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번성하려면 최고지도자(대통령 혹은 왕)의 능력이 뛰어난것이 우선일까, 아니면 그를 뒷받침해주는 신하(영의정 혹은 재상)의 능력이 뛰어난것이 우선일까? 물론 능력있는 신하를 발굴하는 최고지도자의 능력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면에서 고구려의 9대 군주인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등용시켜 그에게 전권을 주며 고구려의 번성토록한 능력있는 최고지도자였다. 을파소와 고국천왕, 그리고 진대법에 관한 이야기다.
초기 불안정한 왕권과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고구려
추모성왕(주몽) 고구려를 건국한건 기원전 37년경이다.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술된것을 뜻하며 실질적인 건국년도에 대해선 이견이 있는편이다. 초기 고구려역시 다른 고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군주제 국가이긴하지만 강력한 왕권체제를 구축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를 건국할당시 주몽은 당시 졸본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당시 졸본지역은 계루부를 비롯하여 연노부, 소노부, 비류부, 절노부등 5개 세력이 주를 이루고있었고, 주몽의 아내인 소서노는 계루부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졸본으로 건너온 주몽의 부여계 세력은 졸본지역의 토착세력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졸본에서 가장 세력이 큰 계루부의 족장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우군세력을 만들수 있었지만, 다른 세력과도 적절한 연대를 이루며 왕권을 안정시켜야만했다.
고구려가 건국된 졸본지역은 농사를 짓는데 이로운곳은 아니었던듯 하다. 인구역시 그렇게 많지 않았기때문에 초창기 고구려는 주변 국가들의 소나 가축들을 약탈하는 소규모 약탈전쟁이 필수적인 생계요소였다. 특히나 당시 졸본에는 전쟁에 사용할 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주변국인 부여 등의 나라에서 말을 약탁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침략전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변방지역의 소규모 약탈이 대부분이었고, 대무신왕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기마부대를 구성하여 주변국들과의 침략전쟁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대무신왕은 고구려 3대국왕으로 초창기 고구려의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왕 인물로, 대무신왕이라는 시호가 '큰 전쟁의 신'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있는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슬픈 이야기속 남자 주인공인 호동 왕자가 바로 대무신왕이다.
이렇듯 초기 고구려는 아직 농경사회가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채, 약탈과 침략전쟁이 주를 이루었고 6대국왕인 태조대왕에 이르러서야 고구려 인구 대부분이 농경사회로의 경제 체제전환이 이루어지게된다.
- 소서노의 부친은 연타발이며 그가 '연'씨였다는 기록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 졸본은 주몽이 처음 고구려를 건국한후 도읍으로 정한곳이다. 보통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과 평양성만을 기억하는데, 첫번째 수도는 졸본성으로 건국 후 40년이 지난후인 2대국왕 유리왕대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게된다.
어디선가 국가에 힘든일이 생기면 뜬금없이 영웅은 나타난다.... '을파소'의 등장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이루었지만 고구려가 속한 지역자체가 농사를 짓기에 매우 척박한 곳이었다. 그리고 국정을 책임지고 이끌 지도자역시 각 부족들이 서로 견제하는 바람에 제대로된 국정운영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의 9대국왕인 고국천왕 시절인 190년 왕후 우씨의 친족들인 어비류와 좌가려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자제들은 남의 재산을 노략질하는 일이 벌졌다. 고국천왕은 외척이지만 그들을 죽이려하자, 그들은 연나부 일부 세력들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게되었다. 191년 반란 세력은 국내성을 공격하지만 고국천왕은 주변 병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반란을 잠재운다. 이때 고국천왕은 5개 부족의 세력으로 운영되는 관습에서 벗어나 제대로된 관직체계의 필요성을 체감하며 귀족들(각 부족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인재를 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처음 그들이 천거한 이는 '안류'라는 인물로, 그는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며 다른 이를 천거하는데 그가 바로 '을파소'이다. 원래 을파소는 유리왕 시절 재상 벼슬을 지낸 을소의 증손자로 귀족 신분이지만 당시에는 서압록곡 좌물촌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을파소가 다시 관직을 나서기전까지의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을파소는 고국천왕에게 발탁하여 국정에 참여하게된다.
세계 최초(?)이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주도 복지정책 '진대법'의 시행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최고의 관직인 '국상'에 제수하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을파소가 국상으로 제수되던 당시의 고구려는 앞서말한 외척들의 반란으로 인해, 최대한 빨리 국정을 안정시켜야했다. 이에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속에서 교육제도를 개편하고 부정부패 방지, 인재 선발, 경제 정책개혁등 고구려의 부국강병 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책 중 고국천왕 16년에 시행된 '진대법'은 고구려가 후에 전성기를 이루는데 기초가 되는 정책이다.
'진대법'은 식량이 떨어지는 봄에서 여름사이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인 10월에 다시 돌려받는 국가주도의 복지제도이다. 이러한 진대법의 시행은 백성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생업을 이어갈수 있게하여 국가의 재정 역시 튼튼해지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백성들에게 시행한 '진대법'의 효과로 주변국가들의 농민들또한 고구려로 이주하게되면서 자연스럽게 고구려는 번성하게 되는 효과를 얻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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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대법'이 을파소가 고안하여 펼친 정책인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지않다. 하지만 을파소가 국상으로 있던 당시 고구려에서 진대법이 시행되었기때문에 당시 최고 국정운영자인 을파소였기때문에 현재 진대법을 직접 시행한 인물이 을파소인것으로 알려져있는 것이다. 물론 진대법 자체는 을파소가 고안한 정책이 아닐지라도 당시 국정 운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진대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을파소의 영향력은 꽤 높았을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가지 한국사의 자랑아닌 자랑을 덧붙이자면, 진대법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먼저 국가가 주도하여 진행한 복지정책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진대법은 11세기 송나라의 개혁 정책인 '청묘법'과 조선시대 농민 구제 제도인 '환곡' 제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때 시기가 대략 서기 200년 전후인데, 다른 세계사에서 이와 비슷한 국가주도의 복지정책이나 사회정책을 살펴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복지 시설은 400년경에 지어진 인도의 병원으로 나온다. 무조건 '우리가 1등이다' 주의는 아니지만 재미삼아 세계각국의 복지나 사회정책과 비교해보는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렇게 을파소는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때가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203년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때 모든 백성들이 슬퍼하였다는 것을 보면 백성들에게 존경받은 뛰어난 재상이었던것으로 보인다. 을파소는 고구려 전체를 둘러보아도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