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여행 2탄 - "간첩을 축출하자" 독립기념관 2관 '겨레의 시련'
- 여행과 맛집/곰돌이의 여행
- 2024. 6. 26.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수많은 물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 서양대국들은 그들이 생산한 물건을 자국에서 모두 처리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눈은 또 다른 세상을 향했고 그렇게 세계의 제국주의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토는 황폐해져 갔고 백성은 희망의 끈을 놓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조선의 그러한 상황에서 위정자들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다. 첫째 기존의 사대주의 관습에 벗어나지 않고 옛것을 지키며 기존의 조선을 지킬지, 둘째 당시 청나라를 통해 조금씩 유입되던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조선을 만들어 나아갈지 결정해야 했다. 모든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당시 위정자들의 선택은 전자였다. 그리고 조선은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 중세에서 근대로 변화한 서구 문명 및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국권을 찬탈당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였다. 박은식 선생 역시 그런 지식인중 한 분이었다. 그가 말한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는 그의 '한국통사' 서문을 읽고 있으면 뜬금없게도 지금의 일본 라인 사태가 떠오른다. 네이버가 십수 년을 준비하고 준비한 플랫폼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는 카카오톡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네이버 '라인'을 보안이 뚫렸다는 이유로 자기네들이 '날름' 먹어버리려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기업 간의 일을 국가가 나서는 건 옳지 않다며 한 발 뒤로 물러서는 형국이고, 일본은 마치 대한민국의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를 계기로 라인 지분을 100% 소유하기 위해 온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계획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독도를 방문한 조 국 대표를 향해, 독도는 다케시마라는 망언과 함께 조 국 대표가 독도를 방문하여 발언한 내용을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설마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러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반드시 정부 내 일본 간첩을 찾아내야 한다. 제2관 '겨레의 시련' 포스팅에서 본인이 하고 싶던 주장은 바로 '간첩을 축출하자'이다.
이번 포스팅은 이러한 국가의 시련속에서 위정자들의 태도에 의해 국가가 어떻게 서서히 죽어가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속에서도 조선을 지키려고 애쓴 인물들은 오히려 당시 권력을 쥐고있던 양반들이 아닌 민초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지방 무사들의 주도로 메이지 유신을 추진하여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왕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이어서 일본은 조선에 외교국서를 보내 새로운 국교 수립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외교 국서의 접수를 거부하였고 이를 빌미로 일본에서는 조선을 침략하여 응징하자는 '정한론'이 제기되었다. 이후 일본은 내부적으로 일왕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민권 운동을 탄압하였고, 외부적으로 류큐를 침략하면서 제국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일본의 조선 침략과정은 임진왜관때의 과정과 거의 유사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후 각 지방의 사무라이 영주들을 달래기위해서라도 더 큰 보상을 해주어야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제 야욕이 인도까지의 진출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조선 침략을 통해 조선을 사무라이들에게 분할통치하려하였고, 일본내 자신의 반대세력을 자연스럽게 전쟁에 투입되도록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기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방식이 옳은방식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일부 사무라이중 '사야가' 장군은 처음부터 전쟁을 반대하였고, 그는 어쩔수 없이 전쟁에 참전하게되자 조선에 도착한 즉시 그의 부하 수천명과 함께 조선에 귀의하게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신식 무기제조 방식을 조선에 전파하였고 왜란을 비롯한 병자호란때까지도 조선을 위해 싸우게된다. 그가 바로 역사에 기록된 '항왜'를 선택한 김충선 장군이다.
아래는 1873년 일본에서 일어났던 '정한'논쟁을 그린 선전 목적의 그림이다. 조선 정벌을 주장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와 시기상조를 주장하며 반대하였던 이와쿠라 도모미 사이의 논쟁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에도막부는 붕괴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조선에 비해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당시 서양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부러워했다. 일본역시 그들처럼 식민지 약탈전에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든 건 어쩌면 당연할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부적으로 여론을 조성하며 일본의 제국주의를 선포하게된다. 그 첫번째 침략대상은 바로 조선이었고, 그들의 조선침략의 첫 구실은 바로 '운요호 사건'이다.
1875년 9월 강화도에 접근한 일본 군함 운요호는 조선군의 포격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면서 초지진과 항산도 포대를 공격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이용하여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관세 및 사법 자주권등을 침해하는 불평등한 내용의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은 수많은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없었다. 조선은 조선을 지킬 힘이 없었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조선과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에서의 이권사업을 하나, 둘 챙겨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과 청이, 그리고 러시아등 주변 강대국들의 약탈이 먼저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들은 조선을 개화시킨다는 목적을 내세워 자신들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그들이 원하는 각종 광산사업과 철도사업권등을 뺏어가기 시작했다.
그건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직 중세 시대에 머물러있던 조선의 사대주의 사상을 비판하며 그들의 민주주의를 조선에 전파하려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민주주의가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조선에게는 엄청난 시련과 핍박으로 다가왔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조선은 알음알음 조선의 것을 외세 열강에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을 도와주겠다는 청과 러시아는 각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패배로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었고, 미국은 관전자로 일본의 조선 침탈을 의도적으로 묵인하였다.
조선의 개항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1884년 김옥균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조선을 조선의 뜻으로 개항시키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은 갑신정변 이후 10년이지난 1894년 고부민란이 일으난 이후 김홍집, 박영효등이 연립내각을 추진하며 '갑오개혁'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즈음 조선은 이미 스스로 개혁할 수 없을정도로 조정은 부패해지고 말았다.
조선을 강제로 개화시킨 열강들은 조선에 새로운 문물을 전해줄 목적인지,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새로운 문물을 조선에 들여오기 시작했다. 1896년 궁궐에 전화기가 개통된것도 그즈음이다. 스웨덴 엘엠 에릭슨사의 전화 교환기가 궁궐에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 교환기는 100회선까지 연결할 수 있었다.
전화 교환기가 도입되면서 통신에 대한 제도도 개편되었다. 아래는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사용한 도장이다. 당시 통신원은 우체, 전신, 전화, 전기, 선박, 육해운송에 관한 사무를 보던 대한제국의 관료로 1900년 농상공부에 속하였던 통신국이 독립한 것으로 비서, 번역, 체신, 관선, 회계, 문서 등의 부서를 두었다.
아래는 1884년 11월 우정총국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이다. 우표에는 화폐 단위는 '문'을 사용한 가격이 인쇄되어 있다. 총 5종의 우표 제작을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의뢰하였으나 5문과 10문, 2종류의 우표만이 도착해 사용되었다. 우표에 새겨져 있는 '대조선국우초'라는 표현으로 보아 초기 우표의 명칭이 우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와 갑오개혁 이후 설립된 국공립학교 그리고 열강의 칩락에 대응하여 설립된 사립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883년 서당을 개량한 원산학사를 시작으로 1885년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 1886년 국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등이 설립되면서 이곳에서는 수학, 외국어, 지리, 정치, 경제 등의 신학문을 가르치게 된다. 아래는 대한제국 외국어학교 교관 나현구의 임명장이다. 외국어학교는 육영공원의 후신으로 1895년 외국어학교관제 제정과 함께 설립되었다. 나현구를 외국어학교 교관 판입관 8급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육영공원 교과서는 영어로 되어있다. FIRST READER부터 SIXTH READER까지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영국의 초등 교재 'LONGMANS' NEW READERS'의 첫 번째 책으로 짧은 분량의 동화 등이 실려있다. 육영공원 일록은 육영공원의 학생이었던 박경원의 일기이다. 학교의 공식 기록인 '등록'외에도 미국인 교사의 근무 태도, 학생 구성의 변동 등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배재학당 합동은 1895년 1월 조선정부와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사이에 체결된 교육 위탁계약서이다. 배재학당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영어과 학생 수를 기준으로 결정되었고, 계약은 두 차례 갱신되어 1901년 8월까지 지속되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신문과 회보를 발행하는 등 민중 계몽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고 국정 개혁안을 채택하여 정부에 제시하기도 하였다. 독립협회는 이후 고종 황제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탄압으로 해산 되었지만 민중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열강의 침략을 견제하는 등 민중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한 근대적 민족 운동을 평가받는다.
조선의 개항은 의학에서도 변화를 일으켰다. 아래는 지석영 선생이 저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서이다. 상. 하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국 의사 제너의 종두법과 실습 방법 등이 체계적으로 실려있다. 갑오개혁으로 정부주도의 종두법이 최초로 시행된다.
1894년 지배층의 폭정에 항거하며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동학농민운동은 일어나게 된다. 당시 동학군은 각지에 자치 기구를 설치하여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1800년대 후반 조선의 모든 지역이 그러했겠지만 특히나 전라도 지방은 그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전라도는 곡식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평야가 있었지만 지방 관리들의 조직적인 약탈로 전라도의 피해는 계속 쌓여만갔다. 특히나 전라도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수탈은 어마어마하였다. 농민들은 살기위해서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1894년 1월에 발생한 '고부민란'이다. 이 고부민란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조선 후기의 사상이다. 천주교를 비롯한 서교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동학'이라 이름붙였으며 최제우 이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계승되었지만 1898년 해월 최시형이 순도한이후 계승과정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여러분파로 갈라지게된다.
일부 위정자들의 약탈과 불법때문에 봉기된 동학농민운동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도움으로 진압이 되게된다. 당시 조선 조정의 보수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위해 일본과 손을 잡고 함께 동학군 진압에 나서게된다. 결국 그러한 조선 보수주의자들의 선택으로인해 일본은 좀 더 빠르게 조선에 상륙할 수 있게 된것이다.
아래 사진은 동학농민군을 참수할 때 사용했다고 알려진 작두이다. 1894년 10월 충청남도 태안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심문 기록을 남긴 책이다. 고부 봉기부터 체포될 때까지의 사실이 문답형식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봉준의 진술을 통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동학농민군의 인적구성, 동학의 교리 및 조직등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알리는 첩보이다. 1894년 12월 6일 호남소모관이 순무선봉에 보낸 이 첩모에는 전봉준을 선조 때의 반란 주모자인 이몽학과 중국 한나라때의 황건적과 비견될 '거괴'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전봉준은 단순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유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과 외세가 신식총으로 무장을할때 동학군은 아래와 같은 무리고 끝까지 대항하였지만 결과는 뻔할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군대를 파병한 일본은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고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대학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였으나 일본군과 정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공주 우금치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후 대규모 학살을 당하며 진압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안으로는 낡고 부패한 체제를 개혁하고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고 한 개혁운동이었다.
척왜양창의는 '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충북 보은의 동학집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보국안민은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서양 열강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구호이다. 동학농민운동에서는 부패한 지도층에 대한 항거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하여 봉기하기로 약속하고 작성한 통문이다. 전봉준, 송두호 등 20명은 주모자가 누군인지 알 수 없도록 사발 모양의 원을 중심으로 서명하였다. 이들은 군수의 폭정을 벌하고 전주를 점령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는 결의를 담은 통문을 각 마을 집강에게 발송하였다.
아래는 동학교도 증서이다. 동학은 각지에 접과 포를 설치하여 조직을 운영하였는데 전남 장흥 지역 조직확대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의 신분 확인과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조선 후기 양반사회는 척사와 개화로 극명 나게 나뉘게 된다. 전통적인 사상을 지키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자는 '척사'와 나라의 문을 열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 세력은 양극으로 치닫으며 조선은 결국 회생불능이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