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발해에 대해서 딱히 배운 기억이 없다. 그냥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건국한 국가라는 것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발해의 건국과정에 고구려 유민뿐만 아니라 말갈을 비롯한 그 주변의 민족들이 함께 만든 국가이기 때문일까?? 우리 역사에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우리의 역사 '발해'가 이번 곰돌이의 역사 글쓰기 4편의 주인공이다.
우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우리의 역사 '발해'
본인이 '우리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이라고 한 이유는 그 자료가 너무나 미비하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다닐때 발해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용은 발해의 마지막 왕자인 대방현이 발해의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정도이다. 발해는 통일신라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에서 남북국 시대를 아우르는 국가다. 한반도 남쪽으로의 경계는 통일신라와 맞닿아 있지만 나머지 국경선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역사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당시 서아무르지역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자료를 참고하면 역대 우리나라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까지 발해에 대한 기록중 그나마 유의미한 기록은 조선시대 유득공이 저술한 '발해고'가 참고할만한 발해에 대한 역사서이다. 발해에 대한 기록이 적은 까닭은 실제 발해의 마지막 왕족들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남긴 기록이 거의 전무하고, 또 다른 이유는 발해멸망 후 발해에 세원진 거란국들에 의해 발해의 문화재나 책을 전부 태워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거란 역시 오랜 기간 존속된 국가가 아니기에 온전히 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발해의 초대 황제 '대조영'
아마 드라마 '대조영'이 없었다면 우리는 발해에 대해 더 몰랐을것이다. 확실히!!! 최수종의 힘이 크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 후 고구려 유민들과 당시 요동지방 즉, 지금의 만주지방에 흩어 지내던 말갈인 그리고 소수민족이 구성원이 된 당시의 다민족 국가였다. 고구려 멸망 후 당시 지역에 흩어졌던 여러 민족들을 한데 어우러 만들어진 국가가 발해인 것이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출신으로 아버지는 걸걸중상 혹은 대걸중상이라 하였다. 대조영의 출신에 관해서도 의견이 나뉘는데 그 이유는 역사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갈족이라 주장하는 쪽은 말갈이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고구려화 되는 과정을 거친 말갈계 고구려인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그의 출신 또한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기에 정확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드라마 속 3 총사 대조영과 걸사비우, 흑수돌
드라마 '대조영'속에 등장하는 대조영의 가장 오랜 벗인 걸사비우와 흑수돌은 가상의 인물이다. 물론 걸사비우는 가상의 인물은 아니지만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신분이 대조영의 친구로 위조(?)되었다. 걸사비우는 대조영보다는 연배가 높은 오히려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걸중상과 같은 연배였다. 걸사비우와 대걸중상은 각각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발해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서로 의기투합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흑수돌은 오직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발해와 신라, 당의 관계
정치적 상황으로 보면 발해와 신라, 당 모두 서로 전략적으로 상대를 대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경우 당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당은 한반도를 모두 흡수하기 위해 백제에도 도호부를 설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백제에 도호부를 설치하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고구려의 옛 땅인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위치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결국은 신라와의 마지막 전투인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하고, 발해가 건국되면서 당은 고구려영토에서 물러나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신라는 그로 인해 옛 고구려 영토를 온전히 다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참고로 매소성 전투에는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도 참여하게 되는데, 그는 지휘관이 아닌 의용병 형태로 출전하게 된다. 이유는 당시 원술은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김유신에 의해 가문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실질적 지위가 없는 상태였다. 원술은 매소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다시 집안을 찾았지만 김유신은 죽을 때까지 그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에도 다시 원술은 가문을 찾아왔지만 당시 김유신의 아내인 지소부인 역시 그를 받아주지 않아 그는 결국 가문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발해 역시 당과 불편한 협력관계를 계속 이어가게 된다. 당은 나.당전쟁에서 패한후 안동도호부에서 물러나게되고 그 자리는 향후 발해의 건국과정에서 발해의 영토로 복속된다. 당은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는듯한 외교서찰과 행동으로 초창기 발해와 당은 서로 가깝게 지낼 수 없었다. 하지만 발해 무왕 시절 국가가 안정되면서 당 입장에서도 발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되며 그때서야 제대로된 외교적 교류를 이어가게된다. 무왕 시절의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롯이 당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다. '해동성국'은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으로 당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가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표현한 것이지 결코 발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결국 '해동성국'이란 중국(당) 입장에서 동쪽에 괜찮은 정도의 나라쯤으로 여긴 것으로 봐야 한다. 결코 우리가 뿌듯해할 만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100% 개인적 견해)
발해의 역사적 의미
지금 중. 고등학교는 발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배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25년이나 지났다..ㅠㅠ) 본인이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발해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기억은 없다.
첫 번째 이유를 역사적 사실에서 찾는다면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단지 하나의 역사서만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역사서를 비교하여 그중에서 중복되는 것과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했을 때 현실적인 사실들을 발췌하여 하나의 공통 집합체로 묶은 후 거기에 대해서 다시 연구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발해의 경우 우리나라 역사에는 앞서 말한 유득공의 '발해고'만이 거의 유일한 역사서이므로 이를 비교할만한 다른 역사적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외국에서 그 문헌을 찾아야 하는데 중국문헌에도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진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발해는 우리 역사이지만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로 평가받지 못한 부분이 크다.
두 번째는 어쩌면 좀 더 본인의 편향적인(?) 생각으로 인한 원인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단일민족성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단일민족이라는 문구를 난 어린 시절부터 출처가 어디인지도 잘 모르지만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었다. 단일민족이라는 게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선 몇 번의 포스팅에서 얘기했듯이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일 수 없는 이유가 훨씬 더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하지만 발해는 건국과정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돌궐족 등 다민족이 어우러져 건국된 나라이다. 물론 중앙정치에서의 고구려계 참여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더라도 국가의 구성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첫 번째 이유인 실질적인 역사적 문헌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 스스로 발해의 존재를 긍정 아닌 부정적 방향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을 것으로 평가한다. 물론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둔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현재까지 내가 공부한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볼 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뭐... 그냥 내가 편협한 인간이기 때문 일 것이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