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2. 우리 역사의 시작 '단군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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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우리의 역사는 기원전 2,3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늘님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이 평화롭게 살 땅을 살펴보니 가장 좋은 곳이 아사달임을 알고 3명의 신하를 데리로 아사달에 장착하였다. 환인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은 나라를 건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고 약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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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33년의 아시아, 그리고 조선이라는 이름

 

조선은 그렇게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 중국 한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존속하였다.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는 대략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해당한다. 인류가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 이루게 되면 비로소 국가라는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부족 형태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부족민들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부족장의 힘이 커지게 되면서 서로의 부족을 침범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침략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은 자신을 왕으로 하는 국가를 건립하게 된다. 당시의 중국은 한나라가 건국되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향후 조선은 위만조선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한나라의 위만이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당시 조선의 중심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이가 곧 위만 조선이다. 조선의 대략적인 위치는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및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에 이르는 꽤나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실존한 나라인지는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초대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의 기록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조선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조선의 연대와 역사, 문화 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단군이 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는데, 그 원래 명칭이 '주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가끔 tv 드라마 등 매체에 등장하는 단군 조선이전 환웅이 지배하던 나라를 '주신'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도 주신 나라가 등장하는데 마찬가지 이유다. 또한 조선이라는 단어 그대로를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현세 작가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신시라는 땅이 결국은 주신을 뜻하는 것이다. '천국의 신화'는 우리의 신화를 너무 중심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다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일부 스토리상에 등장하는 부족 간의 전쟁이나 조선 건국 이전의 토속신앙에 관련된 내용은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다. 특히나 중국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우리나라를 동이족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런 것들을 비추어볼 때 후자의 주장도 꽤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단군 조선의 연대(향후 이성계의 조선과 차이를 두기 위해 단군 조선이라 함)

 

단군신화
단군신화

 

 

문헌상에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연대에 대해서도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단군 조선을 건립한 단군이 1,5000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은 아마도 신화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하는 부분은 당시 청동기 시대의 토테미즘 문화를 생각할 수 있다. 신화에는 호랑이와 곰이 환웅을 찾아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에 환웅이 21일을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면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호랑이는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지만 곰은 그 기간을 다 버티고 여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환웅은 이렇게 곰에서 여자로 변한 웅녀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게 되고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이러한 부분은 신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당시의 토테미즘 문화로 볼 때 호랑이를 숭상하는 민족과 곰을 숭상하는 민족 간의 침략전쟁 중 곰을 숭상하는 민족이 승리하여 당시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즉 단군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를 가진 세력과 곰을 숭상하는 토착 체격이 결합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 마늘, 쑥, 그리고 21일 같은 내용은 대부분이 고대 토네이즘과 샤머니즘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우리 옛 조상의 일반적인 문화나 풍습을 대략적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기록으로 남긴 문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조선의 연대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고려 시대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에도 조선이 등장하지만 그 연대와 관련해서는 일연 스님 역시 정확한 조선의 연대를 구분 짓지 못하였다. 기록으로 등장하는 조선의 첫 번째 역사는 기원전 7세기 중국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는 조선에 대한 역사라기보다는 지금으로 생각하면 하나의 에피소드이다. 술에 관련된 내용으로 술에 취한 남성이 자살(?) 했다는 그런 자그마한 토막의 이야기다. 조선은 중국의 문헌에 정확한 국가로 표현되기보다는 대략적으로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략 기원전 7세기에서 4세기경에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데, 이 기록을 유추해 보면 이때 당시부터 중국과의 물자 교역을 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단군 조선의 정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문선으로 기록되어 있는 자료가 미흡하기 때문에 단군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나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그들의 문화와 풍습이 조선에 전해졌다고 가정하면 당시 중국의 문화나 정치형태에서 조선의 그것을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당시는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정치체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군왕검이라는 표현 자체가 제정일치를 말하는 표현인데, 당시는 제사를 의미하는 '제'와 정치를 의미하는 '정'이 합쳐진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제정이 일치된 사회의 우두머리이기에 상당한 권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현대적인 개념에서의 생각이고 당시는 '제'와 '정'을 구분하여 통치할 만한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제정이 일치된 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고대는 '정치'보다는 '제사'에 더 큰 의미를 두었는데 이런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위치와 권력이 '정치'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는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에 기반을 둔 토속신앙이 중심이 된 사회로 길, 흉, 화, 백을 '점'을 쳐서 보았기에 정치가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관습과 풍습, 문화는 조선 이후에 건국된 우리의 선조들인 부여, 동예, 옥저, 고구려 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드라마 '주몽'에서 고구려의 왕인 송일국보다 여미을 신녀의 세력이 대등하거나 혹은 더 방대했음은 이러한 우리의 문화에 비추어볼 수 있다.

 

 

단군 조선의 사회

 

당시의 사회상을 비추어볼 수 있는 몇 가지 기록이 남아있는데 중국의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서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에는 '8조법'이라 하여 법률이 정해져 있었다. 이 법은 권력층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 법에 따르면 당시에 벌써 정확한 계급사회로 나누어지고 사유재산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현재는 '8 조법'에서 3가지만 전해져오고 있다. 그 내용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데 죄를 용서받으려면 50 만전을 내야 한다. 위 3가지 법률에 비추어보면 단군 조선은 계급이 나누어진 계급사회였던 점과, 노비가 있음을 비추어보면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던 사회로 여겨진다.

당시 조선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가장 인기를 가진 상품은 모피를 비롯한 가죽이었다. 조선에서 생산된 모피와 가죽은 중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의 지리적 영향으로 품질 좋은 모피와 가죽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군 조선의 역사적 기록

 

단군 조선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마다 조금씩 내용이 다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군 조선의 기록은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이지만, 그 외에도 고려 시대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 조선시대에 쓰인 '삼국사절요' 등에 나타나는 조선에 대한 기록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자가 성행하던 시기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측면에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평가받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조선열전'이라는 편이 있는데 여기에도 위만조선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내용이 부족하다고 하여 우리의 역사를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단군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신화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배제를 해야겠지만 그런 신화적인 내용에 나오는 부분이 실제 당시의 사회적 모습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나 현시점에서 우리는 북한에 위치한 조선의 유물이나 유적 등에 대해서 세세하게 연구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는 시간이 흐른 후에 일정 부분은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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