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문치주의우선의 귀족사회였다. 지배층에 속하는 귀족과 하급관리들과 피지배층인 농민과 천민으로 이루어진 귀족중심의 사회였다. 고려가 귀족(호족)중심의 사회가 된데는 왕건의 삼국 통일정책의 일환인 그의 혼인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방의 각 호족들과 연맹을 맺기위해 그들 딸과의 혼인으로 왕건은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그의 이러한 정책으로 고려는 삼국을 다시 통일하게된다. 고려를 통일왕국으로 이끈 왕건의 혼인정책은 왕건 사후 고려 왕권에 크나큰 위협이 되었다.
고려 건국의 일등 4대 공신 -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홍유는 통일신라의 호족출신으로 배현겸,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궁예의 휘하에서 활동했지만 이들 3인과 궁예를 몰아낸 후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데 앞장선다. 후삼국이 통일되던 93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는 다른 개국공신들과 달리 왕건의 후계자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딸이 왕건의 26번째 부인인 의성부원부인이다.
경주 배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배현경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 후 경주지역으로 이주해 신라를 건국한 6개 부족 중 금산가리촌의 촌장 배지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배현경 역시 고려 건국과정 전후에 활약하였는데 처음 고려의 수도가 궁예의 세력권인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는데 총괄역할을 하며 왕건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배현경 역시 삼국통일 직후는 936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그 역시 왕건 후계자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복지겸은 왕건이 궁예아래에서 혁명을 도모한 4인중 리더 역학을 하였다. 본래 양길의 수하였지만 양길이 궁예에게 패한 후 궁예 휘하에서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담당하였다. 복지겸은 통일신라 당시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 호족세력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3인과 달리 실제 전장에서 장수로의 역할보다는 왕건이 정치적 기반을 쌓고 권력을 안정적으로 승계하는 데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복지겸의 마지막은 정확하게 전해져내려오고 있지 않고 고려 건국 초기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숭겸은 고려 건국의 4대 공신중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신숭겸은 개국공신 4명중 가장 먼저 사망한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후백제의 공격으로부터 통일신라를 구하기 위해 출전한 '공산전투'에서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대패하게 된다. 이때 신숭겸은 왕건을 탈출시키기 위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대신하여 입고 후백제 군대를 유인하는 사이 왕건은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신숭겸을 비롯하여 함께 유인작전에 8명이 투입되었는데 후에 이들을 기려 공산의 이름을 '팔공산'이라고 하였다. 현재 대구 팔공산의 기원이다. 신숭겸이 아니었다면 후삼국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왕건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왕건을 구해낸 인물이 신숭겸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원래 신숭겸은 그의 이름이 아니고 왕건이 후에 그의 공덕을 기리며 평산 신씨를 하사해주었으며 이름을 '숭겸'이라 하였다고 한다. 평산 신씨의 유래는 왕건과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당시 그의 활솜씨에 반해 그의 본관을 평산으로 하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4대 공신은 고려 건국후 특별한 잡음(?) 없이 생을 마감하여, 왕건 사후 후계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아 왕건의 4대 호위세력으로서의 명성만을 남기게 된다.
고려 초기 정세와 왕위 쟁탈전과 후견인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두었다. 똑같은 왕건의 아내라 할지라도 당시 그녀들이 속한 집안세력에 의해 차등이 있었다. 왕건은 이들 29명의 아내들에게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얻게 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를 국호로 정하고 중앙집권화를 꿈꿨지만 그가 삼국통일시 저지를 만행(29명의 부인)으로 고려는 왕건의 의지와 상관없이 호족 중심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호족들은 고려 중기 무신정변으로 잠시 움츠려들지만 고려 후기 권문세족으로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며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는데 크나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 후삼국 당시 왕건은 지방 호족들과의 혼인정책으로 그들의 딸인 왕비를 인질(??)로 삼아 지방 호족세력의 반란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왕건 사후 왕건을 사위(?)로 둔 지방 호족들은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처럼 초기 고려사회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건국세력 및 왕족들과 지방 호족세력들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중앙집권화 체제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왕건을 중심으로 모인 건국세력과 왕족들 역시 왕건 사후 후계자 문제에서 자신들의 이권에 의해 갈라지게 된다.
왕식렴은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의 동생 왕평달의 아들로 왕건의 사촌동생이었다. 왕건이 이복형제가 없는 외아들이었기에 사촌동생인 왕식렴을 친아우만큼이나 아꼈고, 왕건 사후 왕식렴은 고려 왕족인 개성 왕 씨의 최대 권력자가 된다. 특히나 왕건 집안이 송악을 중심으로 성장하였기에 왕식림은 송악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의 최대 주주(?)가 될 수 있었다.
유금필은 앞서 언급한 고려 건국의 4인방과 더불어 왕건이 고려로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무인이다. 유금필은 후백제와의 '고창전투'에서 후백제군 8,000명을 전사시키며 승리의 주역이 되는데, 이 고창전투는 후삼국시대의 패권싸움에서 고려가 후백제에 우위를 점하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또한 후삼국시대를 마무리 짓는 '일리천 전투'에 까지 참여할 당시 본인이 복속시킨 북방 이민족을 전쟁에 함께 참여시키는데 그 수가 정예 기마병이 9,500명이었다.
유금필은 고려의 삼국통일 후 개국공신 서열에서 누구보다 앞선 장수였지만 실제 기록에 남아있는 개국공신 서열에는 들어가있지 않다. 이는 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과 왕건이 유금필을 정치적으로 안배해주었을것이라는 가설이다. 유금필은 다른 지방 호족 출신의 개곡공신들과 달리 출신에 대한 정보가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정확하게 알지못하며 그의 출신이 평산이라는것만 기록되어있다. 지금의 평산 유씨와 무송 유씨의 시조로 알려져있다. 보통 나라를 세우거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 공을 세운사람을 보통 개국공신이나 선무공신으로 정하고 그 업적에 따라 계급을 나누기 마련이다. 태조 왕건 역시 후삼국 통일후 업적에 따라 개국공신의 등급을 나누어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였지만 유금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태조 왕건은 유금필을 '배향공신'에 봉해지는데 배향공신이란 국왕이 좋아하던 사람이나 재위 시 공이 많았던 신하를 정하여 종묘 공신당에 모시도록 하는데 따로 전답을 주거나하는 실질적인 보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 후손들이 혜택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태조 왕건은 죽기 전 유언으로 '유금필의 자손이 죄를 짓더라도 따지지 말고 중용하라'가 했을 정도로 왕건의 유금필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유금필의 딸 역시 왕건의 9번째 부인이 되는데, 그녀가 동양원부인이다.
박술희는 고려 건국당시 왕건이 가장 총애하는 부하중 하나였다. 왕건은 나주출신으로 외가의 배경이 상대적으로 약한 정윤인 왕무의 후견인으로 박술희를 지명했는데, 이는 박술희 본인이 강력한 호족 출신이 아니라 왕건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살아남은 의형제 같은 존재였기에 당시 강성했던 황해도나 충청도의 호족세력으로부터 왕무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왕건의 선택은 실패로 돌아가는데, 박술희 본인이 군권 외에는 지지기반이 약했던 터라 실질적인 왕무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긍달은 후삼국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왕건이 청주를 병합하던 당시 유긍달은 자신의 딸을 왕건과 혼인을 시키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공생관계가 된다. 당시 왕건에게는 첫째 부인이 있었지만 왕건이 고안한 방법은 지방 호적들과의 연합을 그들 호족세력과의 혼인으로 견제하는 방법으로 이들 호족들은 왕건과 서로 공생관계로 협력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유긍달의 청주 세력은 고려 건국 이후 가장 큰 지방 세력으로, 유긍달의 딸은 왕건의 둘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이며 그의 아들 중 왕요와 왕소가 각각 고려의 3대, 4대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처럼 고려는 건국 후 너무나 많은 외척세력들로 인해 왕권은 각기 지지하는 후계자인 정윤들을 선택하는 호족 세력들로 분화되었다. 왕건 사후 그의 후계자는 첫째 아들인 '무'가 물려받으며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그가 고려 2대 국왕인 '혜종'이다.
재밌는 T.M.I
고려 2대 국왕인 혜종 '왕 무'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외척의 세력기반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어머니인 오씨는 전라도 나주의 미미한 가문 출신으로 자신의 아들인 왕무의 뒷배경이 되어주지 못했다. 왕건이 전남 나주를 정벌하던 시기는 27세 즈음이었고 당시 왕건은 벌써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아들은 없었다. 왕건은 나주에서 오씨를 처음 보게되는데 상당히 아릿다운 여인이었던것 같다. 한눈에 반한 왕건이 그날 밤 오씨를 숙소에 불러 그녀와 관계를 맺었는데, 왕건은 오씨의 가문이 미미한 점이 염려되어 그녀를 임신시키고 싶지 않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피임방법을 통해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다. 하지만 그때 오씨가 그것을 손으로 찍어 자신의 몸 안으로 넣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바로 왕건의 첫째 아들 왕무였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의 후계 권력싸움에서 왕무는 자신의 지지기반이 없어서 고려 당시의 태자 자리인 '정윤'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왕건이 지지기반이 없는 왕무에게 자신의 최측근인 박술희를 대리인으로 세워 그를 '정윤'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당시 왕무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의 외척들이 왕무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위와 같은 소문을 퍼트렸다... 라는데 좀 더 현실적이고 합당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떻게... 밖에 xx을 버렸는데 그럴 손으로 xxxx 해서 몸 안에 넣어서 임신했다... 는.... 좀 그렇지 않나... ㅎㅎㅎ
고려를 안정화시킨 광종의 등장 그리고 노비안건법과 과거제 시행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의 이름은 '소'이다. 예전 아이유와 이준기가 주연으로 방영된 '보보경심 - 려'에 등장하는 이준기가 바로 왕소이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서열상 본인이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왕건의 첫째 아들인 '무'가 2대 국왕인 '혜종'에 즉위하지만 혜종은 자신을 받쳐줄 세력기반이 약하였다. 하지만 왕소의 어머니인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는 유긍달의 딸로, 유긍달은 후삼국 당시 충주의 대표적인 호적출신으로 왕건이 각 지방 호족들을 우군으로 삼기위해 정략결혼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특히나 왕건의 29명의 부인들 중에서 왕건에게 가장 사랑받는 부인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인 유긍달의 충주 세력이 워낙 막강하기도하였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에서인지 유씨는 왕건과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는데 그녀의 다섯 아들 중 한 명인 왕요가 고려의 3대 국왕이고, 4대 국왕이 바로 왕소이다.
왕소가 고려 4대 임금으로 즉위할 당시만 하더라도 고려는 아직 왕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왕건과 혼인으로 맺어진 지방 호족들은 자신의 손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계속적인 눈치싸움이 벌이지고 있었다. 왕건의 첫째 아들 왕무가 2대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많았지만, 왕건의 장자였기에 어느 정도 권력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아들이 왕요와 왕소가 각각 3대, 4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고려 왕조는 서서히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권파와 자신들의 이익을 놓지 않으려는 지방 호족과의 알력다툼이 최대치로 올라서고 있었다. 왕소는 여기에서 각종 개혁정책을 통해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왕권은 보다 강화하는 매우 전략적인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한다.
광종의 개혁정책 - 쌍기의 영입 그리고 과거제와 노비안검법 실시
쌍기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의 후추 사람이다. 한국사를 통틀어 대표적인 중국계 한국인중 한 명으로 남아있다. 원래는 후주의 사신단으로 고려를 방문 후 병이 나서 후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눌러앉게 된다. 여기에서 쌍기가 후주로 돌아가기 싫어서 꾀병을 낸 것이라는 설과, 광종이 쌍기를 영입하기 위해서 전략을 짰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그가 고려의 사신으로 온 4년 후 후주가 조광윤에 의해 멸망되고 송나라가 건국되었으니 이유야 어쨌든 서로 윈윈한것이다.. ^^
광종이 쌍기를 영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당시 권력구도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고려사회는 논공행상에 의해 공신들이 정해지던 시기였고 그들의 자손들이 자연스레 관직으로 진출하던 시기였다. 고려의 이러한 '음서제'는 결국 고려말기 권력의 부패를 낳게 하다. 광종은 이러한 시기에 호족출신이 아닌 쌍기를 자신의 측근으로 삼으면서 본인은 절대 호족들에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엄포를 놓게 되고, 호족들 역시 왕소가 자신들의 의지대로만 움직여주지 않을 것임을 느끼게 된다. 또한 왕소는 쌍기이전에 중국 출신 귀화인이던 왕융을 통해 중국의 정세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그러면서 당시 후주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도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쌍기는 후주에서 태조의 재위시절 시대리평사라는 직책을 지냈는데 이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였다. 그러므로 쌍기는 과거 제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은 인물로서 광종은 유학에 정통한 신진 유학자들과 함께 쌍기를 등용하여 고려사 최초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데 있어 이론, 주제 등을 함께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광종은 쌍기와 함께 한국사 최초의 과거 시험을 실시하게 되는데, 바로 첫 번째 장소가 개경 본궐의 '위봉루'라는 앞 구정이었다.
광종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는 문벌귀족과 관직을 세습 또는 매매하는 귀족들을 방지하고자 중국에서 실시하는 과거시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던 중 후주의 쌍기가 고려로 들어오게 되고, 고려는 후주와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상황이 현재 고려의 상황도 비슷함을 알게 된다. 특히나 후주의 태조밑에서 시대리평사를 비롯해 주요 관직을 역임한 쌍기는, 그의 사상과 실무적 지식 등을 광종에게 설명하며 고려의 개혁정책에 대해서 엄청난 호응을 얻게 된다.
과거시험이 귀족들의 세습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이라면 '노비 안검법'은 당시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하는 파격적인 제도였다. 호족들이 거느리던 사병은 호족에게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대부분의 호족들의 사병 즉, 노비들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기 때문에 광종은 이 점을 파악해서 노비들을 호족들로부터 떼어낼 방법을 강구하였다. 친위세력이 없었던 광종은 쌍기와 더불어 왕융 등 외국에서 귀화한 인재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축 후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계속적으로 시도하였다. 과거제도와 노비안건법 시행은 광종의 그러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노비안검법'은 당시 노비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예 해방법'이었다. 당시 호족들이 거느린 노비의 대부분이 고려의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힌 양인들과 호족의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노비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호족들의 경제적, 무력적 기반이 사라지는 것이다. 노비들은 평상시에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이뤄줄 수 있는 농업이나 상업 등에 종사하였고, 전쟁 시에는 바로 귀족들의 개인 사병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956년 '노비안검법'이 시행되자 고려의 통일전쟁과정에서 노비로 전략한 수많은 양인들이 모두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다. 당시 노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간단했는데, 노비 스스로가 자신이 과거에 양인 신분이었다는 것을 관아에 신고하면 바로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당연히 호족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광종은 호족들의 반발을 예상해 노비들의 관청 출입을 막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된다. '노비안검법' 시행은 호족들에게 과거 시험보다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노비로부터 발생되던 세금은 더 이상 그들의 소유가 아닌 국가에서 정상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였고, 그들의 사병수는 급감하였다.
이렇게 호족의 세력이 약해진 반면 반대급부로 국가는 세금이 늘어나고 군대(병졸)의 수가 늘어나면서 결과적으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적 체제 확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호족들의 지속적인 반발 및 양인으로 복권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렇게 노비와 양인 계층의 이반으로 고려의 신분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이 보이자, 제6대 성종에 이르러 '노비환천법'으로 양인으로 회복된 많은 수의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환천시키고 말았다.
철혈군주 광종의 피비린내 나는 왕족 숙청
광종이 철혈군주로 불리게 된 직접적인 이유다. 광종은 자신의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였다. 호족이나 대신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왕씨 종실에 대해서도 왕권 강화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되면 모두 제거해 나갔다. 그렇게 광종은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과 동복 형인 정종의 아들 겅춘원군을 모두 역모에 가담했다고 처형시켜버리고 만다. 또한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왕주(후에 경종)도 지속적으로 의심하며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광종은 태조의 서자인 효은태자도 역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여 처형해 버렸다.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다고 왕씨 종실마저 제거해 버리는 광종인데 호족인들 무사할 수 없었다. 960년 권신이란 자가 역모 혐의로 고변되면서 광종은 직접 친국을 단행하며 관련된 자들을 모두 귀양 보내버렸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호족들의 조금이라도 역모라는 생각이 들면 모두 죽이거나 귀양 보내버렸다. 또한 건국공신들을 관직에서 내쫓은 후 새로운 관직을 주지 않았고, 자신의 정책에 반하는 세력은 친족이건 외척이건 모두 숙청, 처형하였다. 또한 자신의 즉위 초 최대 지지세력이던 평주세력까지 제거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광종은 2차에 걸쳐 호족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광종 말년에 가면 태조 당시 삼산공신 3,000여 명중 40여 명만 남게 되었다.
광종에 대한 평가
광종의 개혁정책은 새롭게 시작되는 왕조의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바로잡는데 기여했다는 부분에선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비록 개혁의 범위가 중앙정치 및 왕권강화에 한정이 되어 지방제도 개편이나 경제 사회적인 제도의 개편에서는 상대적으로 개혁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것들에 대한 전국 도 개편이나 군사 체계의 정비는 성종 때에 이르러 완성되게 된다. 특히 노비안검법의 경우 그 부작용으로 사회 신분질서가 붕괴되고 사회적 토대가 흔들리는 양상도 발생하였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광종은 '독재정치'를 펼쳤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왕조국가였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독재적 판단과 정책, 실행등이 고려 초기 사회의 불안정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뭐.. 판단의 각자의 몫이다... ^^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