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꼭!!! 빠져서는 안되는 가문이 바로 유럽의 명가 '메디치' 가문이다. 이들은 왜 그렇게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예술의 도시로 만들었을까? 유럽의 명가 이야기 두번째.. 위대한 로렌초!!!! 메디치 가문 이야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의 탄생설화(?)는 2가지가있다. 메디치라는 뜻은 당시 이탈리아어로 의사, 약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보통 메디치 가문을 의사 가문으로 많이 알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메디치 가문은 1230년에 처음 기록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 이전 가문의 역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의사 가문과는 큰 연관성이 없어보인다. 그들은 상인 조합에 속한 가문으로, 당시 피렌체에는 20여가지의 길드가 존재했는데 이들 길드에 속하지 않은채 경제 활동을 하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들이 의사 가문이라는 설은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스모가 의사상인들인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로 정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에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의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보통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는 특히나 르네상스 예술의 엄청난 후원자였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정부를 지배하며 피렌체를 예술과 인문의 도시 국가로 만들었다. 이들은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에스테, 곤차가등의 가문과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탄생시키고 전성기를 이끈 가문으로 평가받는다. 한때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은행 10여개를 소유한 재벌 가문으로도 유명세를 떨친다.
메디치 가문의 유래와 성장
약사라는 의미의 '메디코'에서 유래된 메디치 가문은 약업으로 재산을 모은 후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특히나 14세기 초에는 프랑스, 스페인과 함께 모직물 교역의 중요 집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1400년에 메디치 일가는 피렌체 내부의 음모에 연루되어 두 명만을 제외하고 피렌체 정치에서 추방되는데 이 중 한사람인 아베라르도 데 메디치가 바로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그의 아들인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리게된다. 조반니 디 비치 이후 메디치 가문은 둘로 나눠지게되는데, 장남인 코시모 계통과 차남인 로렌초 계통이다.
143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비공식적 국가원수) 자리에 앉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실권자가된다. 이후 이들 가문은 1537년 피렌체의 초대 공작인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가 암살되기까지 피렌체를 지배하게된다. 이후 피렌체의 권력은 차남 계통의 로렌초계로 넘어가게되며 초대 토스가타 대공인 코시모1세가 그 시작이다.
코시모와 그의 가족들은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울 두고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등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피렌체 시민의 절반가량이 메디치 가문이 경영하는 곳에서 일했다고 할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였다.
메디치 은행으로 시작된 금융업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한 은행이었다. 당시의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를 토대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후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에까지 그들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가게된다.
위대란 로렌초 '로렌초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다. 원래는 일 마니피코(Il Magnifico)라고 불렸는데 이를 번역할 때 '위대한 자'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당시 귀족의 칭호나 작위를 쓸 수 없던 인물이기에 굳이 번역하면 '대인(大人)'으로 번역될 수 있다.
당시 파치 가문은 메디치 가문을 멸망시키고 피렌체의 정권을 잡기 위해 사건을 벌이게된다. 1478년 피렌체 대성당에서 미사를 하던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을 살해하기로 계획한다. 이때 형인 로렌초는 부상을 입긴하였지만 동생 줄리아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된다. 그리고 메디치 형제 2명을 살해하고 용병들을 이용하여 정부를 장악하려 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만다.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파치가문의 주동자들은 체포되고, 파치 가문의 수장인 야코포는 탈출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붙잡혀 송환되어 화형에 처해지게된다. 파치 가문은 멸문을 당하게되며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된다.
당시 교황인 식스토 4세는 메디치 가문과 대척점에 있었지만 이번 파치 가문 반란을 간접 지원하였다. 식스토 4세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피렌체를 교황령에 포함시키려고 한것이다. 식스토 4세는 파치 가문 반란 사건을 계기로 피렌체 가전체를 파문하면서 1478년에서 1480년까지 2년여간 전쟁을 벌이게된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창업한 메디치 은행은 유럽 여러 국가에 은행 지점을 개설하며 은행업은 메디치 가문의 핵심사업으로 성장한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의 성장으로 축적된 부를 예술과 문화, 교회등에 후원을 하며 그들의 명성을 점차 쌓아가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영향력도 키우면서 피렌체를 다스릴 수 있는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조반니의 증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이르러 가문은 최고의 황금기를 구축하게된다. 1478년 교황령 연합군의 침공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피렌체가 멸망직전에 이르는데, 이때 외교담판으로 피렌체를 구해냄으로서 피렌체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게된다. 로렌초는 뛰어난 외교, 정치력 역량을 발휘하며 피렌체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조정하면서 피렌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의 평화를 구축하게된다. 그러면서 로렌초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게되는 이때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은 예술가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이처럼 로렌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부흥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금융업으로 축적한 부를 예술가들에게 후원함으로써 피렌체를 이탈리아 내에서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게된다. 로렌초는 피렌체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많은 후원을 하며 자연스레 피렌체를는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다.
메디치 은행의 파산과 메디치 가문의 몰락 그리고 부흥
로렌초는 뛰어난 외교능력과 정치능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가문의 명성을 떨치게했지만 경영쪽으로는 완전 무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금융계의 수장이었지만 기본적인 재무관련 서류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고하니 금융업의 수장으로서는 낙제점이었던것으로 보인다.
그의 무능함으로 메디치 은행들이 차례대로 망하게 되는데 1472년 런던지점을 시작으로 밀라노 지점, 브뤼제 지점, 베네치아 지점등이 줄도산하게된다. 하지만 경영에는 낙제점이었던 로렌초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나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할 시기에는 피렌체 본점만 남고 모든 유럽의 메디치 은행이 문을 닫게된다. 특히나 런던 지점이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다가 받지못하며 파한한것이 결정적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이 사라지면서 피렌체의 르네상스도 저물기 시작하였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나폴리를 정복하기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하게되고, 피렌체의 피에르 데 메디치는 변변한 저항없이 항복을 하게된다. 이에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게되고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을 당하게된다. 이때 피렌체에서 추방된 메디치 가문은 18년이나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추기경에 오른 조반니 데 메디치는 프랑스를 상대로 라벤나 전투에 참여하게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된다면 다시 피렌체의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벤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조반니 추기경은 프랑스에 생포되지만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있던 조반지는 탈출하여 귀국하게된다.
이후 여러사건이 반복되면서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인다. 당시 피렌체의 수상이었던 소데리니는 신변안전을 요구하며 망명을 하게되고, 드디어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인 율리오 2세에게 임명받은 교황특사의 자격으로 피렌체 입성, 메디치 가문은 18년만에 다시 피렌체의 통치자로 돌아올 수 있게된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1526년 코냑동맹을 결성한 후 황제인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위해 코냑동맹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개입하면서 교황이 있는 로마가 정복당하게되는데, 메디치 가문은 이때 일어난 피렌체에서의 반란으로 다시 추방을 당하게된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구심이 되는 교황의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코냑동맹전쟁의 결과가 황제의 승리로 끝나며 교황은 1529년 바르셀로나에서 황제 카를 5세에게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통치권 회복을 요구하게된다. 이후 피렌체를 둘러싼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머쥐게되고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게된다. 교황인 클레멘스 7세는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를 공작으로 임명하며 피렌체에서의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점차적으로 키우게된다.
(포스팅은 글쓴이의 얕은 지식과 구글, 다음, 나무위키등에 있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