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의 주관적해석... 신라인은 첨성대에서 별을 관측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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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쓸데없는  history(역사).... 는 첨성대!!!!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첨성대이다.

아래는 첨성대에 대한 나의 주관적 해석이 담긴 포스팅이다.

 

 

 

 

어릴 때 첨성대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옛날에는 망원경이 없었는데 어떻게 천문을 관측했을까...

동. 서를 막론하고 현재가 아닌 고대, 중세, 근대사회는 '제'와 '정'이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한 사회였다.

로마 교황청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가톨릭 인구가 대략 13억 정도이다.. 전 세계인구는 80억 가량되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교황청은 이 13억 인구의 대변인인 셈이다. 로마 교황이 이러한 가톨릭 '제'의 왕인 것이다.

제정분리 사회일 때 제사장의 위치는 왕의 권위 그 이상이었다. 종교라는 자체가 예전에는 국가의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으므로 제사장의 권위는 현재의 로마 교황의 권위.. 그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 고대, 중세, 근대 사회는 '제정일치'의 사회....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가톨릭을 콕 집어 말한 이유는 중세 이후 가톨릭으로 인해 뒤바뀐 역사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큰 사건이 십자군 전쟁 아닌가.. 위키백과에도 당당히 종교쟁이들의 깡패짓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서론이 길어졌다.

 

 

유일하게 현존하는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류를 모두 정복한 이후.. 길흉화복은 하늘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되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거주지를 이동하였고, 모든 자연재해는 자신들에게 내리는 형벌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쳤으며, 점을 치는 자가 그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는 고대국가가 형성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시대까지도 쭉 이어져왔다.

드라마 '주몽'에서도 봤듯이 고구려는 태왕인 송일국보다 여미을 신녀의 말 한마디가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국가정책이 바뀌었다. 신라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신라의 정복전쟁을 진두지휘한 이순재(진흥왕)보다 제사를 주관하는 미실의 힘 역시 동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위였었다.

주몽과 선덕여왕을 얘기하는것든 드라마 홍보가 아닌.. ㅋㅋㅋㅋ 두 드라마는 그 두 가지 장면으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초대(?) 시조이신 단군왕검또한 단군은 '제'를, 왕검은 '정'을 뜻하는 고조선은 제정일치를 이루었다 곤하나 그 당시의 역사적 사료는 전무하기에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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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사진 출처는 아래 사이트!!!!

 

 

 

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첨성대는 시기적으로 선덕여왕 시대에 지어진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비슷하게 그 기록이 남아있기에 선덕여왕 즉위 전, 후에 지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봐야 한다.

그럼 선덕여왕시대에 첨성대가 지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단순히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기 위해서 지은 것일까..

가야는 역사적으로 562년 진흥왕 시절,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도 배운 이사부, 사다함 등이 백제와 왜의 지원군을 모두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신라에 병합시킨다.

우리는 대가야를 비롯해서 김무력, 김유신의 가문인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이 부족국가들이 언제 멸망하고 신라에 병합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가 632년인데 가야를 병합한 지 대략 70년밖에 되지 않았다.

김유신 가문처럼 가야 왕실세력 자체가 신라에 병합된 후 협조를 한 세력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가야의 잔존 세력은 계속해서 갸야 부흥운동을 진행하였다.. 후에 백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가야 세력은 부족 집단에서 구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그들이 가진 기술력은 신라의 그것 이상이었다.

가야는 신라보다 앞서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고, 이는 신라의 청동기 문화를 훨씬 앞서는 기술을 보유했었다.

그러므로 신라는 가야를 병합하면서 그들이 가진 뛰어난 철기 기술과 문화를 신라의 것으로 편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별을 관측하는 천문의 기술도 객관적으로 신라에 비해 가야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가야가 6개 부족국가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면 능히 신라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국가로 성장했을 것이다. 오히려 정복전쟁으로 진행됐다면 지금 역사와 반대 상황이 이뤄질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신라는 가야세력을 온전히 신라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가야의 왕실세력을 신라의 진골로 편입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가야가 가진 우수한 기술력만 빼앗는 것이 아닌 기술과 사람..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방법을 상상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제'와 '정' 중.. '제'를 통한 민심의 통일을 추구했을 것이고, 그 방법의 일환이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 첨성대의 제작이었다.

천문 관측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는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 부족생활을 시작하였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알 수 있는 알려주는 제사장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이는 중세 시대인 고려를 거쳐 근대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조시대의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이다.

가뭄이 들면 왕이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가야 세력에게 이러한 첨성대의 제작은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기술력이 매장되지 않고 신라에 계승, 발전되었고 그것의 결과물이 첨성대였으니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선덕여왕을 비롯한 신라계는 이렇게 가야계가 지닌 기술을 그들이 보전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고, 가야계는 그러한 바탕 위에 신라에 협조하며 가야는 멸망했지만 그들의 문화는 지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또한 신라가 상당히 개방적인 사회이기에 가능한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첨성대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이를 첨성대 제작 자체를 비하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첨성대는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후 그들이 가진 우수한 기술력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며, 이들은 실제 첨성대에서 천문현상을 관측하며 국가의 길흉을 점쳤을 것이다.

본 포스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단순히 첨성대가 이러한 천문현상 관측용을 떠나 그 당시 국가의 '제'와 '정'을 일치시키려는 '정치'의 일환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는 실물이든 사진으로든 첨성대를 보면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 똑같은 첨성대이지만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부분도 있다.

역사적 유물은 싫든 좋든 역사가 알려주는 객과적 사실과, 그 객관적 사실을 이해하는 주관적 해석이 공존한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것을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 포스팅은 나의 첨성대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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