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6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럼 1948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2006년 이명박 정부의 '건국60년 기념식'과,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건국 100주년선언' 사이에는 어떤 주장들이 엇갈리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시작은 언제일까????.. 1919년? 1948년?(이 포스팅의 결말이자 시작!!!!)
2006년 이명박 정부의 '건국60년 기념식'과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건국 100주년 선언'.. 어떤 것이 정답일까???? 이번 포스팅을 작성하면서 불현듯 떠오른 2006년과 2019년의 기억이다.
'건국60년'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국가의 3요소인 국민/영토/주권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래 사진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작성한 정부 수립 대통령 기념사이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명기되어있다.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가 1948년 정부 수립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강조한것이다.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783년 파리 조약에 의거하여 독립을 인정받았다. 1787년 헌법이 제정되고 1789년 미연방정부가 수립되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마찬가지로 법통(legitimacy)가 기원한 것이며, 1789년 미연방정부 수립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성격이 동일하다.
국가의 3요소는 1933년에 등장한 이론이어서 이를 소급 적용하는것은 무리라는 주장도있다. 미국과 필리핀의 경우 한 나라의 건국의 기준을 국제법을 잣대로 하는것이 반드시 맞다는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존재는 자주적 독립의 선포에있지, 국제법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3요소가 없지만 팔레스타인의 경우 우리는 국가로 인정하고있고, 또한 대만의 경우 국가의 3요소를 모두 갖추었지만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왜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의 판단이 다른것인지 잘 이해는 안가지만 어쨌든 현재 이러한 두 가지 견해차이로 국회에서 8월 15일이 다가오면 치고박고 난리블루스를 친다..왜 그럴까.. 그럼 글쓴이는?? 이번 포스팅의 제목이 '1919년 대한민국의 시작' 이다.
국권을 상실한 '한일병탄늑약'.... 그리고 '경술국치'
세계열강들의 제국주의 속에서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선포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지만 3년이 채 되지 않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이 앗아간 '한일병탄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암흑의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게된다.
아래사진은 한일병탄 조약 시 전권위임장으로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는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하지만 1917년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방향과 실질적인 이론등의 정립을 위해 임시적인 정부의 수립에 관한 민족대회의의 소집을 제의/제창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게된다. '대동단결선언'은 '한일병탄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게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포기한 주권은 대한국민에게로 승계되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이 '대동단결선언'의 발기인은 신규식 선생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박용만, 윤세복, 조소앙, 신석우, 한진교 등 총 14명이다.
조선청년 독립단의 2.8 독립선언
1910년 '한일병탄늑약'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통해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며 무단통치를 감행하였고,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시키기위한 일환인 창씨개명등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국내에서 활동하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과 만주, 미주 등으로 망명하여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원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발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대립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터키등의 동맹국 식민지에 적용하려던 발표였다. 하지만 이 발표는 전세계 모든 식민지를 비롯한 핍박받는 민족에게 자국의 유리한 방향으로 이 원칙을 해석하며 독립을 요구하게 된다. 이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하던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은 '재미한인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한국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였다. 또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대한의 독립을 호소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미국 정부의 방해(여권발급거부)로 실패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도 Japan Advertiser와 아사히 신문에 이러한 소식이 보도되면서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회'도 독립에 대한 노력을 앞당기게 된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의 활동이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생들의 귀국과, 재미/재중 동포들의 활동들이 서서히 국내에도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때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거행되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유학생학우회, 조선학회, 조선여자친목회 등의 애국단체들은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의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에 대한민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하는 '독립선언서'를 각국의 대사와 공사, 일본정부 요인,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등에 우편으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11명의 대표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게 된다. 이것이 3.1 운동의 전초가 되는 '2.8 독립선언'이다. 10명의 대표자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모두 잡혀가게 되는데, 이때 이광수는 상해로 빠져나가 이 소식을 해외에 전하게 되며, 이렇게 알려진 '2.8 독립선언'은 다음달 3월 1일에 일어난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된다.
참고로 3.1 만세운동 시 선언한 독립선언서는 '기미독립 선언서' 이며, 2.8 독립운동 시 선언한 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 선언서' 혹은 '무오독립 선언서'로 불린다. 무오독립 선언서의 경우 선언서의 작성과 서명이 사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하여 별칭으로 '무오독립 선언(서)' 혹은 '길림 선언'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광수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춘원 이광수로 그는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는 작가였다. 그는 초창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을 주도했으며, 상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 신문사'의 사장을 맡아 글로써 대한민국의 독립을 알리는 일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 친일로 돌아서게 된다. 그는 1940년 '매일신보'에 '황민화 운동'과 '창씨개명 정책'등을 지지하며 본인의 이름 또한 '가야마 미스로'로 개명한다. 이광수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이후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민족대표 33인,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 그리고 18세의 유관순 불꽃으로 산화하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의 발표와 '2.8 독립선언'등으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계속 고조되어갔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광무 황제(고종)가 붕어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68세의 광무 황제는 상당히 건강한 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무 황제가 갑작스럽게 중병으로 붕어했다는 발표 이후 국민들은 의문을 품으며, 이때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며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점차 크게 동요되고 있었다. 광무 황제의 붕어 이후,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민족 지도자들은 이때가 대한민국의 독립을 꾀할 기회로 판단하며, 3.1 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권동진과 오세창이 중심이 된 천도교 측에서는 1918년 12월경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였는데, 광무 황제의 붕어를 계기로 조직적인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들의 계획에 최 린 역시 합류하게 되는데, 최 린은 '2.8 독립선언'의 일본 소식을 듣고 그 역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셋은 당시 천도교의 3대 교주이자 동학 지도자인 손병희를 찾아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들이 먼저 정립한 독립운동 원칙은 독립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등 3가지를 대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다방면으로 일본에 압력을 가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방법을 합의하였다. 하지만 이들 3인은 모두 천도교이므로 천도교 단독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불교, 당시 유림 등 각 교단이 모두 모여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대한제국 당시의 유지들을 민족 대표로 추대할 것을 합의하고 송진우, 최남선 등이 박영효, 한규설 등 대한제국 말기 인사들과 협의하였지만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즈음하여 광무 황제가 붕어하게 되는데, 이들은 다시 종교단체등과 협의를 진행하게 된다. 당시 기독교 측의 대표 격은 평안북도 청주의 이승훈이라는 사람이었데, 그에게 연락하여 서울에서 다시 기독교 측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승훈은 2월 12일경에 김성수의 별장에서 송진우, 신익희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최종적으로 합류하기로하였다. 기독교 측이 이승훈을 대표로 진행되었다면 불교계는 최 린이 나서 만해 한용운 선생과 독립운동에 관련하여 협의하고 함께 연합하기로 하였다. 물론 중간에 유림을 대표하는 곽종석과의 교섭실패등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민족대표 33인으로 결정하게 된다. 아래는 민족대표 33인의 이름과 이후 행적에 대한 설명이다.(나무위키 참조)
종교 | 이름 | 생몰 | 출신 지역 | 신분 | 형량 | 이후 행적 |
천도교 | 손병희 | 1861~1922 | 충북 청주 | 천도교 3대 교주 | 징역 3년 | 병보석 출감 후 사망 |
권동진 | 1861~1947 | 충북 괴산 | 천도교 도사 |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 ||
관련 1년 복역 | ||||||
오세창 | 1864~1953 | 한성 | 서예가, 전각가, 및 금석학 | |||
역사가로 활동 | ||||||
임예환 | 1865~1949 | 평남 평양 | 징역 2년 | - | ||
나인협 | 1872~1951 | 평남 성천 | - | |||
홍기조 | 1865~1938 | 평남 남포 | - | |||
박준승 | 1866~1927 | 전북 임실 | - | |||
양한묵 | 1862~1919 | 전남 해남 | - | 재판 중 사망 | ||
권병덕 | 1867~1944 | 충북 청주 | 징역 2년 | - | ||
김완규 | 1876~1949 | 한성 | 천도교 전제관장 | - | ||
나용환 | 1864~1936 | 평남 성천 | 천도교 도사 | 천도교 교역 | ||
이종훈[5] | 1856~1931 | 경기 광주 | 천도교 장로 | 천도교 교역 | ||
홍병기 | 1869~1949 | 경기 여주 | 고려혁명당 관련 징역 2년형 | |||
이종일 | 1858~1925 | 충남 태안 | 천도교 월보과장 | 징역 3년 | 제2의 독립선언문 작성 | |
최린 | 1878~1958 | 함남 함흥 | 보성고보 교장 | 변절 | ||
불교 | 한용운 | 1879~1944 | 충남 홍성 | 신흥사 승려 | 신간회, 사회계몽 | |
백용성 | 1864~1940 | 전북 장수 | 해인사 승려 | 징역 1년 6월 | 임정 지원 | |
개신교 | 이승훈 | 1864~1930 | 평북 정주 | 장로교 장로 | 징역 3년 | 오산학교 운영 |
박희도 | 1889~1952 | 황해 해주 | 중앙기독교청년회 | 징역 2년 | 변절 | |
간사 (북감리교) | ||||||
이갑성 | 1889~1981 | 경북 대구 | 세브란스 부설병원 | 징역 2년 6월 | 임정, 흥업구락부 사건 | |
사무원 (장로교) | 연루 7개월 복역 | |||||
오화영 | 1880~1960 | 황해 평산 | 남감리교 목사 | 광주학생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 ||
연루 옥고, 해방 후 재북 | ||||||
최성모 | 1874~1937 | 황해 해주 | 북감리교 목사 | 징역 2년 | 목회활동 | |
이필주 | 1869~1942 | 한성 | 정동교회 목사 | 목회활동 | ||
김창준 | 1889~1959 | 평남 강서 | 북감리교 전도사 | 징역 2년 6월 | 목회, 신학 공부, 한국전쟁 중 월북 | |
신석구 | 1875~1950 | 충북 청주 | 남감리교 목사 | 징역 2년 | 목회활동 | |
박동완 | 1885~1941 | 경기 포천 | 기독교신보사 서기 | 신간회, 목회활동 | ||
(북감리교) | ||||||
신홍식 | 1872~1939 | 충북 청주 | 북감리교 목사 | 목회활동 | ||
양전백 | 1869~1933 | 평북 선천 | 장로교 목사 | - | ||
이명룡 | 1872~1956 | 평북 철산 | 장로교 장로 | - | ||
길선주 | 1869~1935 | 평남 안주 | 장로교 목사 | 무죄 | 목회활동 | |
(구금 1년7월) | ||||||
유여대 | 1878~1937 | 평북 의주 | 징역 2년 | 목회활동 | ||
김병조 | 1877~1948 | 평북 정주 | - | 상해로 망명, 임정 활동 | ||
정춘수 | 1873~1953 | 충북 청주 | 남감리교 목사 | 징역 1년 6월 | 변절 |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인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주장해 온 손병희, 오세창, 최 린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국권반환 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한다. 그리고 1919년 2월 대한제국의 중추원 의장을 지낸 김윤식을 찾아가 독립선언서의 서명을 부탁하지만 독립청원서를 내는 것은 찬성하지만 독립선언서 발표에는 반대해 거절당했다. 또한 박영효를 비룻한 저명인사들까지 반대를 하며 난항을 겪게 된다. 이즈음 광무 황제의 붕어소식이 들려오고 이를 계기로 다시 각 종교단체와 지도자급 인사들과의 교섭을 진행하며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한때 독립선언서 발표에 대해서 이견이 있었지만 최 린의 주장으로 최종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초의 독립선언서 작성자는 최 린의 추천에 의해 최남선이 작성하였다. 당시 최남선은 전국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신/구 학문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갖추었을 뿐 아니라 작문에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최남선이 변절하게 되면서 후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변절자에게 독립선언서를 짓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작성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미 초안은 완성된 뒤였다. 지금 전하고 있는 독립선언서의 끝에 위치한 공약 3장은 후에 한용운 선생이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민족 대표 33인의 서명 이후 28일부터 전국으로 전달, 배포되면서 3.1 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예정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최 린은 이 시간에 맞춰 태환관을 통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가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고 미리 통보하였다. 민족 대표들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식사와 함께,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장한 뒤 태화관을 포위한 일본 경찰들에게게 연행되었다.
이러한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승 등 이북지방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곳은 서울과 경의선 및 경원선 철도 주변에 있어서 연락이 쉬웠기 때문에 같은 날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민족 대표 중 기독교 측 대표들이 대부분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3월 1일에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빠르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3월 2일 경기도 개성, 3일 충청남도 예산, 4일 전라북도 옥구, 8일 경상북도 대구, 10일 전라남도 광주와 강원도 철원, 함경북도 성진, 11일 경상남도 부산등 전국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3월 19일 충청북도 괴산 시위까지 전국에서 일제히 3.1 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여기서 참고로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비폭력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국적으로 3월 한 달에 거쳐서 연쇄적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3월 21일 제주에서의 시위가 시작되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3.1 운동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유관순 열사'일 것이다. 그녀는 1902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하게 되고, 을사늑약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토론회, 강연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대한독립에 대한 꿈을 이어갔다. 1919년 3.1 독립 만세운동에도 당연히 참여하고 붙잡히게 되나 곧 석방되게 된다.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모르는 유관순 열사의 17세 이전의 생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1년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학교 휴교령이 내려지게 되자 그녀는 고향인 충청남도 목천군인 지금의 병천면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부친인 유중권과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의 3.1 독립 만세운동을 전하며, 자신이 몰래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꺼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그리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 유중권, 유중무 등과 병천시장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유중권을 비롯한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순국하게 된다. 유관순은 처음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여기에서 본인의 친 오빠 유우석을 만나는데 그는 '공주 영명학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되었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게 되는데, 함께 재판받은 모든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항소하지만 그녀는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상고하지 않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심한 고문을 받게된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도 단축되었다. 하지만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인해 1920년 9월 28일 순국하게된다. 그때 그녀의 나이 18세밖에 되지 않았다.
영화 '항거'를 보면 유관순 열사(고아성 배우님)의 마지막 생을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의 탄생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의정원'을 창설하게 된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 형태, 헌법등을 논의하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신석우의 주장으로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하여 정하게 되었다. 신석우는 당시 만석꾼의 아들로 1924년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항일 독립신문으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조선일보를 생각하면 큰~~~~ 일난다...-_-;;
또한 여기서 재미난 일화 중 하나는 국호를 정할 때 모인 지도자들 중 여운형 박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굳이 이름에 대한을 쓸 필요가 있냐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신석우의 주장으로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후에 1945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활동하는데 이들은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돕겠다는 하지 사령관의 포고문이 9월 2일 발포되었고, 9월 6일 미군선발대가 조선호텔에서 일제 측과 예비교섭을 진행하던 그날 저녁 급하게 '전국인민대표자회의'라는 이름으로 건국을 발표한다. 여기에서 조직의 이름을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결정하게 되는데, 중앙인민위원 55명의 구성이 민족주의자 9명, 여운형 박사를 비롯한 중도좌파가 10명남짓이고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특히나 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박헌영계의 재건파 공산당계열이었다.)
원래는 상해에서 창설한 임시의정원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지역에서 건국에 대한 활동과 조직들이 난무하였다. 이때 대한국민의회와 상항이 임시정부가 먼저 통합하기로 하였지만 1차 좌절되고, 대한국민의회의 대다수를 임시의정원에 포함시킨다는 조건으로 결국 통합하게 된다. 이들은 정통성과 기본적인 틀은 한성정부를 따르되 위치와 국호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보를 따르는 것으로 최종 합의안을 완성하였다. 그렇게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이동휘를 추대하며 내각도 완성되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렇게 1919년 시작되었다.
(본 포스팅은 글쓴이의 아주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