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2편 1987 - : 나-대한민국-세계
- 여행과 맛집/곰돌이의 여행
- 2023. 6. 10.
대한민국 역사발물관 마지막 포스팅이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길게 포스팅할 생각이 없었으나,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역사와 다른 부분이 있기에 내 의견을 첨부하다보니 예상과 다르게 포스팅을 나누어 작성하게 되었다. 오늘은 대망의 마지막 포스팅, 1987년 이후의 대한민국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2편 1987 - : 나 - 대한민국 - 세계'이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 6월 민주 항쟁
1987년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아마도 6월 민주 항쟁인 6.10 항쟁때문일 것이다. 1987년도이니 난 그때 국민학교 2학년... 8살때였다..(난 빠른 80이다..ㅋㅋ 이제 만 나이도 없어졌는데.... ㅡㅡ;;)
오늘은 6월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은폐, 축소된 것이 밝혀지게 되고, 그 해 6월 9일 연세대 이한열 군이 시위과정에서 부상을 입게되면서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6.10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 노태우의 6.29선언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뜻한다.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씨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경탄압으로 일관하였는데, 서울대 박종철군이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사망하게 되자 거리시위가 전개되었다. 영화 '1987'에서 김윤석이 박종철 군이 죽은 이유를 설명할때 '탁!치니 억!하고... 응?' 은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그때당시 뉴스를 찾아보면 우 현이 연기한 경찰국장의 버벅거리는 답변을 당시 뉴스에서 실제 경찰국장이 그따위로 버벅거리며 인터뷰에 응하고있다.
전씨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무력으로 탄압하면서 1987년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게된다. 김영삼, 김대중등 당시 야당의 주요 정치인들도 통일 민주당 창당 방해등을 겪으며 전씨의 반대세력은 전부 탄압을 당하였고, 이에 각계각층에서 '군사정권 유지를 위한 호헌조치 반대성명' 등 민주시국선언을 잇따라 내놓으며 서서히 민주화 투쟁열기는 높아져갔다. 그러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열사가 시위과정에서 머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히면서 사경을 헤메게 되자 민주화 투쟁은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이 총집결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으로 이어져 비폭력 민주헌법 쟁취선언, 전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된다.
이는 결국 당시 여당인 민정당 대표인 노태우가 6월 29일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통해 대통령 선거 직선제와 평화적 정부이양,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 및 복권등을 골자로 한 선언을 발표하게된다. 이것이 6.10 민주항쟁의 승리이자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자발적인 국민들의 비폭력 시위로 일궈낸 것이 6.29선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의 이정표를 세웠다.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국민기본권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뿌래닐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노동자와 농민도 삶의 현장과 거리에서 자유와 평등,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요구하는 깃발을 올렸다.(설명)
1970년대 대한민국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는 전쟁에 폐허가 된 세계 최빈국에서 개발 도상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국민들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잘먹고 잘살자'였다.
지방 도시는 '새마을 운동'을 기반으로 마을 공동체가 복원되었고, 일부 지방의 몇몇 도시들은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서서히 대한민국도 농업생산에서 공업생산으로 그 주류가 바뀌고 있었다. 대표적인 공업도시가 경북 구미와 포항이다. 서울은 전국각지에서 돈을 벌기위해 상경한 사람들로 인해 그 인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정부는 강제적으로 강북 유명학군을 강남으로 이전시키며 강남 개발을 진행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부모님들의 최대 목표는 자식 농사였고, 강남은 8학군이 형성되며 이때부터 우리나라 최고의 신흥 부자지역으로 거듭나게된다. 이때 지어진 강남의 아파트중 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아파트가 '은마 아파트'이다.
6월 10일 국본이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를 시작으로 6월 30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개헌 선언까지 숨가쁜 6월 항쟁의 흐름이 신문 1면에 담겨있다.(설명, 이경출 기증)
분명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되어있다. 최소한 이를 부정하는 세력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보통사람과 3김...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치열했던 대통령 선거였을 것이다.
1987년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운동은 끝났지만, 이후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노동자는 민주노조 건설과 작업현장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노동자 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시민운동가와 농민, 빈민, 환경운동가들도 활발하게 사회적 민주화와 생존권을 요구하였다. 여성계는 호주제 철폐운동을 전개하였고, 장애인의 복지를 주창하는 인권운동도 일어났다.(설명)
tmi....
호주제라는 제도가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제도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이 당시의 민주주의는 8.15 광복당시와는 달리 국민들이 직접 쟁취한 것으로 이때부터 실질적인 민주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여성계의 호주제 철폐운동과 장애인 복지 운동은 민주주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여성계의 호주제 철폐운동과 관련하여 최재천 박사의 이론은 큰 울림을 주었고,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미토콘드리아는 부계가 아닌 모계로 추적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제시됨에 따라 현재의 여성운동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최재천 박사는 '개미박사'로도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의 다윈 진화론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 호황의 시대... 그러나....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하던 호황의 시대를 보냈다. 국민 대부분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하거나 곧 중산층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검소와 절약을 생활화하던 사람들은 호황의 성과를 누렸다. 호황과 민주화가 가져온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는 대중소비의 시대를 열었다.(설명)
이런 그래프는 초기 개발 도상국에서나 볼 수 있는 그래프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래프이다.
1980년대 컬러시대로의 전환 후 대중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음악, tv, 영화등 문화전반에서 단순히 듣는 즐거움에서 벗어나 보는 즐거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국풍81, 84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 올림픽등을 통해 독재군부의 피해를 전환시키려 하였지만 결국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한민국의 군부독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 IT강국으로의 발전
위기뒤에는 기회라고 했던가.. 대한민국은 I.M.F이후 정부의 주도적 계획아래 전세계 IT 강국으로 발돋움하게된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관련하여 많은 비판도 함께 했었지만 그 당시 정부의 IT산업 지원덕분에 20년 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IT강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발전이 아닌 그와 관련된 모든 산업들의 동반 성장으로 이뤄지게 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 평화와 갈등
1989년 유럽 냉전을 상징하던 독일이 통일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탈쟁전이 진행되었다. 탈냉전은 한국의 대외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소련과 중국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를 이어갔다. 북방정책은 탈냉전에 대응하여 주변국과의 외교를 통해 납북의 긴장완화와 평화공존 문제를 풀어가려는 시도였다.(설명)
1980년대 말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남한과 북한도 대화의 분위기를 만들기 우해 노력하였다. 정부는 옛 공산권 국가와 관게를 개선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남북은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공존의 기본원칙에 합의하고 민간교류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화와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평화공존의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남북 모두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더 적극적으로 기울여야 한다.(설명)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2탄(역사관) - 촛불시위, 수요집회, 그리고 세월호....
이제 위안부 할머니가 몇 분이나 생존해계신건가..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 그분들은 진정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수요집회는 국가가 지켜주지못한 힘없는 국가를 살아간 자들의 마지막 작은 울림이다.
아직도 이날을 잊지못한다.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속보가 쏟아졌다. 제주도(?)로 향하던 안산지역의 고등학생들이 타고있는 세월호가 갑자기 침몰했다. 이 사태자체가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태지만, 난 이 세월호 사건이 이렇게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로 남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대한민국 대통령은 보고되지 않은 7시간동안 무엇을 한건가.. 정말 요가를 하고, 제대로 된 보고를 받지 못한것인가.. 아니면 보고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해야하는 상황인건가...
대한민국이 건강하게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그 증거가 바로 '촛불시위'다. 촛불시위야말로 바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깨어있는 시민의식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최초(?)로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대통령은 국민의 힘으로 다시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의 순기능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난 솔직히 이 분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ㅠㅠ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이분은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사용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비디오 영상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작품과 비디오 영상을 결합하고,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였으며 여기에 음악과 신체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까지 더해저 백남준만의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다...라고 설명되어있다.. -_-;;
드디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포스팅이 끝났다. 돌이켜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금은 안타까운 박물관이다. 왠지 누군가의 업적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생각되어지는 글귀와 작품들, 그리고 어이없는 설명의 오타까지.... 무엇이 그리도 급했을까...당초 일개 그룹의 신화가 대한민국의 신화로 이어지지 않음을 왜 이때당시 투표할때는 몰랐을까... 많이... 씁쓸하다....