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벌거벗은 세계사 25. 카데시 전투 - 인류가 남긴 최초의 평화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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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이것저것' 두 번째 이야기는 세계 최초의 평화 협정 기록을 남긴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에 대해서 끄적여봅니다. 당시에는 현대의 전쟁처럼 전쟁 시 '협정'이라는 의미자체가 없던 시기였다. '카데시 전투'는 람세스 2세가 시리아 원정에서 히타이트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채 물러나게 되는데 당시의 의미있는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와의 전쟁 '카데시 전투'

 

카데시 전투 자체는 그냥 일반적인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이 전쟁으로 인해 세계 최초로 평화 협정을 맺게되고, 이 평화 협정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 협정으로 남아있다. 당시 이집트는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히타이트는 그런 이집트를 위협하는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카데시 전투는 이러한 시기의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영토 확장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그들은 이 전쟁을 종료시키기위해 신사 협정을 맺는다.

 

 

이집트의 황금기를 연 하트셉수트 여왕, 토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와 아케나텐

 

 

람세스 2세가 즉위하기 전 이집트 신왕국은 하트셉수트 여왕, 토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에 걸쳐 평화시기가 이어졌다. 특히 토트모세 3세는 '정복왕'이라 불릴 정도로 이집트의 영향권을 크게 넓혔다. 이어 즉위한 아멘포테프 3세는 넓어진 이집트의 내정을 안정하는데 중점을 뒀다.

 

이들 파라오의 평화시기가 끝나고 아멘호테프 4세는 '아텐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뜻의 '아케나텐'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기존 '아문 신앙'을 부정하며 태양신이자 유일신이 '아텐'만을 정당한 신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아케나텐과 신관들 사이 분쟁이 일어났고 아케나텐은 '아텐의 지평선'이라는 뜻의 '아케타텐'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왕궁과 아텐 신전을 신축하며 그곳에 머물게 된다. 당시의 문화를 '아마르나 미술'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이집트 예술을 이때를 기준으로 나뉠정도로 많은 차이가 발생했다. 아마르나는 당시 아케나텐의 도시 아케타텐 지방이기 때문이다.

 

아케나텐의 종교 개혁은 그가 죽으면서 모두 물거품이 된다. 그의 후계자가 바로 '투탕카멘'으로 즉위 당시 그의 나이는 너무 어려 섭정들이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하였다.이들은 아케나텐 이전으로 이집트를 빠르게 회귀시켰고, 이집트의 수도는 다시 테베로 돌아오게 된다. 투탕카멘이 20살이 되기 전  사망하며 당시 재상이 새롭게 파라오에 등극하였으나 노환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군사령관 출신 호렘헤브가 왕권을 쥐게 되면서 호렘헤브는 강력한 군권을 바탕으로 이집트를 안정시키게 된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사진 출처 - 나무위키)

 

 

호렘헤브가 이집트를 안정시키고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게 되자 그의 보좌관 출신인 람세스 1세가 새로운 파라오로 등극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제19왕조의 시작으로 분류한다. 람세스라는 이름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환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 이후 세티 1세가 파라오에 등극하게 되고, 당시 서아시아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히타이트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세티 1세 당시 히타이트는 이집트에 버금가는 국가로 성장하였고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진격해 '카데시'를 함락하고, 누비아와 리비아를 정복하며 이집트의 옛 지역 상당수를 회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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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파라오 등극

 

 

소설 '람세스'의 실존 모델인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신왕국 제19조 왕조의 3대 파라오로 60년가량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인 피람세스와 아부심벨 대신전등 대규모 건축물을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이집트의 파라오 하면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이집트를 상징하는 인물로 되어있다.

 

세티 1세에 이어 등극한 람세스 2세 당시 이집트는 세티 1세에 의해 상당 부분 이집트의 지배력을 회복하였지만 황금기에 비하면 국력이 약한 편이었다. 특히 히타이트는 계속적으로 이집트를 위협하고 있었고 해상에는 정체불명의 바다민족으로 불리는 해적 집단들이 나일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이집트의 상징인 아부심벨과 내부(사진출처 - 나무위키)

 

 

이러한 시기에 파라오에 즉위한 람세스 2세는 바다 민족들과 히타이트 등을 동시에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 접해있었다. 그는 재위 2년에 바다 민족의 한 일파인 셰르덴인을 토벌하게 되는데, 람세스 2세는 셰르덴인과의 해전에서 상당히 고급스러운 해장 전략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지형에 대한 이해와 많은 정보를 이용한 점을 미루어보아 당시 이집트의 군사력이나 행정력이 꽤나 높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해상권을 어느 정도 장악한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의 결전을 준비한다. 총 4차례에 걸쳐 시리아 원정을 떠난 람세스 2세는 1차 원정에서 레바논의 소도 베이루트 근방인 비블로스까지 진격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히타이트의 봉신국들 가운데 하나인 아무루를 복속시켰다. 세티 1세 시절 그를 따라 카데시 지방까지 진출한 람세스 2세는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시리아와 가까운 나일강 삼각주에 피람세스라는 새로운 수도를 짓고 시리아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는다.

 

 

카데시 전투

 

 

준비를 마친 람세스 2세는 2차 시리아 원정에 돌입한다. 그는 약 1만 6천 명의 보병과 2,000여 대의 전차, 4,000여 명의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레반트 일대로 진격한다. 당시 레반트 일대는 히타이트의 명군으로 알려진 무와탈리 2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이 전쟁이 바로 세계 최초의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된 '카데시 전투'이다.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의 패배나 혹은 무승부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람세스 2세는 아문, 라 부대를 모두 잃어버리고 카데시 요새를 공격할 병력이 모자람을 판단하고 군대를 물리게 된다. 다마스쿠스를 거쳐 이집트로 후퇴한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의 동맹도시나 소국들을 약탈하게 되고, 히타이트또한 이집트를 뒤쫓으며 이집트의 군사 거점인 우피 지방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이집트의 아시아권 영향력은 축소되는데 이에 원래 이집트 영향권에 있던 가나안 지역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가나안 지역의 불안정세로 람세스 2세는 다시 시리아 3차 원정에 나서게 된다.

 

 

카데시 전투의 기록(사진 출처 - 나무위키)

 

 

람세스 2세는 시리아 3차 원정에서 군대를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본인이 직접 이끌고 나머지 한 군대는 왕세자인 아문헤르케페세프가 이끌었다. 아문헤르케페세프는 네게브 사막을 지나 가나안의 대도시인 에돔을 점령한다. 람세스 2세 역시 가나안의 대도시인 예루살렘과 예리코를 공격하며 아문헤르케페세프와 합류하게 되고, 이집트군은 다마스쿠스 인근의 군사 요충지인 우피 지방을 다시 되찾는 성과를 거둔다.

 

람세스 2세는 재위 8년 차에 마지막 4차 시리아 원정을 떠난다. 4차 원정으로 람세스 2세는 가나안 지방과 튜니프, 카데시를  잇는 영토를 얻게 된다. 카데시 전투의 패배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던 이집트는 마지막 시리아 4차 원정을 통해 이집트의 군사력을 다시 공고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불안한 관계는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의 후계자인 무르실리 3세가 이집트로 망명하면서 종결된다. 무르실리 3세가 당시 히타이트에서 강력한 반대세력인 삼촌 하투실리 3세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면서 왕위에서 쫒겨나게된것이다. 이때 람레스 2세와 하투실리 3세 사이에 평화 협정을 맺게 된다. 기원전 1258년으로 이 협정은 양 국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맺은 최초의 평화 조약의 증거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협정으로 남아있다. 기록에 따르면 양 국가 모두 '상대가 청해서 우리가 관대하게 화평을 받아들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 협정으로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고 서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축소된 람세스 2세가 조금 더 불리한 협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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