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은 조선 중기인 1502년 안동에서 출생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퇴계 선생에 대한 지식은 아주 소박하다. 도산서원과 조선 성리학을 완성시킨 학자정도로만 알고 있다. 왜 퇴계 선생이 훌륭한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나만 그런 건가....
내가 퇴계 선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이유는 바로 오늘 포스팅의 제목인 고봉 선생과의 사단칠정 논쟁 때문이다. 그러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다른 이유.. 여기서는 다른 건 다루지 않고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의 사단칠정에 대한 이야기를 대부분 하고자 한다.
퇴계의 학문은 영남학파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시대 당시 경상도 지방에서 최고의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대 붕당의 시작인 동. 서인의 분열을 일으킨 성암 김효원이 그의 제자이고,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과 김성일 역시 그의 제자였다. 그는 학문적으로 동인과 남인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정작 본인은 죽을 때까지 당파에 속하지는 않았다.
고봉 기대승은 1527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난 성리학자이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흔히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둘로 나뉠 수 있는데 영남학파는 지역과 퇴계 선생의 영향으로 동인과 남인이 주를 이루었고,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와 송암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과 북인으로 이루어졌다. 고봉 선생의 경우 전라도 출신이긴 하나 기호학파보다는 영남학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이 8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 '사단칠정'
이는 맹자가 주장한 것으로 그는 인간의 본성을 '사단'과 '칠정'으로 설명한다. 사단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에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으로 인, 의, 예, 지의 인간의 기본적인 착한 심성을 의미한다.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인 측은지심,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인 수오지심,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 선악시비를 판별하는 마음인 시비지심이라고 한다.
칠정은 '희', '노', '애', '구', '애', '오', '욕'의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은 이 일곱가지 감정을 살면서 표현하게 된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여기에 대해서 "사단으로 인해서 칠정이 일어난다"라고 설명하였다. 사단은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이러한 본성이 다양한 감정인 칠정으로 표출되어진다고 하였다. 인간은 올바른 마음가짐과 정신수양, 계속적인 학문탐구를 통해 인간의 좋은 본성인 사단을 잘 가꾸어 칠정을 제대로 제어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군자가 되는 길이라고 퇴계 선생은 주장하였다.
고봉 선생은 퇴계 선생과는 다르게 사단칠정을 해석하였다. 그는 "사단은 칠정의 부분집합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가 동반되는데 이 중에서 좋은 것만을 추려낸 것이 사단이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에서 최대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서인과 남인은 기껏(?) 복상기간을 1년으로 해야 한다, 3년으로 해야 한다는 왕에게 이름 석자 각인시키려고 아무런 가치 없는 논쟁으로 붕당 정치가 지금의 정당정치럼 본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치로 변질되어 갔다면 그들의 스승 격인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은 최소한 성리학의 근원적인 질문과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8년여 동안 서신을 주고받으며 치열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퇴계 선생과 고봉 선생은 25년의 나이차와, 당시 퇴계 선생이 조선시대 성리학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상대방과의 토론이었지만 퇴계 선생은 고봉 선생의 주장과 의견을 경청하였고 후에는 그의 주장 일부를 받아들이는 등 당시 최고의 성리학자로는 보일 수 없는 열린 생각으로 학문을 대하였다. 고봉 선생 역시 영남학파의 영향을 받은 이유일수도 있으나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퇴계 선생과의 토론에서 자신의 생각한 부분을 주장하면서도 절대 남을 비난하지 않고 학문적, 인간적으로 퇴계 선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단순히 학문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불변이 아닌 치열한 논쟁과 건전한 토론을 통해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발전시킬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퇴계 선생의 주장보다 고봉 선생의 주장이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하지만, '사단칠정 중 무엇이 더 중헌디'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서로의 품격을 지키며 논쟁을 이어가는 두 분의 인품이 더 인상적이었다.
도산서원은 어린 시절 수없이 봐온 서원이라 큰 감흥은 없고(앞서 말했듯이 난 안동이 고향이다.) 퇴계 선생과 도산서원이 지폐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박정희 대통령의 독단으로 결정된 것이어서 어른이 되어서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봉 선생과의 위 사단칠정 논쟁을 통해 퇴계 선생과 더불어 고봉 선생 두 분의 인품에 매력을 느꼈다.
퇴계 선생에 대해서 또 다른 인상을 받은 일화는 그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 후 재혼을 하지 않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부인과 사별 후에도 처가에 정성을 다하는 등, 당시 조선시대 싱글이 된 양반으로는 매우 특이하고 상당히 매력적인 인품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시대 당시의 상황상(?) 결국 첩을 들이게 되는데, 이 분 역시 퇴계 선생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예와 정성을 다하였으며 퇴계 선생은 후에 자식들에게 유언처럼 '너희 친 어머니는 아니지만 너희를 편견 없이 훌륭히 길러냈으니 네 어머니와 같이 대하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참.. 지금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인품의 소유자인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선조는 퇴계 선생이 숨을 거두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저술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왜에게 약탈되었는데, 약탈된 그의 저술은 일본 성리학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왜 여기서 왜가 나오는것이냐..>.<)
일하기 싫은 금요일 오후... 그냥 농땡이 피우며 몇 글자 끄적인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