종 승자는 갑술환국을 통해 서인집안인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키는 문제로 남인들은 정계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이때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남인들로 인해 후에 지방에서 서원과 사우를 건설하며 지방 중심의 권력으로 이동하게 되고 이것이 향전의 배경이 된다.


이후 정권을 잡은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였던 경종을 지지하였고 노론은 영안군(영조)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사이 숙종은 사망을 하게되고, 자연스레 경종이 다음 왕위에 오르게 된다. 노론은 자신들의 세력유지를 위해 영안군을 왕세제로 삼아 대리청정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경종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소론을 중심으로 노론을 싹쓸이 하려고하지만 어이없게 경종은 사망하면서 영조가 즉위하게 된다.


이러한 붕당정치의 휘말림속에서 즉위한 영조는 어느 한쪽으로 세력이 치우치지 못하도록 노론의 세력을 일정 부활시키면서 탕평책을 펼치게 된다. 영조 시대에 탕평책이 실시되었던 이유다. 영조와 정조는 유능한 군주들이었기에 붕당의 세력간 조율을 원만히 하면서 조선 후기 마지막 불꽃을 태우게 된다. 하지만 정조 사후 그의 아들인 순조에게는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정치력과 카리스마가 없었다. 왕권은 유명무실해졌고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등의 가문들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지방의 수령은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세도가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받치게 되고 이러한 상황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피해로 전가되었다. 홍경래의 난등이 발생하면서 백성 스스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백성이 가진 힘은 그닥.. 많지 않았다.

 

수원 화성



이러한 조선시대 말기 등장한 인물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그가 보수적인 개혁가인지, 폐쇠적인 수구정치인이지는 일단 접어두고... 흥선 대원군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국책사업으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아이러니하게 국력의 쇠태를 불러왔고 그는 고종이 친정을 발표하면서 아관파천으로 몰락하게 되고, 마지막 조선시대의 집권세력인 민씨세력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게된다.

 

경복궁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