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벌거벗은 한국사 16. 귀산과 추항에게 가르친 원광법사의 불교관 '세속5계'

반응형
반응형

 

 

 

신라의 풍습을 얘기할때 빠지지않는 주제가 바로 화랑과 골품제이다. 신라의 적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이 골품제라면 화랑은 신라가 삼국의 주인이 될 수 있던 근본이 되었다. 이번 포스팅은 귀산과 추항의 질문에 '원광법사'가 답하고 그에의해 정립된 화랑의 가르침 '세속5계'와 화랑들의 이야기다.

 

 

15세 관창, 죽음으로 백제를 섬멸하다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전장인 황산벌에서 신라의 화랑 15세 관창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계백을 목을 베고자하였다. 계백은 관창이 어린것을 알고 풀어주기를 반복, 관창은 끊임없이 홀로 계백을 죽이기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계백은 이제 백제가 망하겠구나 여기고 관창의 목을 잘라 신라진영으로 보낸다. 관창의 죽음으로 분노한 신라의 군대는 결국 계백의 5천 결사대를 전멸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킨다.

 

신라시대 재밌는 일화 중 빠지지 않는것이 김유신이 술에취한채 기생집에 도착한후 자신의 말을 베어버린 일화와, 바로 백제의 멸망을 이끈 화랑 관창의 이야기이다. 두 일화가 전하는 모든 메시지는 바로 신라의 독특한 청소년 활동인 '화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광법사가 정립한 '세속5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가르침이 된다.

 

실제로 관창이 스스로 계백의 백제군을 향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알려진대로 당시 관창은 15세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국가간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 스스로 적진을 향해 다이나마이트를 온몸에 휘두르고 뛰어들어간것이다... -_-;; 관창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등장하는 최연소 위인일것이다.... 근데 과연.....정말 그럴수 있을까.... 관창을 폄하하는게 아니고.. 난 중학교 2학년때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탁구치기 바빴는데... ㅠㅠ 물론 관창의 아버지가 신라의 좌장군 김품일 장군이고, 신라 대야성주인 김품석의 조카인 신라 귀족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귀족이었다.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로 백제 성왕이 대야성을 침략했을때 대야성이 함락되며 사망하였다. 이때 김품석의 부인도 함께 죽음을 당하는데, 그녀가 바로 '고타소'부인으로 김춘추의 장녀이자 문무왕의 여동생이다.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인것은 두말할것도 없고, 이때 김춘추가 백제에 의해 자신의 딸이 죽게되자 눈돌아가서(?) 백제를 완전히 없애버리기위해 철치부심하게된다. 김춘추는 이를 동력삼아(?)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결국 백제를 멸망시켜버린다!!! 이것이 삼국통일의 시작인 백제의 멸망이다. 관창은 이러한 신라 귀족의 중심이었다. 화랑이라는 제도 자체가 성골과 진골출신의 자제들이 신라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교육목적의 학교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삼국을 통일하는 당위성과 대외적으로 신라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데에 관창만한 모델(?)은 없었을것이다. 어쩌면 그는 신라의 최고위 귀족층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명성을 유지시키기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인물은 아니었을까.... <이 내용은 글쓴이의 주장입니다..^^>

 

 

관창은 정말 스스로 죽음을 각오했을까
관창은 정말 스스로 죽음을 각오했을까

 

 

반응형

 

 

우리나라 아이돌의 원조(!!!!) 남모와 준정......원화( 原花)로 신라의 청춘들을 이끌다

 

 

삼국 중 가장 번성기가 늦게온 신라는 지증왕 이후 고대국가로 자리잡기 시작하며 일련의 정복활동을 이어간다. 지증왕 시절 이사부 장군으로 하여금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하게하는데, 그 이후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편입된다. 진흥왕 시절에는 좀 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삼국통일에 주력이 될 관료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원화'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한다. 진흥왕 시절 처음 시행된 '원화'는 아름다운 여자 둘을 뽑아 그녀들을 중심으로 인재를 모아 서로 경쟁하며 성장하는 하나의 교육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 원화의 이름이 남모와 준정이다. 어떻게보면 남모와 준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이돌'정도로 생각하면 되지않을까. 이 아름다운 여인 둘을 중심으로 신라의 청소년들은 모여들었고, 그들은 원화를 보좌하며 심신을 단련시켜 신라의 기둥이 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하지만 원화에 뽑힌 두 여인의 시기와 질투때문에 한명은 만취상태에서 익사하고 그 일을 사주한 또 다른 원화는 결국 사형당하고만다. 이 사건을 빌미로 원화는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그 이후 '화랑'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과 시기가 조금 엇갈린다.

 

우리가 원조(?) 화랑으로 알고있는 '사다함'은 출생연도가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지 않는데,  그가 진흥왕 시절 대가야 정복의 선봉에 섰다는 기록으로 보아 560년 전후의 인물로 보인다.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한 시점이 지증왕 13년인 512년 경으로, 대가야 정벌시 이사부를 대장군으로 하여 사다함이 15세 나이로 전장에 출전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화랑에 대한 거의 첫번째 기록으로 보인다. 당시 이사부 장군은 70세 전후일것으로 추정되며 진흥왕 이후의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것으로 보아 진흥왕 시절 사망한것으로 추정된다. 사다함또한 대가야와의 전쟁 후 자신의 벗인 무관랑의 죽음에 슬퍼하다 죽게되는데 그때 사다함의 나이가 17세였다고 한다. 사다함은 예전 mbc 드라마인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첫번째(?) 사랑으로 나오는 주인공이기도하다. 

 

 

신라의 최대 인재 등용문 '화랑+도' .... 국가가 발전하기 위한 초석이 된다

 

 

화랑도란 '꽃과 같은 아름다운 사내'란 뜻의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들로 구성된 청소년 집단이다. 원래는 원화제도에서 비롯되었지만 후에 화랑도로 재편되게된다. 이들의 우두머리를 풍월주 또는 국선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성골이나 진골만 가능하였다. 진흥왕 시절은 신라의 번성기로 본래 경상도 일대의 영토가 국경선이었던 신라가 정복전쟁을 통해 국가경계선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관리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신라는 이러한 화랑제도를 통해 신라 골품제도의 최상위 계급인 성골과 진골이 체계적인 관료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신라의 품계중 성골과 진골은 이러한 화랑제도를 거쳐 국가운영의 중심으로 들어설 수 있었고, 그들을 따르는 낭인들은 6두품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 풍월주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될 수 있었다.

 

 

김유신 동상(카카오뷰)
김유신 동상(카카오 뷰)

 

 

원광법사에의해 불교의 정신을 화랑에 입히다

 

 

원광은 신라 진평왕 시대의 승려이다. 법흥왕때 불교를 공인한 인해 신라는 꾸준히 중국과의 거래를 통해 불교문화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였고, 원광역시 중국으로부터 신라로 새로운 불교지식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신라는 기존 민간신앙을 뿌리로 둔 민심을 점점 불교의 유입과 전파로 서서히 불교의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런한 시기에 원광은 백성들의 교화활동과 사회윤리등을 신라에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대표하는것이 바로 '세속5계'의 제정이다. 본래 '제정'이라는 뜻은 '법률이나 제도등을 만드는 일'이란 뜻으로, 원광은 이러한 '세속5계'를 귀산과 추항에게 가르침을 전하며 신라의 뼈대가 되는 화랑이 익히고 지켜야할 규범으로 삼았다. 

 

 

귀산과 추항, '세속5계'로 원광에게 가르침을 받다 

 

 

이렇게 신라의 지지기반으로 성장하는 화랑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면서 그들을 하나로 모을 규율이 필요해졌다. 진평왕 시절 화랑인 귀산과 추항은 어느날 당시 신라에서 승려이자 학자로 이름이 높은 '원광'을 찾아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데, 이때 원광이 귀산과 추항에게 준 가르침이 바로 '세속5계'이다.

 

  • 사군이충 -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어야한다
  • 사친이효 -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한다
  • 교우이신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한다
  • 임전무퇴 - 싸움에 나가서 물러섬이 없어야한다
  • 살생유택 - 살아있는 것을 죽일때에는 가림이 있어야한다

 

원광이 귀산과 추항에게 가르쳤다는 '세속5계'의 내용을 보면 충과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물론 원광이 승려였기에 기본적으로 불교의 영향이 있었을것으로 보이지만, 이차돈에 의해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것이 528년경이고 원광의 활동시기가 진평왕 시절인 580년 전후인것을 감안하면 당시 신라에 유교와 불교가 완전히 뿌리내렸다고 볼 수는 없다. 지증왕 이후 신라에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그전 칭호인 '마립간'이나 '차차웅'은 신권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신라 특유의 신앙을 풍류라고 불렀는데 세속5계는 이런 신라의 독특한 사상이 원광에 의해 불교와 유교에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원광은 중국에서 불교를 배우고 신라로 돌아와 '대승불교'를 신라에 전파하던 시기로,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과 더불어 화랑에 불교의 원리와 신라 특유의 신앙인 풍유를 함께 가르침으로써 신라에 불교가 전파되며 화랑이 결집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된다. 특히나 세속5계중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어야한다'는 '사군이충'과 '싸움에 나가서 물러섬이 없어야한다'는 '임전무퇴'의 가르침이 신라 삼국통일의 중심이 되었다는건 다시 설명할 필요가없다.

 

 

재밌는 T.M.I - 고구려의 조의선인과 백제의 싸울아비 ? ? ? ?

 

신라의 화랑과 비슷한 제도가 고구려나 백제에도 있었을까???

 

고구려의 경우 '조의선인'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는데 이는 조의라는 관직과 선인이라는 관직의 합친말이다. 보통 고구려의 용맹함(?)을 표현하거나 고구려 관련 창작물에 이 '조의선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조의선인은 대한제국 말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추론일뿐 직접적인 역사적 기록은 없는것으로 알려져있다. 

 

백제의 경우 이러한 제도보다는 흔히 '싸울아비'라고 불리는 무사계급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게 참...애매모호하다. 우리는 보통 일본 '사무라이'가 백제 '싸울아비'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고 있는게 정설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맞는 주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글쓴이도 원래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글을 쓰면서 점점 헷갈리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대 어느 시대를 확인해도 '싸울아비'라는 단어를 쓴적이 없다고 한다. 싸울아비는 싸우다의 '싸울'과 사람을 뜻하는 '아비'의 조합으로 알려져있지만 이런 단어가 고대나 중세에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문헌은 없다. 싸울아비라는 단어 자체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는 전두환 정권때로 알려져있고, 처음 사용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보여진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광수의 소설 '이차돈의 사'라는 소설에 싸울아비라는 단어가 쓰이는것이 문헌에 남아있는 거의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있다. 그 이전에 싸울아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문헌이나 기록은 없고, 이광수 역시 이 단어가 자신이 창조한 단어인지 당시 민간에서 쓰이던 단어인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의 한국식 표현이 '싸울아비'가 아닐까하는 주장도 함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백제의 '싸울아비'는 옛 문헌의 기록를  바탕으로 한 단어들이 아니다. 이러한 잘못된 부분을 드라마나 영화, 만화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함으로써 생겨난 오해이다!!!! 전형적인 무지함과 필터없이 맹목적으로 믿어버린 매체의 폐허다 -_-;;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