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여행 1탄 - "우리는 누구인가?" 독립기념관 1관 '겨레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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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맞아(6월 22일) 뭔가... 먹을거리도 먹고.. 볼거리도 볼.. 그런 장소가 없을까... 그때 떠오른 게 천안이었다. 천안은 작년에 병천순대를 먹으러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천안은 병천순대 먹방과 더불어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기념관이다. 이번 천안여행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병천순대도 먹고 함께 마음의 양식도 쌓을 겸 독립기념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때마침... 비도 살짝 내려서 무덥지않고, 시원한 날씨에 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독립관은 총 7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7관은 공사 중이고 6관까지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관람한 건 3관까지만이다... 이번 천안 여행 1탄 포스팅은 그 첫 번째.. 독립기념관 1관 '겨레의 뿌리'이다.

 

태초의 빛 - 우리 겨레의 무궁한 번영과 영광을 기원합니다

 

겨레의 탑을 가기전 보이는 '신념의 나무'.. 이 나무는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과 굳건한 신념을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신념의 나무'로 표현하였다.  신념의 나무는 360도 회전하며 다방면에서 관람을 할 수 있다.

 

 

겨레의 탑은 대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양손과 같기도 한 독립기념관의 상징탑이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영원불멸하게 웅비하는 한민족의 기상과 자주와 독립, 통일과 번영에의 의지를 나타냈다.(겨레의 탑 설명)

 

겨레의 탑

 

독립기념관 건립문 안내를 읽으면서 깜작 놀란 건 1987년에야 건립이 되었다는 것이다. 광복을 1945년에 했는데... 4.19 혁명을 거치며 민주주의 기반을 닦았는데... 1987년 6.10 항쟁을 거쳐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뤄내고 나서야 개관을 했다는 것이... 그리고 두 번째 충격은...

 

독립기념관 건립문

 

바로 이 광개토대왕릉비다...광개토대왕릉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 독립기념관의 콘셉트와 맞는지.. 조금 의구심이 든다... 우리 한민족은 반만년의 세월 동안 외세의 침입을 수천번이상 막아내며 단일민족으로(물론 난 동의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지켜온 민족으로, 보통 한민족을 표현할 때 외세의 침략을 받아서 지킬지언정 침략은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한민족 역사에서 유일한 침략군주이자 정복군주로 한반도의 영토를 가장 많이 확장한 인물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외세의 침략에 국권을 침탈당했고, 그 국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한 우리 겨레의 한을 보여줘야하는거 아닌가... 하는 짧은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런 한민족이므로 광개토대왕은 그 어떤 군주보다도 위대하고 뛰어나 보일 수 있겠으나.... 그냥 잠시..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독립기념관으로 향하는 시퀀스는 상당히 단조로우면서도 획일적이고 단편적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우측에 자리잡고 있고, 겨레의 탑을 지나서 일직선으로 쭉~~~ 직진을 하면 눈앞에 '독립기념관'이 보인다.

 

겨레의 집

 

겨레의 집은 독립기념관의 상징건물이자 광복절 경축식등이 거행되는 국가적 기념공간이다. 길이 126m, 폭 68m로서 축구장 크기에 15층 높이의 동양 최대의 기와집이다. '독립기념관' 현판은 서예가 김충현 선생이 쓰셨고 오옥진 선생이 새겼다.

 

불굴의 한국인

 

 

독립운동시기 문화예술 특별전으로 7월 21일까지 이곳 겨레의 집에서 '저항의 무대' 전시가 열린다. 이 전시는 문화, 예술인들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풀어내고 있다.

 

저항의 무대

 

독립운동에 관련된 문화, 예술 파트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것이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일 것이다. '아리랑'은 국내에서 1926년 처음 상영된 무성영화이다. 흑백 35mm 무성 영화로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을 맡았다.

 

나운규 '아리랑'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인 안필립은 미국 헐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계 배우이다. 그는 배우활동 중에도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김영과 안필립

 

중국에서도 항전연극으로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송면수는 3.1운동을 모티브로 한 '삼일혼'과 한중연합군의 투쟁을 다룬 '국경의 밤'등의 극본을 집필하였다.

 


영화 '아리랑'에 이어 가극 '아리랑'은 중국에 한국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알리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가극 '아리랑'

 

단순히 독립운동이란 태극기를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총, 칼로 무장하여 직접적인 전투를 통한  독립운동도 있지만 나는 누구인가를 잊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이러한 문화, 예술분야의 독립운동도 결코 낮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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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집을 지나서 뒤로 들어서면 이제부터 독립기념관 1 관부터 7관까지 관람할 수 있다.. 여태까지 아직 1 관도 안 본 것이다... ^^

 

겨레의 집 뒷편으로 보이는 광장

 

1관 '겨레의 뿌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다.

 

 

1관 입구를 들어가면 처음 보이는 작품이다.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흔히 우리나라를 '고인돌 왕국'이라고 한다.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가량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통은 최고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정이 되고 유물로 돌칼과 화살촉,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 붉은 간토기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집트에는 피라미드, 한반도에는 고인돌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유적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본적으로 물이 있는 곳에 인류가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이나 의주, 무산 등의 지역이 나중에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부여와, 동예, 옥저등의 부족국가로 성장하였고 공주, 순천, 김해 등지 지역이 마한, 진한, 변한의 삼국시대 직전의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을 것이다..(나의 추측이다...^^)

 

맨아래 한경은 탐라국의 시작이 되겠지요^^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는 약 70만 년 전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는 다음지 않은 뗀석기를 도구로 사용하였고, 보통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면서 짐승과 물고기를 잡거나 채집 생활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는 주변의 작은 돌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는 약 8,00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부터는 용도에 맞게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를 사용하게 된다. 역시나 이때당시에도 강가에 거주하며 움집을 짓고 채집생활을 하였으며,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드디어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토기도 발달하게 되어 식량을 저장하기도 하였으며, 일정 부분의 예술활동을 한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좀 더 정교하게 돌을 가다듬게된다

 

주먹도끼는 돌을 사용한 인류 최초의 도구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이러한 돌로  사냥을 하거나 나무뿌리를 캐어 생활하였을 것이다.

 

 

난 아직까지도 벽화의 탄생의미를 잘 모르겠다. 아래 '천전리 바위그림'은 기하하적 무늬와 동물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곳이 농경이나 사냥과 관련된 신성한 장소임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이곳 그림은 바위 아래 새겨진 신라시대의 그림과 글씨를 통해 진흥왕의 즉위와 관련된 신성한 장소이며, 화랑도와도 관련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럼 이 바위그림은 신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에 처음 제작하게 되어 신라시대에 완성했다는 의미일까. 이러한 그림 역시 어떤 권력자가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천전리 바위그림

 

본인처럼 국정교과서를 경험한 세대는 중학교 국사책에서 가장 많이 본 그림이 바로 아래의 '빗살무늬토기'일 것이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인류는 곡식을 저장하게 되었고 곡식을 저장했다는 의미는 곡식의 양이 많았다는 뜻이며, 곡식의 양이 많았다는 의미는 아마도 한 곳에 정착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벼농사로 인해 많은 재산을 축적하게 되고 그렇게 재산을 축적한 이들 중 일부가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한반도에서도 그렇게 권력자가 부상하면서 첫 국가가 나타는데 바로 조선이 우리 민족의 첫 번째 국가이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 지금의 백두산 근처에서 조선을 건국하였고 기원전 3세기경에는 중국의 연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의 유민들은 한반도 이남으로 이주하면서 이들은 당시 삼한사회와 고대 삼국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의 시작 조선의 탄생

 

아래사진은 가야와 고구려의 기마무사상이다. 차이점을 잠시 살펴보면 왼쪽의 가야의 기마무사와 말은 철로 된 갑옷과 투구, 머리가리개등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가야의 철제기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반대로 고구려의 기마무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무사의 마상기술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가야는 신라와 백제, 중국의 군현을 비롯해서 왜와 교역을 하는 국가였다. 특히나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제련기술이 뛰어나서 왜의 경우 가야로부터 철 수입이 매우 중요하였다. 왜는 백제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이전에 가야를 통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게 된다.

 

가야의 제철공방

 

가야가 당시 질 좋은 철이 생산되는 지역을 기반으로 우수한 철기술을 보급했다면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로 되어있고 중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를 방어하는 나름의 기술을 보완, 발전시켰다.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에 비해 성을 쌓는 기술이 더 뛰어난 것은 이러한 고구려의 현실적인 지형과 국제적 관계에 있다.

 

산성의 나라 고구려 - 고구려는 중국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을 쌓은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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