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2편 1945 - 1987 : 평화, 민주, 번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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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2탄 역사관 중 2편 1945-1987 : 평화, 민주, 번영을 위하여 편이다.

역사관 2편은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을 이룬 1945년 8월 15일부터 1987년 6.10항쟁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늘의 포스팅은 그 중 1987년 이후까지의 일련의 일들을 사진과 함께 설명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2편을 시작하며....

 

 

1945-1987

 

 

제는 '평화, 민주, 번영을 위하여'이다.

 

 

연표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모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을 맞이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로 북위 38도선을 분계선으로 분할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편되는 세계정세의 영향과 좌우세력의 갈등 속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좌절되었다. 유엔의 감시 아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원칙에 따라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되어 헌법을 제정하였고, 마침내 1948년 8월 15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정말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 15일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럼 여기에 나와있는것처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유령정부인가... 임시라고 붙어있어서 인정을 못하는것인가..

1919년 4월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일제강점기라고 불러야하나? 1945년에 광복을 맞았으니 3년은 또 무엇이고... 

보수정권에서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주장하는 이유는 이승만과  본인들의 적통성때문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 수립일, 건국절로 인정할 경우 대한민국의 적통성은 임시정부에 있게된다. 현 보수정당은 전신이 자유당까지 올라가기에 본인들의 적통성때문에 정부 수립일을 1948년으로 주장하는것이다. 헌데 이렇게 대놓고 주장을 못하니 국가의 3대요소니 뭐니 하면서 영토가 없었으니 임시정부는 인정할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당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들은 또 존중한다면서 궤변에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해할 수 없다.

 

광복과 함께 국내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은 북위 38도선을 분계선으로 한반도를 분할하였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되어 경제/사회적 기반 마련에 주력하였으나, 한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여 사회적 불안정과 혼란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광복으로 자유를 되찾자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논의와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해외로 떠났던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인물들은 국내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함께 정당과 사회단체를 구성해 활동했다.(광복과 미군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단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단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배포한 전단이다. 건준의 포고문과 함께 조선의 노래 가사가 인쇄되어  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광복과 함께 조직된 단체로 8.15 당일 오전 여운형이 조선총독부와 행정권 이양 등을 위한 협상을 벌인 직후 곧바로 조직되었다.(설명)

 

 

광복기념엽서와 우표, 조선인귀환증명서, 한글맞춤법교본
광복기념엽서와 우표, 조선인 귀환 증명서, 한글 맞춤법교본

 

 

광복 1주년을 맞아 발행된 엽서와 우표이다. 당시 국내애ㅔ 인쇄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부득이하게 일본에서 인쇄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이미 제작된 엽서에 개정인을 찍어서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설명)

조선인 귀환 증명서는 광복 이후 일본에서 고국으로 귀환하는 한국인들에게 발급된 증명서이다. 연합국사령부가 이우성에게 귀환을 허가하였다.(설명)

한글 맞춤법 교본은 경복중학교 교사였던 장하일 씨가 직접 집필하고 사용하였던 한글교재이다. 광복 직후 한글 교재의 부족으로 일선 학교와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한글 교재를 발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설명)

 

 

미군정 법령집과 한국민주당 선언문
미군정 법령집과 한국민주당 선언문

 

 

미군정 법령집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국 통치에 사용한 미군정의 법령을 모은 책이다.(설명)

1945년 한국민주당에서 제작한 창립 선언문 전단이다. 입시정부 봉대를 통한 자주독립국가 건설, 민주주의 체제 확립, 민생안정 등을 목표로 하는 선언문과 5개 강령, 8개 정책 기조가 인쇄되어 있다.(설명)

 

한국민주당은 민족주의 계열의 우익 정당이다. 송진우, 김성수, 김병로, 조병옥, 윤보선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정당으로 현재 팔순의 몸을 이끌고 여.야 가릴것같이 본인이 킹 메이커가 되려고 하는 김종인씨가 김병로의 손자이다.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했으며, 고려중앙학원 초대 이사장이다. 조병옥은 독립운동가이자 제주 4.3사건의 주모자이다. 그의 아들인 조윤형, 조순형 모두 민주당 계열에서 정치를 하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극단적인 반공주의적 사상때문에 평가가 엇갈린다. 굳이 호불호를 따진다면 난 불호에 가깝다. 송진우는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의 김성수에 이어 3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34년 동아일보 사설에서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여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였다. 난 이 사람들 중 유일하게 고하 송진우 선생만을 존중한다.

 

 

지도로보는 국내 주요사건
지도로 보는 국내 주요사건

 

 

냉전 체제 속 북한은 소련의 승인과 중국의 지원약속을 받아 전면전을 계획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유엔군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이 되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비롯해 큰 인적, 물적 피해를 남겼다. 한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 관계를 제도화하였다.(6.25전쟁과 그 영향)

 

대한민국은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반토막이 났고, 미국은 한반도의 민주화를(?) 핑계로 소련과 짝짜꿍이 되어 38선을 기점으로 신탁통치를 결정한다. 또한 6.25 전쟁으로 2차 세계대전의 패잔국인 일본은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급속도로 패잔국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나뉘어갔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와 독일은 분할되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장악해갔다. 미국은 서유럽을 지원했다. 이란과 그리스 등 세계 각지에서는 미국과 소련으 지원 속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났다.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 및 마셜 플랜발표와 소련의 코민포름 창설, 1948년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와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등으로 냉전은 심화되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받아 남침을 준비했다.(설명)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전쟁배상금을 물어야하는데 승전국은 독일에서 모든 공장의 설비들을 다 떼서 가져가 버려 독일이 다시 일어서는데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었다. 특히 영국은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였는데 그 기간이 종료되며 이 재정 지원을 미국에 부탁하는 외교문서를 발송하게된다. 미국 입장에서 영국이 철수하면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공산화 될것을 우려해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긴급지원계획을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발표하게된다. 이것이 흔히 우리라 알고 있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다. 이는 모든 자유민은 무장한 소수 혹은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명목인데, 이 트루먼 독트린으로 인해 냉전(cold war)이 시작되었다. 

코민포름은 국제공산당의 정보기관이다. 원래 코민테른이 존재했으나 1943년 해체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플랜등에 의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소련공산당을 주도로  만들어졌다. 마셜플랜은 유럽부흥운등을 뜻한다.

 

 

1945-1950

 

 

무운장구 태극기
무운장구 태극기

 

 

출정하던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며 남긴 글이  남겨진 태극기이다. '무운장구, '영웅출정 대한민국 국군용사', '용사의 두 어깨에는 삼천만을 짊어져 있습니다'와 같은 글이 적혀있다.(설명)

 

 

유엔군 서명 태극기
6.25 전쟁 참전 유엔군 서명 태극기

 

 

6.25전쟁에 참전한 미 공군 Dickerson이 유엔군의 사인을 받은 태극기이다. 사인과 함께 이름, 소속, 출신지역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강릉, 진해, 대구 등지에 있던 비행단이 'K-18 Kandnun, K-10(Chin Hai), 'Taegu'등이 적혀있다.(설명)

 

 

민주주의 시련4.19 혁명

 

 

광복을 맞이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였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해보였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우리의 손으로 쟁취한것이 아닌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속에 북한은 사회주의로 남한은 민주주의로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해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집권하면서 바로 나타나게 된다. 댓가없는 자유는 자연스럽게 권력에 대한 아집과 그 주변이 부패하기 마련이다. 정권을 잡은 자유당은 본인들의 과거로 인해 친일 청산은 뒤로하고 무한한 권력을 잡기위한 구상에만 몰두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3.15 부정선거이자, 사사오입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전에 한 번 다룬적이 있으므로 다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다. 어쨌든 그들의 이러한 무모한 권력남용은  자연스레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되고,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개혁적 국민혁명이 일어난다. 그 정점이 바로 4.19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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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1

 

 

이렇듯 대한민국은 느리지만 국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6.25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다시 한 번 전쟁의 폐허에 주저앉게된다.

 

 

한강의 기적

 

 

하지만 우리는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위 설명에서도 애기하듯이 이는 특정기업의 부를 축적시키고, 일반 노동자들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내가 알고있는한 현재 우리나라 재벌들 가운데 맨땅에 헤딩(?)해서 기업을 일군 사람은 고 정주영 회장의 현대뿐이다. 물론 정주영 회장의 사후 왕자의 난으로 인해 기업은 쪼개져버리고 말았지만 최소한 정주영 회장은 그 어떤 집안의 지원없이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현대를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의 삶에 대한 주관적 비판은 제외하고다.

 

 

삼성전자 텔레비전
삼성전자 텔레비전

 

이 당시 삼성은 전자분야보다는 모직 등 의류부분으로 성장을해서 서서히 전자분야로 확장을 하고 있는 시기였을것이다.

 

 

금성 라디오금성텔레비전
금성 라디오

 

 

기억에 어린시절 최고의 전자제품은 '럭키금성'이다.. 현재 LG의 모태가 되는 회사로 당시 대부분의 가정집은 아마도 금성제품의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사용했을것이다. 우리집도 정확히 기억안나지만 내가 국민학교 2.3학년???정도까지 로타리 흑백 텔레비전을 보았고, 그 이후에 컬러 tv를 본 기억이 있다.

 

 

포니1
포니 1

 

 

 

현대 자동차가 국내 첫 번째로 독자 개발한 고유모델자동차 현대 포니(pony)1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공업의 자립과 도약의 발판이 되어준 차종으로 자동차 산업과 기술 발전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5년 생산이 시작되어 판매 첫 해인 1976년에 국내 승용차 시장의 43%를 점유하였고 1982년 포니2가 나올 때까지 단일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3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다. 1976년 에콰도르에 5대가 수출돼 국산 1호 수출 승용차로도 기록되었다. 본 차량은 뉴질랜드로 수출되었던 것으로 핸들이 차량 오른편에 있다.(설명)

 

현대 자동차는 흔히 현대라는 이름때문에 정주영 회장으로 각인되지만, 실질적으로 현대 자동차를 지금에 이르게 한것은 그의 동생인 정세영 회장이다. 정주영 회장은 동생인 정세영 회장을 상당히 아꼈다고한다. 본인이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기에 똑똑한 동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이에 정세영 회장도 형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에 그에 보답했다고 한다.

원래 현대자동차는 정주영 회장이 일제강점기 시절 자동차 공업사를 인수하여 시작한것이 그 시초이며, 이를 후에 정세영 회장이 이어받아 지금의 현대자동차의 기반을 만든것이다. 정주영 회장 사후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현대는 여러 계열사로 쪼개지게 되는데, 현대 자동차는 정세영 회장의 아들인 정몽규가 아닌 정주영 회장의 첫째인 정몽구 회장에게로 이어진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정몽구 회장은 나름 정몽규 회장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현대 산업 개발을 그에게 맡겼고, 그는 현대 산업 개발을 HDC 그룹으로 성장시킨다. 현대가는 정주영 회장시절부터 가족간의 우애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러한 집안의 가풍도 한 몫하였을 것이다. 뭐.. 첫째와 둘째는 좀.. 거시기했지만... 

참고로 우리집 첫번째가 포니2였다.. ㅎㅎㅎ

 

 

새마을계획
새마을 운동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것은 '새마을 운동'이다.

'잘 살아 보세'란 구호로 모든것이 표현되는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국민들의 요구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의 정책과 의지가 결합되면서 상상 이상의 결과를 낳게된다. 내 기억에도 어린시절 우리 아부지가 항상 일할때 쓰고다니셨던 녹색의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모자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ㅎㅎㅎ

 

 

새마을운동 조감도

 

 

새마을 운동의 핵심은 마을 공동체의 부활이었다. 특히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서서히 공업중심으로 사회의 생산 주류가 바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방 도시들의 생산 주력은 농업이었다.

 

 

삼양라면다이얼 전화기

 

 

삼양라면과 럭키치약, 그리고 다이얼 전화기.. 왜 난 이것들에 익숙하지.. ㅠㅠ

 

 

전기보온밥통과 석유풍로
전기 보온밥통과 석유풍로

 

 

어린시절에는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떼서 밥을 지었다..(그렇다.. 내가 말한 어리시절은 1980년 초반이다..ㅠㅠ) 그렇게 지은 밥을 아침에 먹고나면 밥을 스덴 밥공기에 담아 이불속에 넣어두었다가 점심을 먹곤했다. 이러다가 내가 4학년때인가 처음 전기 밥솥을 산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에도 되게 신선했다..ㅋㅋㅋ 

석유풍로는 1970년대 주로 사용되던 석유를 연로로 사용한 취사기구이다. 불이 붙은 심지로 화력을 조절할 수 있었다. 아궁이와 연탄 화덕을 대체하며 가정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근데 이거.. 보통 '곤로'라고 하지 않았나.. -_-;;

 

밥그릇 tmi....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밥을 많이 먹었다.. 상당히 많이 먹었다...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돼지를 먹기위해 키우지 않았고, 당시 돼지는 지금의 돼지와 품종이 달라서 먹을게 별로 없었다고한다. 소는 농사를 짓는데 매우 중요한 가축이어서 정말 부잣집이 아닌 이상 소를 잡아 먹을일은 거의 없었다. 소가 있는 집도 늙어서 죽는 소가 있어야만 먹었지, 당시에는 단백질을 보충할 마땅한 고기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밥을 겁~~~~~~나 많이 먹었다. 지금은 삼시세끼가 당연한것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아침과 저녁, 딱 두끼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듯하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한끼먹고, 일을 다 마치고 집에들어와서 또 겨우 밥한끼먹고..당연히 배가 고플수 밖에없다. 지금처럼 먹을게 많은것도 아니고, 먹을거라곤 그저 아침, 저녁으로 먹는 밥이 전부였으니.. 그래서 조선시대 말기 외국기자가 조선에서 일반 평민들이 먹는 식사의 양을 보고 까물어쳤다고 하지 않나.

지금의 밥그릇 규격은 국가에서 만들었다. 1970년대 국가에서 국민들의 쌀 소비량이 너무 많아지자 밥 그릇의 규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폭 10.5cm, 높이 4.5cm로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식당에서 먹을때 나오는 스덴 밥그의 규격이다. 이게 대략 350g 정도 된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것의 배가되는 약 690g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건 고구려 당시에는 밥 한그릇의 양이 1,300g이었다고 한다.. ㅠㅠ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은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양갈래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조선시대의 식사량이었다고 한다..  ㅋㅋㅋ 당시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성인남자 3명이 밥을 먹고 입가심으로 참외를 먹었는데  그 수량이 28개였다고 하니 1인당 9개씩 참외를 해치운것이다..-_-;;

생각해보면 이해도 된다. 죽어라 농사는 지어야하고, 그렇다고 단백질을 보충할 방법은 거의 없고.. 먹을거라곤 쌀이 전부인데 당시 쌀의 품종이 지금처럼 맛있고 영양가있는 쌀도 아니었을것이고... 옛날 제주도 사람들은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귤나무 귤의 숫자까지 세어서 관에서 관리했다고 하니....참...... 불쌍한 우리 선조들이다.. ㅠㅠ

 

 

1970년대 대중문화대한민국 역사박물관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도 서서히 대중문화가 잉태되기 시작했다. 포크가 가요에 서서히 주류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스포츠는 아마단계였지만 서서히 프로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5.18 민주화 운동과 5.16 군사정변전까지의 대한민국이다. 1987년 이후가 되어서야 이제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일부가 나오기 시작한다..ㅋㅋㅋㅋ

1987년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달 6월 10일을 즈음하여 올릴까한다. 1987년 6월 10일은 전씨 정권에 맞서 전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대한민국은 이후 진정한 의미의 대통령 직선제를 이룰 수 있었지만 우리는 보통사람으로 변장에 성공한 전씨의 친구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게되었다.. ㅠㅠ 이 이야기는 다음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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