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문치주의 국가였다. 삼국을 다시 통일한 후 한반도의 주인이 된 고려의 지배계층은 '文武(문무)'가 겸비되는 균형적인 관료사회가 아니라 文에 너무 치중된 사회로 변하였다. 논공행상에서 항상 뒤처지기 시작하며 무인들의 불만은 쌓여가기 시작했고, 당시 명문가임을 자처하는 김부식 가문의 아들 김돈중의 만행으로 무인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고려 거란 전쟁.. and 고려의 외교정책 (feat.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고려의 기본적인 외교방침은 북진정책과 해상무역이었다. 고려 건국 당시 북쪽의 발해는 915년 건국된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고려는 '요'와의 국교단절을 선언한다. 그리고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송'과는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지속하였다. 성종 시절 거란의 1차 침략당 서희의 외교전략으로 북쪽의 경계선을 공고히 하였고(강동 6주의 회복), 현종 시절 거란의 3차 침략당시에는 강감찬이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인 귀주에서 거란 침략군을 전멸시키며 거란의 고려 침략 전쟁을 종결시켰다.(귀주대첨)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고 부를 만큼 한반도를 침략한 외세를 압도적으로 격파한 전쟁으로 남아있다. 고려 거란 전쟁은 현재 kbs에서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재미있고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최수종은 여기에서 강감찬으로 출연한다.. 최수종 짱..^^
거란과의 3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는 평화모드로 진입하였다. 원래 중국 '송'과는 기본적인 사대에 의한 정책이지만 양국간 평화적인 교역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송'의 국가 성향과도 일치한다. '송'을 건국한 조광윤은 다른 여타 중국의 지배 국가와는 달리 전임 왕조인 '전조'의 시종훈과 평화적인 왕조교체를 성공하였고, 그 이후에도 건국 일등공신들에 대해서 토사구팽이 아닌 대화와 협정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며 '송'을 안정시켜 나갔다. 특히나 조광윤은 사대부를 우대하는 '문치주의' 정책을 펼쳐나갔고, 이를 동생 조광의가 계승하게 되면서 '송'은 역대 중국을 지배한 모든 나라를 통틀어 문학의 황금기를 구축하는 한편 화약을 비롯한 획기적인 발명품들이 개발되었다.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한 고려는 이후 지속적인 거란의 요청으로 거란과도 다시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맺게된다. 이렇게 한반도 북쪽과 만주지방이 안정화되는 틈을 타 당시 만주에 펴져있던 여진족 또한 고려와의 외교적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만주에는 여진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 민족들이 흩어져 부족을 형성하며 생활하고 있던 터라 고려와의 친화적 외교관계를 맺으며 당시 고려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려 또한 중국 '송'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송'과 '고려'사이에 있는 많은 부족들과의 평화적 협력을 통해 국가는 점차 안정화되어 갔다.
귀주대첩이 현종 10년 1019년에 일어났고 1차 무신정변이 의종 24년인 1170년 정중부에 의해 발발했으니 이 사이 150년 정도가 고려의 전성기이자 안정기라고 볼 수 있다. 하여 16대 예종이 승하하는 1122년까지가 고려의 최대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15대 문종의 재위기간이 고려의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고려 최초의 무신란인 김훈, 최질의 난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무신들의 권력인 군사권을 문신에게 일임하는 사태를 초래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동 6주를 회복한 서희나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 역시 모두 문신출신들이다.
고려의 최대 전성기와 문벌귀족의 탄생
이렇듯 서희와 강감찬이라는 강력한 문신을 품에 입은 고려의 귀족들은 권력의 중심부에서 계속적으로 무신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문신들로 채우게 했다. 고려 초기 건국공신들인 무인들은 자연스레 권력에서 비켜가고 그 자리를 '문치주의'를 표방한 고려의 정책으로 인해 문신들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그들은 고려의 새로운 권력인 문벌귀족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이 당시 신라 귀족의 후예인 김부식이 인종의 명에 의해 1145년경 한국 고대 삼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면서 이후 고려사회는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현종 당시에는 한반도 전역을 '5도 양계'로 개편하는데 이가 지금의 행정구역의 시초가 된다.
고려는 문벌사회이면서도 불교에 상당히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에 1010년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또한 '주창수령법'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고, '면군금고법'을 실시하여 노모를 봉양하는 장남의 군역을 면제시켜 주기도 하였다. 최대 전성기인 문종시절에는 '공음전'제도를 법제화하여 고위관료에게 지급한 토지가 세습이 가능하게 하였다. '동서대비원'을 설치하여 빈민 환자의 치료에도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삼복제'라는 제도를 실시하여 사형수에 대해서도 세 번 심사하여 판결하도록 하는 등 고려는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재정을 통해 제도의 정비와 개혁을 이뤄냈다.
특히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외국과의 교역에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는데, 중국 '송'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청자와 나전칠기, 고려인삼등을 구입해 서역으로 전달하면서 고려는 'COREA(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아시아를 넘어 서역에까지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렇게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는 고려였지만 중국의 정세변화와 함께 고려내부에서도 무신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는 불만이 서서히 터저나오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정세변화와 문벌귀족의 타락
당시 중국의 '송'역시 문치주의를 기반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송'도 중국의 역대 어느 왕조와도 비교될 수 없는 화려한 업적을 남긴다. 특히나 '화약'의 개발은 '송'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기억될만한 엄청난 개발이었다.
하지만 송나라의 이러한 문치주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에 신종당시 왕안석을 등용하여 개혁정치인 신법을 단행하여, 재정수입을 확대하고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신법은 보수적인 관료들과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들의 반대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김돈중의 만행으로 일어난 무신 정정부의 난, 그리고 무신정권시대의 개막
고려 역시 이러한 문치주의 정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관료들의 보수적인 정책과, 무신들을 무시하는 행정과 관료체계로 무신들의 불만은 지속적으로 쌓여가기 시작했다. 특히나 예종 때 발생한 여진정벌과 인종 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제압하면서 무신의 지위는 크게 상승하였으나, 이러한 문존무비의 풍조는 바뀌지 않았다.
첫째 사건 - 1144년 인종의 시종 내시였던 김돈중은 대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리는 장난질을 하였다. 정중부가 대노하였으나 김돈중은 당시 권력의 실세인 김부식의 아들로, 김부식은 정중부에게 사과를 하기는커녕 인종에게 정중부가 자신의 가문을 모욕했다며 정중부를 처벌하라며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둘째 사건 - 1167년 한량인 의종이 신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는데, 또다시 김돈중의 실수로 그의 말과 무신 한 명의 말이 부딪치며 무신의 화살통에서 화살이 튕겨나갔는데, 하필이면 그 화살이 의종 앞에 떨어지고 만다. 의종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암살범의 소행으로 알고 대대적인 조사를 하였고, 김돈중은 자신의 실수가 들통날까 봐 무신 여러 명을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을 귀양 보내 버렸다.
1170년 의종은 문신들을 거느리고 보현원으로 야유를 나갔다. 그들은 무신들을 자신들과 왕의 야유회에 호위를 서는 일개 군졸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당시 야유회 직전 왕을 호위하는 대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은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보현원으로 야유를 나간 문신들 대부분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그날 왕을 데리고 개성으로 돌아와 또다시 주요 관직의 문신 50여 명을 다시 척결해 버린다. 이 당시 학살된 문신이 대략 100여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의종은 무신들의 계급을 승격시키며 이번 사건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들 반란세력은 왕과 태자를 각각 거제도와 진도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 익양공호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이가 명종이다. 이렇게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무시는 의종대에 이르러 폭발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는 무신정권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무신정권시대의 평가
고려는 초창기 호족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동안 왕권은 불안하였고, 이후 광종의 강력한 개혁정치로 사회 전반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이후 고려는 8대 현종을 시작으로 16대 예종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었고, 17대와 18대인 인종과 의종을 거쳐 19대 명종이 무신들에 의해 추대되면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다.
고려 무신정권시대의 이야기는 tv드라마로도 많이 방영되고, 또한 몽골의 침략당시 몽골에 항복하지 않고 항전한 이미지 때문에 간혹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무신들이 아무리 핍박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다. 우리가 지금 1961년 5월 16일에 발생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을 군사혁명이라고 군사반란, 쿠데타라고 하는 이유는 박정희의 군부세력이 당시 장면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물론 1961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당시 고려는 세습을 하는 왕조국가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반론할 수 있다. 무신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후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면 그들은 조선의 이성계처럼 역성혁명을 통한 새로운 국가의 태조로 인정받았겠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국가를 세울 능력도, 고려를 새롭게 개혁할 명분도 없었다. 단지 자신들이 받는 부당함이 억울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뿐이다. 아무리 그들이 몽골항쟁을 통해 고려를 지키고자 노력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생존에 관한 노력일 뿐 고려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궤변일 뿐이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