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벌거벗은 세계사 26.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이야기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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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이야기는 대부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정도로 알고 있다. 이 호메로스의 작품은 서양 문학의 최초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포스팅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다음으로 미루고 로마의 건국에서 카이사르의 죽음까진 로마 공화정시대까지 대~~~~충 알아보는 시간이다!!!!

 

 

로마의 시작 -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신화

 

 

 

로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건국신화를 포함하여 역사 이전 및 초기 로마시대에서 시작한다. 보통 로마 왕국이라 일컫는 시기는 기원전 753년경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로물루스 이래 왕정은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들어서기까지 이어졌다. 로마는 건국 이래 기원전 500년경까지 일곱 명의 왕이 통치하였다. 처음은 로물루스를 포함한 라틴인과 사비니인 출신이었고, 마지막 세 명의 왕은 에트루리안으로 프리스쿠스, 툴리우스, 수페르부스이다. 이 시기를 일 인정 시기, 혹은 왕정 시기라고 부른다.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멸망한뒤 라티움에 정착한 아이네아스는 그곳에서 왕 라비두스를 만났고, 그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아스카니우스라는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의 후손이 누미토르와 아물 리스이다. 둘은 왕위 계승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되고, 여기에서 동생인 아물리우스가 승리하게 된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감옥에 가두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를 후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여사제로 만든다. 하지만 마르스에 의해 쌍둥이를 낳게 되는데 이 쌍둥이가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이다.

 

 

트로이전쟁(https://hwiki.eumstory.co.kr/index.php/%ED%8C%8C%EC%9D%BC:%ED%8A%B8%EB%A1%9C%EC%9D%B4_%EC%A0%84%EC%9F%81.jpg)

 

 

아물리우스는 실비아가 쌍둥이를 낳았다는 소식을듣고 쌍둥이를 티베리스강에 버려버렸다. 쌍둥이는 근처 암늑대에게 발견되었고 늑대들에 의해 키워졌다. 후에 목동인 파우스툴루스가 쌍둥이를 데려다 키웠다. 쌍둥이는 양치기로 성장해서 우연히 누미토르를 만나 그와 혈연관계임을 알게 된다. 누미토르는 쌍둥이를 사주하여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누미토르는 알비롱가의 왕이 된다. 그 뒤 쌍둥이는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그들의 무리와 함께 7개의 언덕에 있는 로마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한다. 후에 로물루스와 레무스간 싸움이 벌어져 레무스는 죽게 되고 로물루스가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 로물루스는 신생 도시인 로마에 아내감이 부족해지자 사비니인 마을을 공격해 여자들을 약탈하여 자신이 건설한 로마로 데려온다. 이것이 바로 로마 건국 신화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인데, 이는 기원전 3세기경 시인들과 역사가들이 각각 라틴, 에트루리아, 그리스에 유래한 여러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잘라내고 짜맞추어 지어낸 이야기다.

 

 

로마 공화정의 시작

 

 

앞서 말한 로마의 건국신화를 포함한 고대 로마는 기원전 510년경 왕정이 폐지되고 이후 450년간 로마는 공화정 체제로 변신하게된다. 이 시기가 로마 공화정이 시작된 시기이다. 로마 공화정은 권력의 분리와 견제와 균형 원칙을 중점으로 한 복합적인 정치 체제였다. 이는 파트리카와 플레브스가 오랜 시간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 공화정으로 발전했으며, 공화정 초기에는 왕정 시대의 귀족들이 통치하였다. 하지만 기존 귀족들의 통제를 통해 새로운 귀족이 출현하게 된다. 공화정 출범 후 200여 년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중해로 영토를 넓힌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 그리스, 갈리아 남부까지 정복하며 공화정 체제는 점차 제국주의로 변질되게 된다.

 

당시 로마 공화정의 정치는 상당히 뛰어난 정치 체제였던것으로 보인다. 공화정이라는 말이 'res publica'의 번역어인데 이는 공적 문제와 공동의 재산을 의미한다. 당시 이러한 로마의 정치 체제를 갖춘 로마 공화정이지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고, 귀족들이 통치행위를 균등하게 분담하되 귀족 계층이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법과 제도를 갖추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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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전성기 -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120년간 3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인다. 포에니는 페니키아인이란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기 때문이다. 당시 지중해는 카르타고가 패권을 잡고 있던 시기로, 로마는 시칠리아를 통해 영토확장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는 것은 카르타고였지만 로마의 해군력이 카르타고를 능가하였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마무리될 무렵 마케도니아와의 전쟁도 끝나게 되고, 동부 지중해에서 로마-시리아 전쟁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게 되며 로마는 이를 기점으로 지중해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을 끝으로 멸망하게 된다. 

 

포에니 전쟁이 유명한것은 바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카르타고의 '한니발'때문이다.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한 것은 현재까지도 영화로 제작되며 많은 서사거리를 남겼다.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면서 많은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를 비롯해 많은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하며 전쟁이 종결된다. 당시 카르타고는 전쟁 패배의 대가로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는데, 이후 지중해 서부의 패권과 이권을 모두 로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기원전 264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개혁이 시작되는 기원전 133년까지가 로마 공화정의 최대 전성기 시기였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 - 그라쿠스 형제 개혁의 실패

 

 

로마 공화정은 최대 전성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사회, 겅제, 군사적 문제가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했다. 중소계층이 빈민층으로 몰락하고 100여 년 이상 지속된 전쟁으로 많은 시민들이 전사하면서 병력도 급감하게 된다. 거기에 시칠리아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곡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는 당시 스피키오 가문과 더불어 로마의 최고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공화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급진적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반대 귀족세력과 더불어 평민들의 투쟁으로 로마는 오히려 더 폐허가 되고 만다.  그렇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을 비롯한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당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나이는 30세였다. 

 

이후 기원전 123년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선출되고 그는 티베리우스보다 훨씬 광범위한 개혁들을 단행한다. 하지만 가이우스의 개혁 역시 보수적인 귀족파의 반대로 가이우스 또한 티베리우스처럼 살해되어 티베리스 강가에 버려지게 된다. 카르타고와의 전쟁 이후 지중해를 기점으로 점차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귀족들은 그 바탕이 된 평민과 로마 공공의 선을 위해 헌신했던 고귀했던 귀족적 정신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로마 공화정도 무너져 내리게 된다.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의 등장과 실패, 그리고 제1시민 옥타비아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오랜 전통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원전 58년 갈리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오늘날 중앙 프랑스 및 북 프랑스, 벨기에와 독일의 일부 지역까지 로마에 귀속시키며 서유럽이 로마 문화권으로 편입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기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 시기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귀족파의 협력을 얻어 단독 집정관으로 임명되면서 힘의 균형추가 품페이우스에게로 기울어지게 된다. 기원전 49년 원로원은 갈리아에 있는 카이사르에게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면서 로마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고, 폼페이우스에겐 무제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버린다. 앉아서만 당할 수 없었던 카이사르는 깊게 고민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이 삼두체제를 없애고 최종 승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말로 카이사르가 자신이 반역자가 될 것을 알고도 로마로 진격하고, 품페이우스와의 내전 끝에 카이사르가 승리하게 된다.

 

 

로마 콜로세움(https://www.kdemo.or.kr/d-letter/all/page/54/post/344)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국을 재건하기 위해 여러 개혁들을 시행한다. 원로원의 수를 900명으로 늘린 뒤 로마에 새로 편입된 이탈리아 출신과 갈리아 출신들에게도 원로원직을 개방하며 로마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모든 권력을 본인에게 집중시킨다. 하지만 너무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카이사르를 로마 공화정을 지탱하던 보수적원 원로원들의 분노를 하게 되며,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그의 친구이자 믿고 의지했던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죽기 전 '부르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절대로 부르투스가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터라 부르투스의 배신은 카이사르 본인에게도 죽음이전에 엄청난 배신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기존 보수 귀족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이후 약 100여 년간 지속된 로마 공화정의 내전을 종식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후 기원전 31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무찌르며 드디어 로마 공화정 내전을 종결시키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Augustus(존엄한자)와 Princeps(제1시민)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장악하며 로마 제국의 일인자가 된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죽음과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종결로 로마 공화정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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