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을 다시 통일시킨 건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왕 건이다. 왕 건은 궁예밑에서 세력을 키운 후 그를 몰아내고 고려를 다시 건국하였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외국인이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korea'의 원형이 되는 'corea'라는 고려 시대 벽란도를 통해 무역을 하던 외국 상인들이 고려를 'corea'로 부르며 외국에 한반도를 알리게 되는데 이후 고려 이후 한반도는 외국에서 'korea'로 불리게 된다. 이번 포스팅은 한반도 중세시대를 연 코레아!!!! 고려에 대한 포스팅이다.
왕 건의 삼국 통일
통일신라 말기 전국각지에서 일어났던 호족들은 각각 강원도 지방의 궁예, 전라도 지방의 견훤이 주변 지역을 점령하며 후삼국 시대가 개막하였다. 궁예 밑에서 세력을 키우던 왕 건이 결국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고려를 건국하게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바치면서 신라의 1,000년 사직은 끝을 맺게 되는데 이때가 935년이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로 알려진 '마의태자'는 이에 반대하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평생을 나오지 않고 거기에서 생을 마감한다.
견훤은 그의 아들 신검에게 나라를 빼앗기며 금산사에 억류하게 되는데, 견훤은 이때 스스로 고려에 귀순하게 된다. 드디어 왕 건은 마지막 남은 신검의 세력을 축출하며 다시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는데, 이렇게 고려가 온전히 한반도의 주인이 된 시기가 936년이다.
[훈요십조]에는 정말 왕 건은 전라도 사람을 배척하라고 했을까?
훈요십조는 한반도를 다시 통일한 태조 왕 건이 후세에 전한 열 가지 가르침이라고 전해진다. 왕 건은 20세의 나이에 궁예의 휘하에서 전장을 누비기 시작하였고, 42세가 되던 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후에도 18년이란 시간 동안 후백제의 견훤과 피 말리는 정복전쟁을 반복하였고, 그의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전장 속에서 40년이나 버티며 살아남아 고려를 건국한 왕 건으로서는 자신이 건국한 고려 역시 후에 다른 이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존재하였다. 60세에 한반도를 통일하고 66세에 사망하기 6년간 그의 고민은 그가 이룩한 고려를 온전히 오래도록 지속시키고 싶어 하였다. 이에 왕 건이 '훈요십조'를 통해 그의 후손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전하려 하였다.
훈요십조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건 훈요십조를 실제 왕 건이 작성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많은 역사사료에서 왕 건이 직접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훈요십조 일부 문항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약간의 논란이 발생한다. 또한 훈요십조의 원본은 거란침입당시 소실되었고, 지금 전해지는 훈요십조는 최제안이라는 자가 최항이는 사람의 집에서 발견한 것인지, 작성한 것인지 정확하지 않은 훈요십조의 내용을 정리하여 다시 임금에게 전달되었고 이가 지금까지 알려진 훈요십조의 내용이다.
훈요십조와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되는 사항은 바로 전라도 사람을 중요관직에 앉히지 말라고 전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훈요십조의 8항을 해석한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차현 이남, 공주땅 강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를 배역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 국적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나 진. 역의 잡역에 속했던 자가 혹 세다'라는 부분이다.
이것을 두고 후에 일부 학자들이 전라도, 충청도 인물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올바른 역사적 해석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반역을 감행을 자들은 단순히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삼국 통합에 반감이 있는 자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나주(전라도) 지역은 고려 초기 당시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당시 나주 지역 호족의 딸인 오 씨가 왕 건의 두 번째 부인인 장화왕후이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무'가 태자로 책봉되는데 그가 고려 2대 국왕인 혜종이다. 이처럼 나주(전라도) 지역은 왕 건에게 호의적이었고 나주 지역의 호족인 나총례는 후에 삼한공신인 대광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고려에 저항했던 지금의 공주와 청주 지역의 인사들이 왕 건과 대척점에 있었다. 이들은 원래 궁예를 지지하던 세력이므로 왕 건이 궁예를 몰아내자 그에 대한 반감으로 후백제 견훤과 연결하여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많은 타격을 주었다. 혹시라도 8조가 지역적 배척을 의미한다면 오히려 전라도보다는 이들 공주, 청주지역이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결코 자신의 후손들에게 이러한 편협적인 내용을 전했을 리는 만무하다. 단지 고려에 반감을 가지는 세력이나 인물에 대해 경계하라는 정도의 해석이 좀 더 현실적인 해석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는 오롯이 본인만의 생각이며 이번에 관련된 내용을 공부하며 찾아본 결과 어디에도 훈요십조에서 전라도 사람을 배척하라는 내용은 없었다.
개방적인 고려 사회
우리 옛 왕조들은 농경 국가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보통 인류의 생활 형태를 농경 국가, 유목 국가, 해양 국가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고려의 경우 농업 국가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해양 국가이기도 했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외국과의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국가이리도 하다. 외국과의 교역은 단순히 물자가 오가는 무역을 넘어서 외국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양 국가의 특징으로 인해 고려는 한반도 역사상 신라와 더불어 가장 개방적인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고려의 무역을 기반으로 한 외국과의 교역은 당시의 중국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당시 중국은 '당'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로 당나라는 해상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는데, 자연스레 신라와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도 교역을 하는 세계 최강국중 하나였다. 당나라 이후 중국을 통일한 '송'역시 해상 무역을 발달하였고, 고려 역시 자연스럽게 송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해양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가 출범하기 전 통일 신라 시대, 중국은 당나라로 해상 무역을 확장해 부를 축적하던 시대였다. 활발한 교역을 하던 당나라는 신라와도 교역이 활발했다. 당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역시 해상 무역을 활발하게 추진하며, 고려도 자연스럽게 해상 무역을 적극 추진하고 다른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또한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기반으로한 국가였기에 군사적 대립보다는 서로의 문화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데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왕 건 역시 그의 조상들이 송악을 기반으로한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문물을 수용하였기에 왕 건은 외국 문물이나 문화를 수용하는데 특별한 거부감이 없었으며, 이는 즉 고려의 사회성으로 연결되었다. 특히나 '문종' 시절의 기록에 이미 활발한 교역으로 인해 국가의 부를 축적했다고 생각될만한 자료도 남아있다.
이러한 개방적인 사회상은 고려의 가요등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한데, 우리가 송지효, 조인성 주연의 영화로만 알고 있는 '쌍화점'은 고려 가요로 13세기 당시 이슬람 상인과 고려 여인의 사랑을 그린 노래로 전해져오고 있다. 참 재미있는 일이긴 하다. 쌍화점에서 쌍화는 만두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그럼 만두를 사이에둔 남녀간의 사랑노래인가?? ^^ 일부 자료를 좀 더 찾아보았지만 제대로 해석된 내용을 찾지 못해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한다. 찾은 내용도 글 자체가 예전 우리말이어서 해석하기도 겁~~~나 어렵다.. ㅠㅠ
또한 고려사회에서의 여성은 조선시대와 달리 사회활동에 있어서 많은 제약을 받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남존여비는 근대 이전 유교 문화권에서 사용되던 남녀 불평등을 일컫는 유교용어이지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유교적 남녀불평등은 조선에 비해 현저히 없는 편이었다. 이처럼 고려는 다른 한반도의 국가들에 비교해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정책들로 국가를 운영하였는데, 고려가 다른 한반도를 지배한 국가들과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야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