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삼국의 전성기
신라는 고대 삼국중 가장 뒤늦게 번성한 국가이다. 백제가 근초고왕 시절인 4세기에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강 유역을 비롯하여 일본에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할 때 신라는 아직 정식적인 왕이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왕이라는 칭호대신 이사금, 마립간이라는 족장의 우두머리 정도로 여겨졌다. 백제의 전성기를 지나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 국가는 바로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시절 침략전쟁을 통해 국가의 영토를 계속적으로 늘려갔고, 그의 아들인 장수왕 때에 고구려 역사상 최대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광개토태왕은 백제와의 국경선 전쟁 시 백제 아신왕을 제압하며 백제가 보유한 한강 일대를 접수하였고, 신라가 일본으로부터 침입을 받을 때 군사를 보내 신라를 도와주면서 그 영향력이 최대치로 뻗어나가게 된다. 이러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광개토태왕릉비에 그 내용이 적혀있다. 물론 일부 문구가 세월의 흔적으로 사라져 일본이 오역하고 있지만 객관적인 상황을 비교해도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인물은 광개토태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이다.
고대 삼국 마지막 번영을 이룩한 신라
신라는 초대 임금인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21대인 소지마립간까지 경상도 이남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작은 부락(?)정도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22대인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우리가 지증왕을 알고 있는 이유는 당시 신라 장수인 이사부 장군으로 하여금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의 실질적인 첫 정복전쟁을 시작한 임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3대인 법흥왕대에 이르러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24대 진흥왕시절에 이르러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실질적으로 삼국을 통일한 왕은 문무왕이지만 진흥왕대에 이르러 국가를 정비하고 진지, 진평, 선덕, 진덕여왕을 거치며 삼국을 통일할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29대 태종 무열왕시절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고 30대 문무왕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고대 한국은 통일신라의 1 국가 체제로 들어서게 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그리고 신라의 특수한 왕위 계승
신라의 시조는 흔히 알고 있듯이 박혁거세이다. 박혁거세는 BC57년에서 AD4년까지 재위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건국설화 또한 신화로 남겨져있다. 일단 알에서 태어났다는 부분부터 신화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기에 그의 출신에 대한 이력은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다. 가야를 건설한 김수로 역시 알에서 태어난 신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현재 관점에서 보면 외지세력이 경상도 남부지역으로 들어와 신라와 가야의 토착세력을 제압 혹은 협력하며 신라와 가야를 건설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특이하게도 박혁거세가 국가를 건설하였음에도 그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신라는 한동안 박씨와 석씨, 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초대 군주인 혁거세 거서간에 이어 그의 아들인 남해가 2대 왕으로 즉위하고 3대 유리까지는 박 씨가 직접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지만 4대에 이르러서는 석씨인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이 박씨에서 석씨로 바뀌게 된다. 물론 석탈해는 2대 남해 차차웅의 사위이자 3대 유리 이사금의 매제이기 때문에 그들 왕족(?) 간의 협의 혹은 경쟁에서 석 씨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5대 파사 이사금부터 16대 흘해 이사금까지는 계속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중간에 13대에 이르러 신라 최초의 김씨 군주인 미추 이사금이 왕위를 이은적도 있다. 이들이 왜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가면서 왕위를 이어받은 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친족 간의 얽혀있는 사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세력이 왕위를 이었다고 볼 수 없지만 국가의 최대 권력자인 왕의 '성'이 그렇게 계속해서 변화했다는건 우리나라 역사에 비추어봐도 신라가 유일한 국가이다. 이들 박씨, 석씨, 김씨는 신라 초기 국가권력을 분업하며 서로 협력 혹은 경쟁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왕권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예전 자료들을 찾아보면 신라의 권력층은 대부분 외지세력이 신라에 장착하면서 권력을 잡은것으로 보인다. 박혁거세의 경우에도 신라 서라벌의 여섯 귀족이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고 기존 신라 서라벌 지역의 토착세력과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외지세력과의 경쟁에서 박혁거세의 세력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4대 이사금에 오른 석탈해의 경우도 원래는 신라와 가야를 인접한 해상세력으로 가야세력 즉, 금관가야와의 해상권 주도싸움에서 패한 후 신라로 입국해 신라 세력과 연합하여 후에 석탈해가 이사금에 오르게 된다. 여기서 신라는 왕이 아닌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이는 칭호를 사용하는데, 거서간은 군장이나 제사장을 의미하며 이사금은 치아가 많은 연장자를 뜻한다. 후에 우리가 '임금'이라고 불리는 단어의 원형이기도 한다. 마립간에서 마립은 신라말로 '말뚝'을 의미하는데 왕과 신하가 위치하는 자리를 '함조'라고 하였다. 거기에서 왕이 주가 되어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신하들의 자리가 지위 순서대로 배열되었기에 왕의 호칭으로 수장을 뜻하는 '간'을 붙여 마림간이라 하였다. 이렇듯 신라는 실질적인 왕의 칭호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고대) 국가의 개념보다는 여러 부락집단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국가의 초기단계에 불가하였다.
신라의 페쇄적인 계급 '골품제'
골품제는 신라의 특수한 계급을 일컫는다. '골품'은 뼈의 등급을 의미하며 이는 타고난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렇듯 골품제는 신라의 지배층을 구분하는 신분제도이다. 흔히 왕족을 의미하는 성골과 귀족을 의미하는 진골, 그리고 6두품에서 1두품까지 나뉘는데 3두품 아래는 일반 백성과 그 아래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럼 신라가 이렇게 계급을 나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으로 생각하면 일종의 '카르텔'이 아니었을까 한다. 성골은 왕족을 의미하고 진골은 귀족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귀족이란 초창기 신라를 건국할때 힘을 합한 여섯 부족을 말할 것이다. 성골은 성골끼리만 혼인하였는데 성골이 아닌 계급과 혼인하게 되면 그 등급이 떨어지게 된다. 성골과 귀족을 나누는 이유는 왕위세습이라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고, 진골의 경우 자신들의 최소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법적인 제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도 하위 6두품도 그 품계에 따라서 진급할 수 있는 벼슬의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국가가 초창기 건국하여 자리를 잡을 때는 어느 정도 유효했는지는 모르겠다. 왕권을 강화해야 하고 그 왕권을 지지하면서 또한 자기들의 세력을 공고히 해야 하는 귀족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골품제도의 한계는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에서 그 명맥이 끊기고 만다. 그 이전에 진평왕 사후 선덕여왕이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그녀가 가진 단 하나의 무기.. 바로 성골이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주위에 김유신이라는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었고, 김춘추 또한 자신의 향후 입지를 위해 선덕여왕과 협력하는 관계였기때문에 당시 신라에서 가장 큰 세력인 김유신과 김춘추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서 선덕여왕은 즉위 이후에 우리가 아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선덕여왕이 왕위를 이었듯이 선덕여왕 사후에도 성골 남자는 없어서 진덕여왕에게로 왕위가 이어진다. 진덕여왕이 신라 성골의 마지막인 셈이다. 김춘추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해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종합해 보면 김춘추의 아버지는 성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권력싸움에서 뒤처지게 됐고 김춘추의 집안은 진골에 편입되게 된다. 진덕여왕 이후 김춘추가 왕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가장 완벽한 지지세력이자 김춘추 아내인 보희의 오라비가 되는 김유신이라는 절대적인 신라의 최고 권력자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출신 성분 자체가 성골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
김춘추대에 끊긴 신라의 성골세력은 더이상 진골과의 권력다툼에서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의 아들인 법민의 문무왕 시절까지는 삼국을 통일했다는 절대적인 명분이 있었지만 그 이후의 권력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무왕은 삼국 통일 이후 권력을 재편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태종 무열왕인 김춘추 시대부터 시작했는데, 김춘추는 당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신라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때 행정을 총괄하는 집사부가 설치되었고, 집사부의 우두머리가 당시에는 중시로 불리었는데 이가 바로 시중이라는 벼슬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무왕대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하지만 문무왕시절까지만 해도 삼국을 통일했지만 거기에 따른 논공행상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권이 강화되기 위해선 주변 핵심세력인 진골 특히 공신들의 세력이 줄어야 하는데 이러한 문제는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핵심 진골세력이자 공신세력인 '김흠돌의 난'을 제압하면서 집사부의 권한이 강해지고 자연스레 왕권은 강화되었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신문왕 재위시절이 가장 태평성대라고 하는 이유는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이 안정화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골품제'의 한계
이렇듯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시절 왕권이 안정되며 나라도 융성해지게 되지만 한가지 모순점을 안게 된다. 바로 골품제의 한계이기도 한 계급문제였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 성골은 없었으니 골품제에서 가장 최상단에 위치한 성골이 없어진 것이므로 왕권을 강화하는 하나의 수단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신문왕 시절 이러한 문제가 밖으로 표출되면서 '김흠돌의 난'으로 이어져 일부 핵심 귀족들인 진골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최상위 계급인 성골과 진골의 불편한 동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계급별로 진급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그 계급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신라 후기의 대학자라로 평가받는 최치원은 중국에까지 그의 문장이 이름을 떨치지만 실상 신라 내에서 그가 이룬 개혁적인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가 진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품계에 가로막힌 재능 있는 인재를 활용하지 못한 신라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은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는 왕건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며 신라의 1,000년은 끝을 맺게 된다.
신라의 몰락과 멸망을 단순히 골품제의 한계로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어떠한 나라는 왕권이 안정되면 거기에 안주하게 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기보단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비단 이러한 현상은 신라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의 마지막이 그러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 등급을 나누는 골품제가 없었다면 현재의 신라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달랐을 것이다. 특히나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였음을 감안한다면 개방적인 사회와 골품제 이 이질적인 두 조합이 결국 신라를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 부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라의 의미
신라의 의미는 예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다룬 적이 있다.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은 덕이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이며, '라'는 동서남북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국가의 이름에서도 신라 특유의 개방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