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귀족을 중심으로 한 불교국가였다면 조선은 반대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유교국가였다. 고려는 세습을 통해 자손들이 정계에 진출했고, 조선은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였다. 고려는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우리 역사에 대표적인 불교국가였고, 조선은 숭유억불정책과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나라였다. 어느 국가가 더 '좋은 국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새로운 사상과 가치는 언제나 기존 사상의 부패와 대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집권한 세력이 개혁하지 않으면 그 세력은 자연스레 부패하기 마련이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는 고려가 부패해진 이유를 음서제를 통한 능력이 검증되지 않는 귀족출신들의 중앙권력 진출에서 비롯된 부정, 부패가 국정을 어지럽히고 썩게한다고 주장하였다. 초기 호족세력으로부터 시작된 후기 권문세족들이 각 지방의 대지주로 군림하며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고려는 절대 왕조 국가이면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달리 토속신앙등의 기존 백성들의 생활에 깊게 관여한 풍습과 그들만의 관습들도 포용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불교가 가진 독특한 가치관으로 어느 시대에서건 불교는 배타적 형상을 가진 교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는 이러한 불교의 특성을 활용하여 백성의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선기능 역할로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도 사회적 순기능에 반하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을 낳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찰을 짓고, 각종 화려한 불교행사등에 국가재정이 무리하게 들어가면서 고려의 국운 역시 기울기 시작함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신진사대부들이 새롭게 주장한 가치관은 개인의 출신성분에 따라 자연스레 계급이 정해지는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주장하였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하였지만 실질적인 중앙정치로의 진출은 한계가 있었다. 신진사대부는 이러한 고려시대의 잘못한 관습과 제도를 혁파하고,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 주장하며 함경도 동북면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고려의 마지막 영웅 이성계를 앞세워 역성혁명을 주도하였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웬만해선 특정 지지세력(정당)이 장기 집권을 하지 못하게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의 5년 대통령 단임제가 그러하고, 미국의 4년 대통령 중임제도가 그러하다. 내가 아무리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하더라고 그들이 장기집권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 스스로 개혁하지못하고 권력에 사로잡혀 부패해 버렸기 때문이다.(feat. 다음 대선 파이팅!!!!)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이 중앙권력으로 진출할 유일한 방법은 과거제를 통한 신분 상승밖에 없었다
고려는 불교국가이면서 음서제를 통한 귀족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귀족이 아닌 신분이 중앙권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힘들었다. 국가의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의 왕조가 바뀌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불교에 대응하며, 당시 훈고학의 문제로 지적되는 형식화, 획일화의 문제의식의 반론에서 탄생한 유교사상의 한 갈래이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은 중국 남송시대의 유학자인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을 또 다른 말로 '주자학'이라 하여 그들 최우선의 가치로 두었다. 성리학자체가 본래 불교에 대응하는 성격도 지녔는데 이는 불교를 비롯한 도교등은 학문적 성격보다는 사상적 성격이 강한 종교이자 지도체제로 백성들의 호응을 받은 반면, 성리학은 기존 유교사상에서 사상적 약점으로 지적된 이론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주희가 주장하고 성립한 형이상적 가치관인 우주론과 인간론은 당시 중국의 획일화된 훈고학을 대신하여 주류사상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런 주희의 사상이 집대성된 '주자학'은 14세기 이후 중국을 넘어서 당시 동아시아 국가의 사상을 지배하는 주류사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주희의 '성리학'인 '주자학'을 새로운 국가제도의 사상으로 주장하며 당시 고려의 폐쇄적인 음서제와 문벌귀족들을 비판하였다. 그들에게는 당시 피폐한 민심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고, 그들의 주장을 실체적인 현실로 보여줄 만한 능력을 가진 세력(이성계)도 있었다.
고려 말 정도전(개혁파 신진사대부)과 정몽주(온건파 신진사대부)의 대립
정도전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말 대표적인 신진사대부였다. 드라마에서도 한 번 언급되었는데, 정도전과 정몽주가 대립할 때 정몽주가 정도전의 출신을 가지고 그를 탄핵한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거의 어머니가 관비였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정도전의 집안은 경상도 봉화 지역의 향리로 당시의 향리는 조선의 향리와는 차이가 있는데, 고려시대 향리는 지방의 토착세력을 의미한다.
정도전은 22세 무렵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당시는 공민왕이 친원세력을 배척하고 친명세력과 유학 육성에 지원을 하던 시기였다.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함께 정계에 진출하여 공민왕의 개혁정책 중심에서 활약하게 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정도전 역시 정몽주와 함께 역성혁명보다는 고려를 재건하는 데에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공민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우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정도전을 비롯한 개혁파인 신진사대부와 대척점에 서있는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권문세족과의 정치싸움에서 패하게 되고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때부터 고려를 재건하려 했던 개혁적 신진사대부들은 둘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혁파들은 관직에서 모두 축출당하며 귀양을 가게 되고,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들은 정계에 남아 계속 권문세족을 견제하게 되지만 그들에게는 권문세족에 대항할 실질적 힘이 없었다.
물론 신진사대부들 뒤에 이성계가 버티고 있었지만 이성계는 온건 개혁파보다는 급진 개혁파와 더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온건 개혁파는 자신을 지렛대 삼아 고려를 재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급진 개혁파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선 이성계가 정도전과 정몽주 모두에게 지원을 하며, 오히려 정몽주를 더 신임하는듯한 내용으로 그려지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과연 이성계가 정몽주를 더 신임했을까? 내가 생각할 땐 아니라고 본다. 이성계에게 정몽주는 정도전 등의 급진 개혁파들이 새로운 나라를 구성할 때, 고려에서 새로운 나라 즉, 조선으로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되는 데에 역학을 해야 하는 중심인물일 뿐이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후 이성계가 그토록 자신이 아끼던 아들인 이방원과 멀어진 이유는 그가 단순히 정몽주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가 구상한 평화적 정권이양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도전과 이방원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도전은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나라가 역대 다른 왕조들과 달리 백성의 민심이 돌아서서 자연스레 새로운 국가가 탄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방원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선 과정의 정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이방원의 성향은 그가 적자가 아님에도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왕으로 즉위 후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지원했던 그의 외척인 민 씨 가문의 형제들을 모두 도륙 낸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려를 뒤흔든 정도전의 파격적인 토지정책 '계민수전(計民授田)'
정도전은 고려말 신진사대부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인 개혁파였다. 그는 단순히 고려의 기존 사회구도를 개선해서는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제도를 통해서만 백성들의 평안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몽주와 함께 이색의 대표적인 제자였지만 정몽주는 고려의 개선을 통해 방법을 찾으려 한 반면, 정도전은 고려를 없애고 방법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여러 정책들 중 가장 파격적인 정책이 바로 토지정책인 '계민수전'이다. '계민수전(計民授田)'을 그대로 풀이하면 (셈할 계, 백성 민, 줄 수, 밭 전) 즉,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국가가 회수하여 백성의 수대로 땅을 분배한 뒤 국가가 일정한 세금을 걷는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파격적인 토지 정책은 정도전과 함께 급진 개혁파인 조준에 의해 법제화되어 발표되었다. 정도전의 이러한 토지정책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권문세족들은 각 지방마다 본인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고, 이러한 토지경작에서 나오는 결과물로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재정은 날로 궁핍해져갔지만 권문세족은 그와 별개로 재산을 축적시켜 나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모든 권문세족을 비롯한 대주주와 관료들은 물론이거니와 정도전과 함께 개혁을 꿈꾸던 일부 온건 개혁파들도 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우리가 위의 내용과 관련해서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이유는 tv 드라마 '정도전'과 '뿌리 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에서 에피소드로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계민수전에 대한 내용이,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정도전 사상의 기본 뼈대가 되는 '민본'에 대해서 꽤나 상세하게 그려졌다. 민본사상에 근거한 그의 토지정책은 전 국민을 자작농으로 하여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정도전이 성리학을 기본으로 주장한 '민본사상'
앞서 서술한 것처럼 정도전은 신진사대부들 중에서도 급진적 개혁파였다. 그는 권문세족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이상 고려는 절대 개혁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상은 '민본 사상'으로 축약해 설명할 수 있다. 민본 사상이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주장으로, 그는 민본 사상에 어긋나는 정치라면 그것이 설령 임금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급진적이면서도 개혁적인 사상은 왕조가 바꿀 수 있는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민본사상의 기본이 되는 것은 법에 따른 형벌보다는 '덕'과 '예'로써 행하는 정치이고, 이에 반하는 정치는 설령 왕조가 바뀌어도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이는 '역성혁명'을 정당화하는 기본 논리가 되었다.
정도전은 정치란 '올바른 선비' 즉, '참된 선비'만이 할 수 있으며, '참된 선비'의 으뜸인 '재상'이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 체제'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임금은 상징적인 존재이며 관념적인 수준의 통치자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은 재상이 나라를 올바르게 운영하면 굳이 임금의 자리가 세습되더라고 크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드라마에서는 '재상 총재제'라는 정치형태로 소개되었다. 태조 이성계 사후 이방원과 정도전이 갈라서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왕권강화와 중앙집권.. 단순하게 보면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왕권강화의 중심에는 '임금'이 존재하고, 중앙집권의 중심에는 '재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방원은 함께 조선을 개국한 1등 공신인 정도전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정도전은 백성들의 경제산업 근본은 '농업'이라고 주장하였고,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국가가 회수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오늘날 공산주의와 같은 급진적 토지개혁에 비교되는데, 이 토지개혁이 바로 앞서 말한 고려 말 정계를 뿌리째 뒤흔든 '계민수전'이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향상하기 위한 산업의 근본이 ‘농업’에 있다고 보았고, 공업과 상업은 ‘말업(末業)’이라고 주장했다.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그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나라의 재산으로 몰수하여 모든 백성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오늘날 공산주의와 같은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사상을 아우르는 '민본주의'는 조선을 설계하면서 오롯이 녹여 들어갔다. 그가 설계한 조선이라는 나라는 자신이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관직으로의 출세가 가능했고, 그렇게 관직에 오른 '선비'는 최고 지도자인 '재상'의 국정운영 방향에 따라 모든 백성들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사상은 그가 이방원의 쿠데타로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조선 왕조의 뼈대가 되는 법과 제도에 구현되어 조선을 운영하는 국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그가 주장한 이러한 급직적 민본사상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도 없고, 그가 주창한 사농공상의 폐해 역시 존재하지만 최소한 그가 꿈꾸던 백성이 근본(민본)이 되는 조선은 그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끝나버리고 말았다.
백성이 근본 되는 이상사회를 꿈꾸었지만 현실정치에 좌절된 정도전의 실험(개혁)
정도전은 우왕 10년 1384년 처음으로 이성계와 마주하게 된다. 당시 관직에서 밀려나있던 정도전이 여진족인 호발도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함경도 동북면 도지사로 있던 시절이다. 정도전은 거기에서 이성계와 그가 훈련시킨 사병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이용하여 나라를 건국하였다'라고... 이 발언이 사실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소한 정도전이 가진 야망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결정한 후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고려를 재건하려던 온건 개혁파는 완전히 궤멸하게 된다. 이때부터 정도전은 본격적으로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왕조의 설계자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다. 이렇게 1392년 500년 고려왕조는 무너지게 되고, 새로운 왕조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후 정도전은 서울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전하는 한편, 지금의 경복궁을 새로 짓고 도성 자리를 건설하였다. 경복궁의 이름과 각 성문의 이름, 한성부의 5부 52방의 이름 역시 정도전이 지었는데, 그의 이름에는 대부분 유교적 덕목과 가치가 포함된 표현으로 서울 한양이 단순한 수도에서 벗어나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탄생하게 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는데,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책으로 후일 조선 최고의 법전으로 알려진 '경국대전'의 첫출발이 되는 책이다. 여기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가장 이상향으로 꼽은 중국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구상 등을 제시하며,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그릴 수 있는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러한 정도전의 실험은 태조 이성계 재위 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당시 이성계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관여하면서 이방원과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에게 이방원을 비롯하여 여섯 명의 아들을, 둘째 부인에게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둘째 부인의 아들들은 당시 어린 나이였고 실제 조선을 건국하는데 공신으로 보면 첫째 부인의 아들들이 훨씬 공이 많았다. 하지만 정도전은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의 입장에서 정치적 야먕이 큰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보다 나이가 어린 방석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건국을 앞당기는 계기를 만들며 그의 형제들이 모두 희생하였기에 정도전의 방석 세자 책봉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태조 7년인 1398년 이방원은 세자 방석을 죽이며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세자 방석을 죽인 이방원은 바로 사병들을 이끌고 정도전마저 제거해 버리게 된다. 이로써 세자는 이성계의 첫째 부인의 아들 방과에게 돌아가고, 그가 바로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이다. 정종은 이방원과 친형제이면서 당시 이방원의 우호세력이었다.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방과는 이방원을 꺾을만한 자기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양보를 하며 자연스레 자신이 방석을 죽인 이유가 왕이 되고자 함이 아님을 세상에 공표하였고, 그렇게 왕위에 오른 방과는 얼마 후 세자를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방원으로 책봉하며 그에게 대권을 물려주려 하였다. 이러한 데에는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2년 뒤인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는데 이는 친형제간인 이방원과 이방간이 서로 대권을 차지하려는 싸움이었다. 다. 최종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이방원은 본인이 아닌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형인 이방과가 세자에 책봉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경험한 정종(방과)은 임금의 자리가 자기 것이 아님을 일찍 깨달았거나, 혹은 동생인 방원에 의해 자신도 축출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뒤를 이를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생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이방원이 정당하게 왕위에 즉위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이방원은 이렇게 죽임을 당한 정도전을 고려를 배반한 역적으로, 정몽주는 고려를 끝까지 지킨 충신으로 기록되게 하였다. 드라마에서도 이 부분이 나오는데, 이를 완전히 각색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이것을 대변해 준다.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원인도 단순히 개이적인 불만에 서라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이방원과 정도전이 그리는 조선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조선시대의 정치체제와 현대의 정치체제
'정치'의 뜻을 찾아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치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와 관료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은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니 실제로는 왕과 신료들의 타협과 협의를 통해서 국정이 운영되었다. 이러한 정치 관계는 군주인 임금의 자질이 뛰어나면 제대로 국정이 운영될 수 있는 체제이다. 굳이 정도전이 주창한 '재상 총재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관료들의 정치, 정책적 결정들이 제대로 백성을 위하고 관리하는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라면, 서로가 충분히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금의 역량이 따라주지 않을 때 국가운영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우리의 역사는 이러한 맹점을 연산군 시대를 통해서 확인하였고,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보듯 임금을 대리청정 혹은 수렴청정하는 외척의 힘을 누르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종 재위 시 흥선 대원군의 사례에서 보듯이 군주제 국가에서 임금과 관료들 간의 조정을 임금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까지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럼 임금이 모두 세종대왕이나 정조 같은 어질고 훌륭한 임금이 계속 유지된다면 모르겠지만, 세습을 통한 왕권 군주제 국가에서 모든 임금이 뛰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각각의 장. 단점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 빗대어볼 때 당시는 백성들이 임금을 바꿀 수 없었기에 그러한 군주제하의 정치체제는 항상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도전이 이러한 문제 때문에 '재상 총재제'를 주창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때 정도전이 주창한 '재상총재제'를 현대에 비추어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국가가 바로 영국이다. 영국에서의 황실은 영국의 뿌리를 지킨 자존감과 명예만 있을 뿐 실질적인 영국의 국가운영은 '총리'가 최고지도자로서 운영을 하고 있다. 정도전이 지금의 이러한 양립가능한 제도를 그때 당시에 꿈꾸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조선이 운영되었다면 조선의 운명이나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운명도 지금과는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으니 이는 단순한 가설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정치는 그들만이 사는 세상.. 그. 사. 세이다(feat. 드라마)
지금의 정치체제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국민 스스로 탄핵할 수 있지만(뭐.. 요즘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_-;;), 당시의 청지체제에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하여 그들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정치의 본질이 백성을 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정치는 정치를 하는 자와 그 정치행위에 의해 직접적인 체감을 느끼는 자, 이 두 가지 실제 정치행위의 양면이 서로에게 견제를 해야 제대로 작동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정치를 하는 자를 견제할 방법이 없고, 그 정치행위의 체감을 받는 자들이 그 결과를 피드백할 수 없다면 올바른 정치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방금 글쓴이가 주장한 이러한 생각들은 글쓴이가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이고, 당시의 조선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들은 일방적인 정치행위만 했을 뿐이기에 이 자체를 조선시대의 문제만으로 국한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절차적 정당성과 명분의 훼손'을 명문화시켜 후손들에게 타의모범을 보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단순히 무력에 의한 정권 찬탈이 아니라, 백성들 모두가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는 명분을 갖추기 위해 마지막까지 정몽주를 설득한 것이다. 앞서 말한 '역성혁명'이지만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여 국가가 위태로워지고 백성의 삶이 피폐해져 갔기에 왕의 성씨가 바뀌어도 괜찮다는 당위성과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모두 사라지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방원의 정몽주 제거는 아무리 정도전이 새로운 나라의 절차적 정당성과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결국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새로운 세력의 쿠데타로밖에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이방원이 자신이나 이성계가 아닌 백성을 위한 결단이었다고 주장해도 그건 자신만의 궤변일 뿐 모든 백성들은 왕위를 무력으로 빼앗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욕심과 야욕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는 지금의 정치상황과 비교해 보아도 똑같이 적용된다. 정권을 잡기 위해 선거 때마다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주장을 하고, 선거가 끝나면 정권을 잡은 세력은 이겼다는 자만심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주장은 소리소문 없이 폐기시킨다.(아니 광고하며 폐기시키던가??) 그리고 패배한 쪽도 패배했다고 또 자신들의 주장을 번복하는 행위가 정권이 바뀌면서 계속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내가 아무리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하여도 똑같이 욕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정신 차려라!!!!) 어떻게 보면 지금의 이러한 정치형태는 그들이 선조들에게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의 기록이란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그것을 개선시키려는 것이 하나의 목적일텐데, 지금의 정치는 오롯이 그때의 잘못된 것만 따라하는 것이다.
결국 조선의 시작이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시작하여, 버젓이 왕위를 장자가 계승해야 하는 군주제 국가에서 이방원은 자신만의 명분을 내세워 조선의 3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방원이 유일하게 잘한 행동과 선택은 그 스스로도 후계자를 정할때 첫째 양녕대군이나 둘째 효령대군도 아닌 셋째인 충녕대군에게 물려줌으로써 왕위에 오른 충녕대군(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게 했다는 점뿐이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